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 빨랫감 - 깨달음, 그 뒤의 이야기들
잭 콘필드 지음, 이균형 옮김 / 한문화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음을 스승께서 인정하셨던 그 정진 수련 이후 몇 달을 환희 속에서 지내다가, 나는 어느새 좌절에 빠져버렸다. 나중에 나는 단지 토니 패커를 만나보기 위해서 다른 수련회에 참가했다. 어느 날 저녁 강연에서 그녀는 큰 열림을 경험한 후에 사람들이 종종 좌절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것을 듣는 순간, 나의 좌절은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기나 했던 것처럼 말이다. -p.181

 

언젠가 나는 스승에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말뿐이었다.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선원의 초심자 수행에서 내가 사라지고 희열만이 가득한 체험을 했다. 나는 뻔뻔스럽게도 점검시간에 "나는 깨달았다"고 말했다. 점검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희열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상태가 깨달음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궁금해서 초기경전을 읽게 되었다. 깨달음이 아닌 삼매체험이 얼마나 자주, 많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인지 점차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아주 우연히 다시 내게 무언가 일어났다. 그 체험이 아이를 키우면서 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던 명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예전의 명상이 아니었다. 치솟는 망상과 혼침이 끝도 없이 계속되다 그것이 잠시 멈추었을 때, 가두어져 있는 과거와 변형된 환영들이 나를 압도했다. 울음이 자주 터져나왔다. 나의 울음과 기억과 무능감과 내면의 중얼거림들...그리고 자주 찾아오는 지나친 피로가 지긋지긋했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붙어 있어서, 그게 나여서 달아날 곳이 없었다. 달아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자 환영들이 달라졌다. 나는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토록 일관되게 달아나고만 있었을까...생각할 무렵 우연히 혜덕화님의 서재에서 이 책을 봤다. 별 생각없이 주문한 책이었다. 그런데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명상지도자들과 깨달은 이들이 수년을 겪었던 황홀과 환희 뒤에 모든 것을 잃고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깊은 위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기나 했던 것처럼 그 지긋지긋하던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다. 이 책을 읽은 그날 하루는 정말 신비로운 날이었다. 그런 날도 있는 모양이다.

 

새해에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한 해를 보내기로 했었다. 여기 스즈끼 선사의 말이 있다. "늘 그렇지는 않다"(p.182). 정말 위로가 된다. 환희와 희열을 경험한다 해도 늘 그럴 수는 없다. 고통과 울음 속에 있다 해도 늘 그렇지는 않다. 내게 불친절한 누군가에게 잠시 화가 날 수는 있겠지만 그가 늘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깊은 증오로 이어지지 않는다. 때로 걷잡을 수 없는 생각과 감정에 빠진다. 근래 그랬었다. 그런데 그 무거웠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에 그토록 중요해 보였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앞으로도 그렇게 어딘가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잠시 웅크리고 앉아 기다려볼 생각이다. 몇 시간이나 며칠, 혹은 몇 달이 될지도 모르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거기에 감쪽같이 빠져 있었군, 그렇지?"(p.367)하며 웃을지도 모른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 느린 화면처럼 그것들을 본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위로뿐만 아니라 수행지도자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환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 완벽한 모습을 기대한다면 그 기대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누가 깨달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은 경지에 있지 않고 태도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몇 해를 황홀경이나 높은 경지에 있다 가족의 외면과 질병, 내면의 좌절을 겪으면서 겸손하게 현재를 사는 법을 깨친다. 그 태도야말로 그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한다. 또한 나를 뭉클하게 한 것은 단 한차례의 특별한 경험 없이 수십 년을 수행해서 그가 얻은 변화가 진솔함이었다는 고백이다. 경전에 부처님께서 선정을 얻은 사람이 나는 선정을 얻었는데 저 사람은 얻지 못했구나 생각한다면 그는 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다. 바른 사람은 선정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그의 태도에 있다.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외에 무엇도 없다. 무엇을 가져도, 무엇을 느껴도 그것을 잃을까 염려하는 순간 평화는 사라진다.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을까? 오래도록, 정말 지나치게 오래도록 과거와 미래, 후회와 불안으로 살아와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라니! 그렇게 살아보질 않았다. 아잔 차 스님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숨쉴 시간은 있는가? 결심을 했다면 그냥 거기에 주의를 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숨을 쉬는 것, 온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 진실을 보는 것 말이다"-p.8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덕화 2014-01-27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매의 경헙은 없습니다.
하지만 절을 하면 할 수록,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게 되고
남을 알기는 커녕 나 자신에게 얼마나 속고 사는지 보게 되더군요.
십년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항상 자신에게 묻습니다.
일상에서 내가 만나는 아이들, 남편, 자식, 부모, 형제, 친구와의 관계에서
내가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삼천배가 무슨 소용있지?
인격의 변성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조차 못하다면
굳이 깨달음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식 강의를 들으면서, 그냥 절만 하던 때와는 또 다른 인식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아직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선재동자의 적극성은 없지만
그냥 편안하고 평온합니다.
이누아님.
그리운 이름이라 불러봅니다.
_()_

이누아 2014-02-05 12:23   좋아요 0 | URL
일상에서 가족과 이웃에게 친절하지 않다해도 저는 여전히 삼천배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친절하지 않는 것은 내 속의 내가 너무 시끄러운 탓이니 단 한번의 진실된 조아림을 위해 필요하고, 친절하다면 친절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기에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매일 수행하지 않으면 자비심을 잃게 된다는 달라이라마의 말씀이 언제나 제 안에 있습니다.

굳이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타인에게 위로가 되고, 본보기가 되고, 따뜻함이 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혜덕화님도 제게 그런 사람이지요. 작은 언니를 잃고 얼굴도 모르는 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저 책을 정리하신다고 남긴 리뷰를 보고 산 책에서 제가 이렇게 큰 위로와 안도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우연이고, 어쩌면 님을 통해 보내주신 관세음보살님의 보살핌이겠지요.

혜덕화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