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깨어있으면 무언가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개는 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거나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말할 수 없는 얘기... 아직 밖은 차다. 어둠이 몰고 다니는 서늘함.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는 하나마나한 얘기일 수도.

언젠가 오빠가 한 말이 생각 난다. 내가 스트레스 용량이 적다고. 그러니 그때그때 비워내라고. 나도 담대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어른의 옷을 입은 아이다. 일상에 능숙한 듯 생활하면서도 속으론 때로 버겁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나 같을지도 모른다. 모두 쉬쉬하고 있어서 서로 모르는 것일지도.

아무 일도 없다. 강박증 환자나 실제보다 몇 배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처럼 내가 힘든 건 가상일 뿐이다. 마음이 지어내는 것, 습관이 지어내는 것, 업이 지어내는 것.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처럼 마음이 지은 허상은 무시하는 것 외에 뾰족한 답이 없다.

자야겠다. 뇌와 눈에게 휴식을 줘야겠다. 잠들 수 없는 심장에게 깨어있는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를 위해 쓴 글들에서 어색한 무언가를 느끼곤 했는데 중학생이라 그런지 내 사춘기 때가 또렷이 떠오른다. 죽었다고 상상할 때 이 삶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또래가 얼마나 비겁하게 보이는지,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자유를 갈구하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엄마가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런 이야기들이 이 책을 채우고 있다. 친구가 죽은 후 남긴 일기장과 그 일기장을 읽는 아이. 두 아이의 속마음을 통해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

내 사춘기 때는 무엇을 고민했었는지, 나는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 사랑은 얼마나 절실했는지...그야말로 질풍노도였던 그때. 나도 재준이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영원 같은 단어를 좇으며...이런 생각들 위로 내 아이들이 겪을 그 시간이 엷게 겹쳐진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될까.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나만큼, 나보다 더 방황할 수 있으리라. 무엇으로도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나는, 나는... 
 

p.50  저 지옥! 저러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단지 이 아이들은 비겁하고, 소심하고, 타협적인 것이다. 지난 학교의 아이들은 배짱이 있었다. 그래서 때릴 테면 때려라, 나는 자야겠다고 나왔던 것이고, 아이들이 모두 그러자 선생 쪽에서 항복하고 만 것이었다. 사실 그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졸음이 안 오는 애들이나 열심히 들으면 된다. 선생님도 그런 애들만 신경 쓰면서 가르치는 쪽이 훨씬 보람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모두들 지옥처럼 졸음의 고통에 싸우면서 오직 매가 두려워 안 자는 척 기를 쓰고 있다. 하긴 나라도 먼저 배짱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도 그런 일을 시작하기가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도 그런 일을 시작하기가 귀찮았다. 몽둥이로 맞는 일도 기분 좋은 일은 분명 아니니까.

p.55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다. 그냥 말이다. 성실함과 능력이란 것 역시 아빠 속에 녹아 있는 한 부분이지, 성실함과 능력을 싹 도려 낸 나머지 아빠만 사랑한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p.95 이걸 잘 하냐 못 하냐는 오로지 그걸 즐기느냐, 버티느냐의 차이야. 즐기면 오래 가지만 버티면 금방 끝나. 그게 요령이야.

p. 149 엄마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짜증이 난다. 무섭고, 화만 내는 엄한 엄마보다 어쩌면 우리 엄마처럼 약하고, 잘 다치는 엄마가 더 무서운 엄마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소리지르고, 매를 드는 법이 없지만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한다. 엄마는 나한테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p.149 그래, 우리 엄마 역시 내게는 감옥이다. 모든 걸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같지만 그러기에 나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모든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반항할 필요가 없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건 또 하나의 감옥이다. 결국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다 감옥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p.151 나도 알고 있다. 정소희가 훌륭한 아이여서 내가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런 왜? 모르겠다.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 없다. 그냥 내 마음이 그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소희 생각으로 미칠 것만 같은데, 걔 옆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루 종일 그 애가 보고 싶고, 이 세상에서 그 애가 제일 예뻐 보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p.166 나는 참 보잘것 없는 남자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나, 공부를 잘 하나, 운동을 잘 하나, 달리 뾰족하게 잘 하는 게 있나......기껏 채플린 흉내를 조금 낼 줄 알지만 그거 가지고 인생을 살아 나가기란 벅차다. 하긴 게임도 조금 잘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다. 나는 정말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p.12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손으로 이 나무를 흔들어보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은 이 나무를 흔들어 괴롭히기도 하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부리기도 하지. 우리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더없이 모질게 구부러지고 시달림을 받고 있지 않는가.

