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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7
글로리아 네일러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토니 모리슨, 앨리스 워커를 잇는 미국 흑인여성작가.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는 이 짧은 문장이 맘에 들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도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읽고 영감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하니, 이 평가는 넘치는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닐 것이다. '미국흑인'이나 '여자들', '페미니즘'에 꽂힌 건 아니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촘촘히'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드 <멜로즈 플레이스>를 떠올렸다. 시즌1로 막내린 미스터리 형식의 멜로인데, 흑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멜로즈 플레이스라는 펜트하우스에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변주곡이라는 점에서만 닮았다. 세입자들은 각자 비밀을 갖고, 사랑과 우정, 배신과 질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멜로즈 플레이스의 마당에 있는 수영장에서 주인여자가 시체로 떠오르지만 않았다면. 이 죽음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세입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미스터리 구조다. 옴니버스라기에는 뭣하지만, 같은 장소의 공동체적삶을 묘사해내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리고 이 책은 참 따뜻하면서도 무엇보다 쉽게 읽히고 재밌다.
토니 모리슨은 원래 몇 권 갖고 있어서 앨리스 워커와 글로리아 네일러를 함께 사들였다. 이들은 흑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태생이든 문학의 주제든 인종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비슷한 선에 존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이제 내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서 저지른 주문이었다. 한동안 누구의 아픔에도 발 담그기 싫은 무료함이 계속되긴 했어도, 브루스터플레이스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여자들의 인생은 나를 실망시키지도, 들뜨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마지막까지 응시한 나는 마음으로만 오래도록 그녀들의 거칠 것 없는 행복을 빌었다.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명제를 상기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대상불문하고 누구나 신파가 아닐까 싶어서 짧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인여자 일곱. 이들은 모두 과거나 현재에 내면의 상처, 한정된 상황, 흑인이라는 인종 안에 갇혀 부당한 어떤 일들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이다. 고정된 세상의 시선에 맞서 싸우는 여자가 있는 반면, 그저 살아가는 여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체념하는 여자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녀들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하나 더 공통점을 찾자면 어떠한 연유로 이곳, 브루스터에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기억을 통한 시간의 흐름은 마치 용해된 유리와도 같아서 분명하지 않다가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구체화할 수 있다. 3년이란 세월이 한 번의 대화, 한 번의 눈길, 한 번의 고통 속으로 녹아들어 갈 수 있다. 또한 한 번의 정신적 고통이 산산이 부서져 3년이란 세월에 고루 뿌려질 수도 있다. 시간은 말이 없고 아리송하여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날마다 조금씩 사라지지도 않는다. 한평생이 거품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투명한 파도를 타고 흘러가다가 이따금 기대하지 않았을 때 제멋대로 의식 위로 튀어 올라 물보라는 일으키는 한편으로 시간은 소용돌이치며 사람의 마음속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p.70)
매티는 사탕수수 내음이 온 초원을 가득 채우는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았다. 아버지는 교인에 아주 엄격한 분이어서 딸의 안전을 위해 많은 것을 금지시키며 키웠다. 집집마다 넘치는 일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와있던 일꾼 부치와 걷다가 의도하지 않게 그에게 남자 냄새를 맡게된 건 울퉁불퉁한 그의 팔근육과 사탕수수를 쳐내는 화려한 칼놀림이 아니라 푸른 초원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전해준 사탕수수 내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혼모가 되었고, 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다. 죄인처럼 고향을 떠나 아들 바질을 낳았고, 아무도 받아주는 곳 없이 떠돌다가 아무 대가 없이 자기와 아들을 받아준 미스 이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 손녀 시엘까지 넷이 한 집에서 산다. 20대에 미혼모가 된 그녀는 장장 30년을 이 집에서 보낸다. 아들 바질을 물고 빨고 감쌌던 매티의 母情의 끝은 결코,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바질의 엇나감과 나약함을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매끄러운 길
청명한 날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홀로
이 길을 여행하고 있는가
얼마나 기인한가
사랑이라는 길이 그토록 쉽다니
저 앞에 우회 도로가 있는 걸까? (pp.132-133)
본격적 이야기는 느즈막히 브루스터로 오게 된 매티와 한때 매티가 고향을 떠났을 때 함께 지내다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헤어졌던 에타가 매티가 있는 곳으로 오면서 시작한다. 옴니버스 식이라 일곱 명의 흑인여자들의 삶을 조명하고는 있어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연대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에타는 남자에게 기대 한평생 편안하게 살아간다. 남자들을 탐색하여 사랑을 빙자하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사랑한, 사랑받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 순간이 지나치게 짧고 마지막은 항상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만 빼면. 착실한 신도인 매티를 따라나섰다가 교회에 출장예배 나온 우즈 목사와 서로, 감정의 교란을 벌인다. 에타는 그가 자기 목적을 모르는 줄로 알지만 우즈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영특하다. 이 능숙한 게임은 보는 나마저 아릿하게 한다. 이 여자들에게는 어째서 하나같이 편리한 삶이란 없는가 하고. 그녀의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룻밤의 정사는 사랑으로 시작되지 못한 관계를 반영하는 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스와나는 흑인계 중에서도 꽤 안정적인 삶을 일군 부모님 품을 떠나 브루스터로 왔다. 아프리카계 이름으로 바꾸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브루스터 주민들과 연합하여, 흑인에게만 유독 가혹한 많은 상황들을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의 잔소리가 달갑지 않지만 키스와나는 그것 또한 사랑에서 나온 거란 걸 안다. 엄마는 딸이 부모님 그늘에서 편히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일궈내겠다는 '혁명'의 동기가 보잘 것 없다거나 중요치 않다고 여긴다. 한편, 말다툼은 본질을 벗어나 바깥 궤도를 공전하지만, 그녀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거나 가만 두게 될 것이다. 엄마와 딸이니까. 매티를 처음 받아줬던 미스 이바의 손녀 시엘은 집을 들락날락하는 남편 대신 홀로 딸을 키우다시피 한다. 시엘의 남편 유진은 매티 또한 달가워하지 않으며 뱃속에 든 아이를 부정하기까지 하다가, 어느 날 일자리를 얻어 다른 도시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남편을 붙잡으려는 시엘의 간곡함과 그녀를 뿌리치는 남편의 실랑이가 반복되는 동안, 방치되어있던 어린 딸은 감전되어 죽었다. 딸의 장례식 후, 처음에는 울부짖지도 못하던 시엘은 따스함이 남아있는 브루스터의 여자들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응어리진 마음을 토해낸다. 그녀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내는 단 한 사람은 역시, 매티 뿐이다.
