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결 속에
화도 안 내고 칭찬도 안하는
참 한심한 수백 나한들

나도 이 바람 속에서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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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게
_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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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 눈은 곧 익숙해진다. 어둠 속에서도 보인다. 보려는 마음도 없는데 몸은 조건에 반응한다. 낮을 생각한다. 생각에는 빛이 필요하지 않다. 코스모스를 사랑한다. 길가에 핀 꽃에게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 사랑 때문에 꺾이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그 꽃도 어둠 속에 있겠구나. 차가운 바람이 그 꽃을 춤추게 할까, 떨게 할까. 꽃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일 뿐일까. 계절이 바뀌면 꽃은 질 것이고 여러 해가 바뀌면 내가 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사라질 것이라 소중한가, 사라질 것이라 부질없는가. 어둠은 고요와 어울린다. 어두운 방에 앉아 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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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 타인이 풀어놓은 감정 꾸러미의 대상이 되는 일은 얼마나 힘겨운가! 너는 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인데,
_페르난두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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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작은 메모를 남기고 몇 차례 버스를 갈아 타고 먼길을 갔다. 가본 적 없는 곳에서 입어본 적 없는 옷과 불려본 적 없는 이름을 갖고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다르고 새로운 삶 속에서도, 익숙한 생각과 그 삶에 익숙해지려는 애씀이 하루를 가득 채웠다. 존 카바진의 말처럼 어디를 가든 거기엔 내가 있었다.

멋진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에게 편안한 마음과 좋은 이웃이 있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어떤 풍경도 사람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아이가 "엄마"하고 부른다. 순간 나는 엄마가 된다. 다른 삶이 펼쳐진다. 아이는 매일 자라고 매일 새롭다. 아직도 나는 엄마라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른 삶이라는 것도 사람에게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다른 삶.

그럼에도 간혹 목소리마저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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