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죽여서 처리한다니, 살처분이라는 말이 섬뜩해. 그 방법밖에 없다니 안타깝고 안타까워. 어느 해는 300만 마리가 넘게 살처분되었대. 그 과정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이 과로사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지.

 

오늘 기사에 보니 한 마을에서 천 마리 넘는 돼지를 묻었는데 그 악취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 남의 밭을 헤집은 적도 없는데, 사람을 죽인 일도 없는데, 그 돼지들은 병들었다고 죽어야 해. 그만큼 죽었는데 돼지를 기르던 사람만 불편하다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모른다는 말을 문장 끝에 자주 써. 모르고 싶은 것인지도 몰라. 안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이며, 안다면 얼마나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싶은. 아니, 그보다는 아예 모르고 싶은 것인지도.

 

어딘가 악취가 풍겨도 거기 안 살면 된다고, 거기 살면 시간이 지나면 된다고 여기는 걸까. 다 묻어버리자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도 있지. 그럴 수 없는 이도 있지. 묻으려는 사람과 파헤치려는 사람이 섞여 살아.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모르겠다는 말로 모른 척하고 싶은 사람일까. 모른 척하다가 정말 모르게 되는 사람일까. 약하다는 이유로 돼지처럼 학살되었던 사람들이 떠올라. 돼지에 관한 생각이 왜 하필 그 생각으로 이어질까?

 

기슭아, 이런 생각들이 불편해. 불편한 게 당연한데... 불편한 일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 우리 마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할까. 세상이 이웃처럼 가까워졌는데...

 

 

 

그냥 꽃이나 심을까

_박소유

 

끝은 늘 흐리다

수백여 마리에서 수천여 마리, 아무도

끝까지 세어주지 않았다

 

뒷걸음질 몇 번 쳐보기도 했겠지만

어찌해 볼 도리 없이 따라가던

뒷모습

 

한해살이풀들은 몸이나 가볍지

눈 감으면 사라질 길이

오래 무거웠겠다

그 발자국

 

입만 벙긋하면 튀어나오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 금수 같은 강산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무는 자라고

꽃은 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을 텐데

귀에 들리는 건 우우, 바람 소리뿐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그냥 꽃이나 심을까

 

비 온 뒤

흙탕물 가라앉은 물웅덩이는 왜 이리 맑은가

그 맑은 눈동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냥 속아줄까 생이여

 

*201412월 충북 진천군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20154월 말까지 3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가축 173000여 마리가 살처분됐다.

    

-박소유,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시인동네, 2019),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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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4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저도 살처분이라는 말에 상상되는 장면이 있는데 키운 이들, 살처분을 직접 수행해야 했던 분들은 얼마나 오래 충격이실까요.
대안을 마련못하는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참 무력하고 무능합니다.

이누아 2019-10-14 18:11   좋아요 0 | URL
돼지들은 울 새도 없었을 거예요. 뭐가 뭔지 모르는 채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겠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땅 속에서 울고 있는 걸까요? 그 울음을 악취라고 부르고, 덮으려고 애를 쓰지요. 아주 오랫동안 악취가 나서 그 악취를 없애는 탈취제를 쓴다고 해요. 덮고, 덮은 것을 또 덮고. 살려고 죽여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2019-10-14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