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취미

 

 

난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컴퓨터 앞에 앉기도 싫어졌어. 정말 게으른 취미야. 시간이 나면 침대에 가. 시집과 노트, 볼펜, 커피를 들고. 기대앉아 시집을 읽어. 어떤 시집은 벌컥벌컥 마시고, 어떤 시집은 전혀 소화가 되지 않아. 꼼꼼히 읽는 건 아니고 쭉 읽고, 특별히 맛있는 페이지를 만나면 한 번 더 읽어보는 정도야. 그러고 있으면 충만한 느낌이 들어. 쓸모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이랄까, 세상에서 혼자 도망가 놀고 있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신해욱 시인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산문집을 내면 친구들에게 선물하지만 시집은 선물하지 않는대. 한결같이 너무 어렵다고, 못 알아듣겠다고 해서. 나도 못 알아듣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가 많지만 시집 전체에서 몇 편은 이해할 수 있고, 몇 편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좋아할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내가 시집을 낸다고 해도 지인에게 주려면 망설일 것 같기도 해. 산문은 육체 같고, 시는 영혼과 비슷하게 느껴져.

 

대구는 오늘 낮 기온이 20도야. 벚꽃은 모두 다 졌어. 순식간에 여름이 성큼 다가와. 오늘은 아이들 옷장 정리를 해야 할까 봐. 옷도 좀 사고. 겨우 계절에 맞추고 시간에 맞추며 지내면서 시집을 읽는 건 약간 호사스런 느낌이 있어. 시는 가장 가난한 예술품이고, 시인은 가장 가난한 직업인데 어째서 시를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까?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로 도망가고 싶은 한낮, 약속이 있어.  날씨가 좋다.

 

 

 

 

도망

_장정일

 

도망가서 살고 싶다

정일이는 정어리가 되고

은희 이모는 은어가 되어

깊은 바닷속에 살고 싶다.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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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4-0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도 대구에 사시는가 보군요. 요즘 날씨가 좋아서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이누아 2019-04-10 09:26   좋아요 0 | URL
벚꽃 필 때 벚나무 근처에서 책을 읽으려고 앉았는데 바람은 차더라고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겠어요. 낯모르는 사람을 보면 내 이야기를 듣는 서재지인이라고 생각하고 친절하게 대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어요.

2019-04-08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0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