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빵 강성은

 

 

피 묻은 빵을 먹는다

입속에 피가 고인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피 묻은 빵을 먹는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삶

배가 고프다

먹어도 배가 고프다

시계가 멈춘 것도 아니데

내일이 오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빵

동네마다 빵집이 많고

아름다운 빵들이 진열된 환한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한 바구니씩 빵을 담고

값을 지불한다 피 묻은 빵의 값

뱀파이어는 피를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할까

뱀파이어도 아닌데

나는 피 묻은 빵을 먹는다

입속에 피가 고인다

누구의 피일까

이토록 익숙한 맛은

 




세계가 불타는데 / 강성은

 

 

어느 해에는 사람들이

여자들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고

다음 해에는 여자들이

스스로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불은 여자들을 태우고 그다음 해에는 모두를 태웠다

그래도 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에 타 죽은 줄 모르고

자꾸만 자기 머리채에 불을 질렀다

 

이상하게 몸이 차갑구나

불을 피웠는데 너무 빨리 꺼져서

머리를 잘랐는데 순식간에 길어져서

알 수 없는 이들이 자꾸 일어나서

춥고 불타는 세계가 동시에 펼쳐져서

 

쇼핑을 하다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밥을 먹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수영장에서 투명해지는 몸을 보고는 어쩔 줄 모르고

불이 붙은 커튼을 걷으며

 

이렇게 추운데 불이 났을 리가 없지

오들오들 떨며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얼음장 같은 이불을 덮는다

 

이상하게 몸이 차갑구나

세계가 불타는데 아직도 너무 춥구나

 

세계가 불타는데

세계가 불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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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6-03-3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안녕하세요.^^

제가 늘 찾는 시인의 시집만 읽다보니
이누아님 덕분에 이제야 강성은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집을 검색해보니 강성은 시인이 등단한지 벌써 20년이 된 시인이시네요.
언젠가 시집 이름이 Lo-fi 라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많은 독자들과 만났으면 하고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