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동정

-최영미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
차와
동정뿐.

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
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
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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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늪으로, 사막으로 내 보내 죽음의 거머리와 하이에나에게 물어뜯기게 하는 것이다.

p.21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은 또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

p.180 마음아, 이젠 좀 지치려무나. 칭얼대지 마라. 네 수레바퀴는 빠져버렸단다.

p.217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랑은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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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기 위하여
-정희성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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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風景
-이성복


형은 장자(長子)였다 `이 책상에 걸터앉지 마시요―장자백(長子白)`
형은 서른 한 살 주일마다 성당(聖堂)에 나갔다 형은 하나님의
장자(長子)였다 성경(聖經)을 읽을 때마다 나와 누이들은 형이 기르는
약대였다 어느날 형은 아버지 보고 말했다 <저 죽고 싶어요
하란에 가 묻히고 싶어요> 안될 줄 뻔히 알면서도 형은
우겼다 우겼지만 형은 제일 먼저 익은 보리싹이었다 나와
누이들은 모래 바람 속에 먹이 찾아 날아다녔고 어느날 또
형은 말했다 <아버지 이제 다시는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겠어요 좋아요 다시는 안 돌아와요> 그날 나는 울었다
어머니는 형의 와이셔츠를 잡아 당기고 단추가 뚝뚝
떨어졌다 누이들, 떨어지며 빙그르르 돌던 재미 혹시
기억하시는지 그래도 형은 장자(長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의 아들 딸이었고 누이들, 그대 산파(産婆)들 슬픈 노래를
불렀더랬지 그래도 형은 장자(長子)였다 하란에서 멀고 먼
우리 집 매일 아침 식탁(食卓)에 오르던 말린 물고기들
혹시 기억하시는지 형은 찢긴 와이셔츠처럼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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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싸움의 기록
-이성복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法도 없는 동네냐 法도 없어 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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