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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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2,000년의 분열과 통합으로 읽는 『중앙유럽 왕국사』.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지도 위에서 늘 '사이'로만 정의되어온 중앙유럽. 마틴 래디는 이 땅을 주변이 아닌 세계사의 결정적 무대로 복권합니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황제 카를 5세』 등으로 잘 알려진 중앙유럽 분야 최고 전문가인 그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입니다.


로마 제국의 변경에서 시작된 2천 년의 드라마를 민족, 권력, 사상의 교차로로서 풀어냅니다. 중앙유럽을 지리적 실체가 아닌 개념적 공간으로 다룹니다. 제국과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신앙과 이단, 예술과 학살이 교차한 역사의 축소판. 마틴 래디는 이곳을 유럽의 거울이라 부릅니다.


중앙유럽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침략'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앙유럽은 결코 수동적인 희생자에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훈족에서 헝가리인으로, 합스부르크에서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침입자이자 개척자였으며, 동시에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였습니다.


초기 중앙유럽의 역사는 침입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마의 변경에서 훈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몽골-타타르족까지 수많은 세력이 이 땅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마틴 래디는 이를 파괴의 역사가 아니라 혼혈의 탄생사로 읽습니다. 훈족이 로마 제국을 무너트려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듯이, 훈족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헝가리인들은 중앙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습니다.


중앙유럽은 어느 한 제국의 식민지로 고정되지 않았고, 침입자들이 남긴 유산이 언어, 제도, 문화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런 다층적 정체성은 훗날 중앙유럽의 민주주의 실험과 문화적 다양성의 토대가 됩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권력이 왕으로 집중되던 13세기, 중앙유럽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중앙유럽 정치의 독특한 DNA를 들려줍니다. 귀족들의 총회, 농민들의 자치, 그리고 상인 동맹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권력이었습니다. 의회와 소집회는 공동체의 윤리와 권리를 상징했습니다.


중세 중앙유럽은 공동체 정부와 공화주의적 실험의 본산이었다고 합니다. 서유럽보다 먼저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셈입니다. 상업의 영역에서도 자치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한자 동맹은 200여 개 도시를 연결한 초국가적 네트워크로 오늘날 EU의 원형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등장하며 이 수평적 권력은 다시 위로부터의 통치로 전환됩니다. 중앙집권적 통치의 마리아 테레지아 개혁은 근대 국가의 탄생을 알립니다. 문제는 그 질서가 곧 관료제와 군사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교육받은 국민을 길러낸다는 명분 아래 국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흡수해버렸습니다.


중앙유럽은 단지 정치적 변동의 현장이 아니라 사상의 실험실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루터의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들이 모여 거대한 사상의 전환을 이루는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중앙유럽의 학자들은 민족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정체성의 언어학을 발달시켰습니다. 공동의 언어와 문화가 민족의 기본 요소라는 신념은 오늘날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자긍심의 원천이자 배제의 도구로 말입니다.


판화와 인쇄기의 발명 역시 이 지역의 혁신이었습니다. 중앙유럽 예술의 양식과 장르가 국제적으로 보급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논문이 활판으로 복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듯, 사상은 기술과 손을 잡으며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근대 중앙유럽의 중심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48년 혁명은 통제 체제에 균열을 냅니다.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는 다시 억압의 기제가 되었습니다. 헝가리의 마자르 민족이 주도한 혁명은 다른 민족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한 국민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며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시기 중앙유럽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그림 형제의 민담, 카프카의 문장은 모두 그 긴장 위에서 태어났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동일성 사이의 줄다리기. 결국 이 갈등은 20세기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앙유럽은 절단된 유럽입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등장한 신생국들은 여러 민족이 뒤섞인 불안정한 조합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경을 그었지만 경계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이 지역을 인종학살의 무대로 바꾸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중앙유럽인들만큼 평범했던 공무원, 노동자, 과학자들은 '악의 평범성'을 상기시킵니다. 철도 시간표를 맞추고, 화학 실험을 하던 일상 속에서 학살의 기술이 완성되었습니다.