코라는 어릴 적부터 인형을 좋아했다. 열세살이 넘도록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만 찾아대서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인형이 아니라 진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에게는 아빠가 다른 아이들이 여럿 생긴다. 열여덟 즈음부터 낳은 아이들은 커갈 수록 도로 뱃속으로 넣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하는데, 그녀를 찾아온 키스와나가 남자친구가 책임자인 <한 여름밤의 꿈> 공연을 보러 오라고 제안한다. 그날밤, 코라와 아이들 모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삶은, 이전과도 이후와도 다를 것이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두 여자가 브루스터로 들어온다. 소리소문도 없이 마을 주민이 된 테레사와 로레인을 사람들은 레즈비언으로 오해하고, 키스와나 주재 하에 열린 회의 차 모인 자리에서 주민 소피와 에타의 비난 섞인 다툼에 의해 크게 상처 입는다. 그녀를 위로하는 건 브루스터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중년남자 벤이다. 그는 로레인을 보며 자신의 딸을 떠올린다. 벤의 사연은 앞선 모든 슬픔을 압도할 만큼 마술적이고 환상적이다. 과거의 일과 상상 속의 일이 뒤섞여 설명되는 벤과 아내, 딸은 평범한 가정이 사소한 일로 어떻게 산산조각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로레인과 벤의 불행은 우연히 일어난 슬픈 비극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2008년은 미합중국의 대전환의 해였다. 미국 정치사상 최초로, '백인'이 아닌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미래의 시작이다. 미국은 유럽의 백인들이 16세기부터 몰려와 토착 미국인(이른바 인디언)들을 멸절, 희생시키고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온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만든 나라다. '노예'로 시작된 흑인들의 위상은 '검둥이'와 '흑인'을 지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적 정의'에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이르렀다. 토착 인디언을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착취되고 억압되고 차별됐던 미국 흑인들의 지위가 날로 새로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342)
브루스터로 몰려든 흑인들 중 특히 여자들의 삶을 조명한 '소수자 담론'이자 '타자의 서사'라고 옮긴이가 덧붙인다.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그 속에 든 아픔은 미국흑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난, 차별, 가족해체 같은 것들이다. 흑인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인종과 성, 두 가지 차별이 복합화되어 더욱 부조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백인이 사는 거리와 벽 하나의 차이를 두고 형성된 브루스터, 일곱 명의 여자들에 대한 사연이 끝나고 덧붙여지는 마지막 장의 '구역 파티'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이 안에서조차 하나가 될 수 없다. 타자의 시선에 의해 억눌린 감정이 비슷한 위치의 이웃들에게 화살처럼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이들의 협동체를 구상하고 실현하려는 중심에 일곱 명 중의 한 명인 키스와나가 있고, 오랫동안 마을에 살며 모든 이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실제로 大母같은 역할을 해내는 매티가 있다. 그들이 바꾸려는 평등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백인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올려달라는 월세에도 개인적으로는 저항하지 못할 만큼 주눅들어 있거나 힘이 없다. 단결이 힘이건만, 여자들은 여전히 이웃과 으르릉 거린다. 후반부, 브루스터의 벽이 무너져내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흑인과 단절되어 있던 세계와의 화합 혹은 소통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소 모호하지만, 그들의 도전이 실패한 것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첫 술에 배부르랴, 의아해하면서도 한 번 힘을 모아본 이들은 다음 번에 더욱 필사적으로 힘을 모을 것이고, 다다음에는 비로소 같은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다다다음에는 서로의 불신을 완전히 깨고나와 불의에 대항할 것이고, 이후에는 완전히 그들만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언제나 흑인들의 요구는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달라는 것이었다. 네일러는 그 과정을 특히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아주 드라마틱하게 잘 그려놓았고, 이 소설은 단지 흑인 틈에서가 아니라, 백인들과 맞물려 상대적으로는 더 가혹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미국 흑인 여성들의 의지와 인내로 빚어진 삶에 대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처절하게 묘사하면서도 절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아주 희망적이다. 그래서인지, 막막하긴 하지만 아주 기분이 좋다. 나아가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생겨난다. 따뜻한 힘을 주는, 바닥에서 시작하지만 아주 발랄한 시작이다. 갑오개혁으로 법제적 신분제가 폐지되고 완전한 노비해방이 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신자유주의 물결로 온 세계가 휩싸여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1982년에 발표된 이 소설과 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변하고 있고, 변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감정적이지만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연애소설 같은 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