(중략)

뭘 그리도 놀라는가? 사람도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나무가 더욱 높고 환한 곳을 향해 뻗어 오르려 하면 할수록 그 뿌리는 더욱더 힘차게 땅 속으로, 저 아래로, 어둠 속으로, 나락으로, 악 속으로 뻗어 내려가려 하지.

 

-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역, 책세상, 2006, p.67-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오늘 비에 꽃들이 씻겨 내리고 나무의 연두빛은 더 선명해졌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간다. 젖은 아파트 주차장에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차 바퀴에 깔리지는 않을까, 옮겨 놓을까 하다 그냥 지나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면 뭐하러 지렁이를 염려하나, 이런 건 염려도 아니지. 호기심일 뿐이지. 찜찜한 마음에도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를 읽는다. 책 제목을 듣고 친구가 크게 웃었다. 아마도 전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는다고 했던 게 생각났나 보다. 죽는 얘기를 하고, 죽는 책을 자주 읽다 보면 죽는 얘기도 유머가 될 수 있다. 책 제목만으로도 빵 터지는 거 봐. 햇살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빛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아주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딱 삶만큼의 무게일 것이다. 삶이 조금 더 익숙한 것일 뿐.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산 자들은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한 자들은 여기 없으니. 

 

벌써 목요일이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적이 없다. 왜 일까? 너무 많은 것들을, 유일한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어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 여덟 단어 중 한 단어를 선택하라면 "현재"를 꼽겠다.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에게는 나머지 일곱 가지가 저절로 따라오지 않을까. 

좋은 책이다. 옳은 말이 있고, 그 말에 따라 살아가는 진지한 사람이 있다. 배울 만한 점이 있고, 생각할 만한 점이 있는 책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비틀린 걸까? 책 전체에서 반질반질한 뭔가를 느낀다. 진지하고 인생의 핵심을 얘기하는데 난 왜 교양과 예술을 얘기하는 똑똑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일까? 지인 중에 이런 얘기를 하고, 얘기를 나눌 때는 함께 취하지만 돌아서면 허전했던 사람이 있다. 언젠가 시를 읽고 그 느낌에 취해 절규하듯 말했던 사람이나 본질적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 모두 진지하고 감성 충만이었는데 돌아서면 나는 왜 그렇게 공허했을까.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꼬투리를 잡을 만한 몇몇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억지가 좀 있지 않나 싶어 관둔다. 작년인가 읽었던 책 중에 [바른 마음]이 생각난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가 느끼기에 싫은 감정이 있으면 그 말에서 바르지 못한 어떤 것을 찾게 된다는. 

 

제가 뉴욕에서 공부할 때 느낀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집어 넣으려 하지 않고 뽑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서른여섯에 사회생활을 하던 아저씨가 책상에 앉아 처음으로 디자인을 배우는데 주뼛댈 틈도 없이 교수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해온 숙제를 벽에 쭉 붙여놓고 좋은 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교수는 마치 칭찬을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뒤에는 왜 좋았는지 제출한 작품에 대해 해석해주고 자세히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학생이 부연 설명을 하면 그 말을 북돋아주더군요. 그러니 학생들은 과제를 하면서도 늘 신이 났고,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할 수밖에요. -p.26~27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거이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이 말에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심사입니다. 너무 많이 보려 하지 말고, 본 것들을 소화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피천득 선생이 딸에게 이른 말처럼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하는 삶.-p.126

하지만 우리는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맨 위에 있는 사람도 저 아래 있는 사람도 똑같아요. 그러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 윗사람들에게 강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약한,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p.176

이 훈련을 한번 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논문을 쓰기 전에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줄로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써보고, 그걸 다시 챕터 별로 나눠서 논문을 만들죠.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p.207

우린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우린 언제든지 질 수 있다.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