마틴 래디는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 갱신의 힘을 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중앙유럽 국가들은 부패와 언론 통제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합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라이바흐가 상징하듯 이 땅의 지성은 언제나 체제의 모순을 비웃으며 살아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은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앙유럽 왕국사』는 현재의 중앙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입니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지도 덕분에 중앙유럽의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적 경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해줍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권력과 공동체,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탐구하는 정치철학서이자, 유럽 문명사의 미시적 복제판입니다. 한반도 또한 대륙과 해양 사이, 사이의 지정학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묘한 데자뷔를 남깁니다.


마틴 래디는 역사를 승자의 서사가 아니라, 공존을 향한 실패와 재시도의 기록으로 읽어냅니다. 중앙유럽의 흙먼지 속에는 결국 인간의 집념, 사유, 그리고 반복된 재건의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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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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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견디는 힘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 (원제 Committed: On Meaning and Madwomen)』. 회고록, 정신의학 비판서, 문학비평 세 가지 장르가 콜라주처럼 겹쳐지면서 예상 불가능한 깊이를 담은 책입니다.


수잰 스캔런 저자는 자살 시도 이후 3년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경험을 되짚으며, 의료 체계가 만들어내는 정상과 비정상의 폭력적 경계를 해체합니다.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선배 여성 작가들의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상실과 광기를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갑니다.


"나는 책이란 의사소통에 관한 것임을 몰랐다. 한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다." p184


저자에게 있어 문학은 병을 고치는 도구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장소였습니다. 문학은 그녀에게 치료가 아니라 관계였고, 관계는 곧 의미의 시작이었습니다.





1부에서는 정신병동 입원 이전의 자신을 추적합니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적 엄격함 속에서 성장 후, 뉴욕으로의 이주 그리고 스무 살에 맞닥뜨린 심연까지.


저자는 "전자레인지에 구운 감자 외의 다른 음식들은 절대 삼킬 수 없고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여러 날, 여러 주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된 자신을 기술하면서 정신적 붕괴 직전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절망을 표현합니다. 먹을 수 없는 상태, 말할 수 없는 침묵,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들.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라는 진단명에 앞서 절망의 체성(體性)을 마주하게 하는 문장들이 펼쳐집니다.


1부를 관통하는 핵심은 형성의 과정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부서뜨릴 정도의 고통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되, 그것이 외부 사건이나 명확한 트라우마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무형의 슬픔, 언어화되지 않은 상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중첩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병원에 있던 시기는 '되찾은 기억'에 대한 믿음이 정점에 달한 때였다. 1990년대 초에는 점점 더 많은 환자가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당했던 기억을 되찾았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이런 기억을 찾아내도록 부추겼다."라며 정신의학이 어떻게 환자들을 기억 '만들기'에 동참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정신의료 현장의 윤리적 복잡성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의미들』의 매력은 '미친 여자들'이라 불렸던 여성 작가들의 글을 하나의 문학적 혈통으로 재구성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자기파괴, 샬럿 퍼킨스 길먼의 저항, 오드리 로드의 분노,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슬픔... 모두 자기 서사를 되찾기 위한 자매들의 기록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들로부터 광기의 서사를 빌려와 그 안에 잠든 목소리를 되살립니다. '미친 여자'는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하고 언어로 기록한 선구자들입니다. 저자에게 광기는 치료되어야 할 병이 아니라,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진실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2부에서는 저자가 실제로 입원했던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의 5층 병동에서의 3년을 기술합니다. 정신의료 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직면합니다. 병원은 분명히 치료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환자들이 정신과 환자 되기에 점점 더 능숙해지도록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다는 겁니다. 약물 처방, 상담 시간, 진단명의 반복적 확인. 이 모든 절차들이 환자의 정체성을 오히려 환자성(patienthood)으로 견고히 하는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의사의 진단 틀이 환자의 실제 경험을 포착하지 못할 때, 그것은 단순한 오진이 아니라 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겪었던 외로움과 슬픔은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화학적 불균형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였던 겁니다.


