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어머니와 친구와 나. 셋이서 일년 가까이 산 적이 있다. 내가 얹혀 산 거였는데 식구처럼 잘 지냈다. 친구가 결혼하고 힘든 일이 생겨 친정에 왔을 때 어머니를 뵀다. 그때 친구 어머니가 그러셨다.

˝너랑 우리 셋이 살 때 고스톱 쳤잖아. 그때가 제일 좋았어. 그때가 내가 살면서 제일 좋은 때였어.˝

한번씩 이 말이 생각이 난다. 셋이서 고스톱 칠 땐 내 친구 결혼 늦다고 걱정을 그렇게 하시더니 그때가 제일 좋았다고.. 지금 어떤 근심이 있어도 어쩌면 하찮은 일이거나 시간이 해결하거나 걱정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일 지 모른다.

그래,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특별한 일 없이 지나는 오늘이, 몇 번이고 웃을 수 있는 하루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친구 어머니 그 말씀이 생각이 났다. 조금 더 자주 떠올리고 싶어 여기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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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깨어있으면 무언가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개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거나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말할 수 없는 얘기... 아직 밖은 차다. 어둠이 몰고 다니는 서늘함.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는 하나마나한 얘기일 수도.

언젠가 오빠가 한 말이 생각 난다. 내가 스트레스 용량이 적다고. 그러니 그때그때 비워내라고. 나도 담대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어른의 옷을 입은 아이다. 일상에 능숙한 듯 생활하면서도 속으론 때로 버겁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나 같을지도 모른다. 모두 쉬쉬하고 있어서 서로 모르는 것일지도.

아무 일도 없다. 강박증 환자나 실제보다 몇 배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처럼 내가 힘든 건 가상일 뿐이다. 마음이 지어내는 것, 습관이 지어내는 것, 업이 지어내는 것.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처럼 마음이 지은 허상은 무시하는 것 외에 뾰족한 답이 없다.

자야겠다. 뇌와 눈에게 휴식을 줘야겠다. 잠들 수 없는 심장에게 깨어있는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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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청소년를 위해 쓴 글들에서 어색한 무언가를 느끼곤 했는데 중학생이라 그런지 내 사춘기 때가 또렷이 떠오른다. 죽었다고 상상할 때 이 삶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또래가 얼마나 비겁하게 보이는지,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자유를 갈구하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엄마가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런 이야기들이 이 책을 채우고 있다. 친구가 죽은 후 남긴 일기장과 그 일기장을 읽는 아이. 두 아이의 속마음을 통해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

내 사춘기 때는 무엇을 고민했었는지, 나는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 사랑은 얼마나 절실했는지...그야말로 질풍노도였던 그때. 나도 재준이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영원 같은 단어를 좇으며...이런 생각들 위로 내 아이들이 겪을 그 시간이 엷게 겹쳐진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될까.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나만큼, 나보다 더 방황할 수 있으리라. 무엇으로도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나는, 나는... 
 

p.50  저 지옥! 저러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단지 이 아이들은 비겁하고, 소심하고, 타협적인 것이다. 지난 학교의 아이들은 배짱이 있었다. 그래서 때릴 테면 때려라, 나는 자야겠다고 나왔던 것이고, 아이들이 모두 그러자 선생 쪽에서 항복하고 만 것이었다. 사실 그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졸음이 안 오는 애들이나 열심히 들으면 된다. 선생님도 그런 애들만 신경 쓰면서 가르치는 쪽이 훨씬 보람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모두들 지옥처럼 졸음의 고통에 싸우면서 오직 매가 두려워 안 자는 척 기를 쓰고 있다. 하긴 나라도 먼저 배짱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도 그런 일을 시작하기가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도 그런 일을 시작하기가 귀찮았다. 몽둥이로 맞는 일도 기분 좋은 일은 분명 아니니까.

p.55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다. 그냥 말이다. 성실함과 능력이란 것 역시 아빠 속에 녹아 있는 한 부분이지, 성실함과 능력을 싹 도려 낸 나머지 아빠만 사랑한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p.95 이걸 잘 하냐 못 하냐는 오로지 그걸 즐기느냐, 버티느냐의 차이야. 즐기면 오래 가지만 버티면 금방 끝나. 그게 요령이야.

p. 149 엄마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짜증이 난다. 무섭고, 화만 내는 엄한 엄마보다 어쩌면 우리 엄마처럼 약하고, 잘 다치는 엄마가 더 무서운 엄마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소리지르고, 매를 드는 법이 없지만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한다. 엄마는 나한테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p.149 그래, 우리 엄마 역시 내게는 감옥이다. 모든 걸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같지만 그러기에 나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모든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반항할 필요가 없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건 또 하나의 감옥이다. 결국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다 감옥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p.151 나도 알고 있다. 정소희가 훌륭한 아이여서 내가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런 왜? 모르겠다.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 없다. 그냥 내 마음이 그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소희 생각으로 미칠 것만 같은데, 걔 옆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루 종일 그 애가 보고 싶고, 이 세상에서 그 애가 제일 예뻐 보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p.166 나는 참 보잘것 없는 남자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나, 공부를 잘 하나, 운동을 잘 하나, 달리 뾰족하게 잘 하는 게 있나......기껏 채플린 흉내를 조금 낼 줄 알지만 그거 가지고 인생을 살아 나가기란 벅차다. 하긴 게임도 조금 잘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다. 나는 정말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p.12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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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으로 이 나무를 흔들어보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은 이 나무를 흔들어 괴롭히기도 하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부리기도 하지. 우리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더없이 모질게 구부러지고 시달림을 받고 있지 않는가.

(중략)

뭘 그리도 놀라는가? 사람도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나무가 더욱 높고 환한 곳을 향해 뻗어 오르려 하면 할수록 그 뿌리는 더욱더 힘차게 땅 속으로, 저 아래로, 어둠 속으로, 나락으로, 악 속으로 뻗어 내려가려 하지.

 

-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역, 책세상, 2006, 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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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비에 꽃들이 씻겨 내리고 나무의 연두빛은 더 선명해졌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간다. 젖은 아파트 주차장에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차 바퀴에 깔리지는 않을까, 옮겨 놓을까 하다 그냥 지나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면 뭐하러 지렁이를 염려하나, 이런 건 염려도 아니지. 호기심일 뿐이지. 찜찜한 마음에도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를 읽는다. 책 제목을 듣고 친구가 크게 웃었다. 아마도 전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는다고 했던 게 생각났나 보다. 죽는 얘기를 하고, 죽는 책을 자주 읽다 보면 죽는 얘기도 유머가 될 수 있다. 책 제목만으로도 빵 터지는 거 봐. 햇살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빛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아주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딱 삶만큼의 무게일 것이다. 삶이 조금 더 익숙한 것일 뿐.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산 자들은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한 자들은 여기 없으니. 

 

벌써 목요일이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적이 없다. 왜 일까? 너무 많은 것들을, 유일한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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