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

 

 

정신력으로 승리했다거나 병을 이겨냈다는 말을 들으면 간혹 들어. 거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거나 실력이 부족하거나 병이 악화되어 있었다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것에 경외감이 들어.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게 정신력이 강할 수는 없고,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어.

 

육체를 초월한 정신이라고 한다면 트럭에 깔린 아이를 구하겠다고 트럭을 드는 엄마의 괴력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트럭을 들지 못하는 엄마가 훨씬 더 많아. 트럭을 못 든다고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닐 텐데 뭐든 제 탓으로 돌리는 엄마는 나에게는 왜 그런 괴력이 생겨나지 않았냐고 자책할지도 몰라.

 

몸이 아픈데 어떻게 정신력으로 아픈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습관 같은 걸까. 돌아가시기 몇 주, 아니 며칠 전인가? 내내 누워 있던 아버지가 양복을 꺼내 입고, 나를 부르셨어. 달성공원에 가자고. 화장실도 혼자 가기 버거운 몸으로 동물원 구경을 가자고 하시는 거야. 일어나시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양복을 벗고 도로 자리에 누우셨어. 아버지는 정신력이 약해서 도로 누우신 게 아니야. 어쩌면 몸이 아파서 정신력이 약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순전히 정신만의 문제는 아니지.

 

아픈 몸에게 정신력을 강하게 하라는 요구는 일흔 노인에게 열 살 아이처럼 뛰어보라는 것과 같은 거야.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몸이 무거운데 난 내가 나태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제대로 먹으면 무거운 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무리를 하니 몸은 더 나빠지고. 남에게는 하지 않을 이런 요구를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 쉽게 해. 왜냐하면 정신은 늙지 않으니까, 아픈 건 몸이지 정신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런 말은 균형을 잃은 것이지. 오히려 정신을 따라 가지 못하는 몸이 더 헉헉거릴 뿐이야.

 

정신력이 약해서 그 모양이라고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몰아치는 일이 없었으면 해. 몸이 마음을 이끌 때도 있고, 마음이 몸을 이끌 때도 있어.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고, 기대기도 하고, 엉키기도 해. 아플 때는 그 둘의 관계가 더 선명해 보여. 이 둘이 조화롭게 살아내고, 살아가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는 걸 매순간 우리가 알아차렸으면 좋겠어.

 

김진영은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에서 죽기 3일 전에 내 마음은 편안하다.”고 적어. 정신과 육체가 서로 강요하거나 싸우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아픈 몸이 아픈 채로 마음은 편안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일이 우리에게도 가능했으면.

 

    

p.s. 오늘 난 아프지 않아. 아팠던 사람이 쓴 책을 읽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나무에게
_오규원


물의 눈인 꽃과
물의 손인 잎사귀와
물의 영혼인 그림자와
나무여
너는 불의 꿈인 꽃과
이 지구의 춤인 바람과
오늘은 어디에서 만나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오느냐

  

-오규원, 오규원 시전집1』(문학과지성사, 2002),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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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17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신력’ 타령하는 사람들을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정신력이라는 말 속에 곧 정신이 몸보다 우월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거든요. 정신의 일부는 우리 몸의 뇌에서 나오는 건데 몸과 정신(력)을 따로 분리해서 볼 수 없어요.

2019-07-17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