병동에 함께 있던 다른 환자들의 초상화도 펼쳐집니다. 정신병동이 동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고통과 저항이 충돌하는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정신의학이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반화의 폭력성에 대한 암묵적 항의로 저자가 선택한 글쓰기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을 빌려 '사별의 슬픔'을 정신질환으로 환원하는 사회적 폭력을 비판합니다. "크리스테바에게 사별의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위대한 미술과 위대한 문학의 주제였다."라고 합니다. 슬픔의 지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이죠.


정신의학적 진단은 슬픔을 병명으로 가두지만, 문학은 그 슬픔을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인간은 슬픔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슬픔을 언어화함으로써 살아간다는 것, 저자의 글은 바로 그 생의 기술을 증명합니다. 그에게 문학은 감정의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거주입니다.


'읽기'라는 행위를 심리적 회복의 중심에 두는 『의미들』. "읽기의 경험이 나를 다시 삶으로 데려왔다'라고 고백합니다. 읽기는 수동적 감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이 책은 한 여성이 자신을 병이 아닌 이야기하는 존재로 되돌려놓는 기록입니다. 저자에게 회복이란, 일상의 조각을 조금씩 되살리는 일,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문학은 삶을 견디게 하는 보루이며, 세계를 다시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줍니다.


진단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지 않지만 동시에 진단이 유일한 해석 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문학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내적 경험을 언어화하고 사회화하는 방식을 제공하는지, 그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진단명이 아니라 의미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텍스트라고 말하는 『의미들』.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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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니체 필사책
아르투어 쇼펜하우어.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용수 편역 / 유노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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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로 6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강용수 교수가 이번에는 쓰는 철학을 선보입니다. 『쇼펜하우어×니체 필사책』은 사유를 실천으로 옮기는 100번의 기록을 할 수 있게 돕습니다.


독일어 원전에서 발췌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명문장 100개를 손끝으로 옮기며, 철학을 읽는 사유에서 쓰는 실천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과 니체의 인생론, 여기에 강용수 교수의 철학 에세이 10편이 더해져 두 사상가의 문장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시키는 사유의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으로 직시하되 그 고통을 줄이는 방법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스승이라 불렀지만, 스승을 넘어서고자 했던 그는 고통을 피하거나 줄이는 대신 아예 껴안으라고 말합니다. 이 필사책은 두 철학자의 대화를 손끝으로 이어 쓰는 기록과도 같습니다. 고독 속의 쇼펜하우어와 긍정의 니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필사는 단순한 베껴 쓰기가 아니라 철학자의 사유를 직접 체험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철학은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품게 되는 것, 그것이 철학의 힘이자 필사의 미학입니다.





1부의 주인공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실존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뿌리를 제공한 인물입니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불리지만, 사실 그의 철학은 삶의 고통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지혜를 길어 올리는 사유의 기술에 더 가깝습니다.


행복은 기대와 현실의 균형에서 온다며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말고, 불행을 줄이는 기술을 익히라고 조언합니다. 행복을 쾌감으로만 판단하는 태도는 결국 더 큰 결핍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인간의 인생을 고통과 무료함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현실적입니다. "적당한 거리에서는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고슴도치 우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추운 겨울 서로 체온을 나누려던 고슴도치들이 너무 가까이 가면 가시에 찔리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추위에 떨게 되듯, 인간관계에도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는 또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나 자신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불안을 키우는 대신,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일이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임을 짚어줍니다.


강용수 교수는 이런 문장들을 필사로 옮길 때의 힘을 강조합니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가며, 손끝의 속도가 느려질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문장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2부에 등장하는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저서에 깊이 매료되어 철학의 길로 들어섰지만, 곧 스승의 사상을 넘어서려 했던 반항의 철학자입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는 명제는 모든 가치체계의 붕괴와 재창조를 요구하는 시대의 외침이었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운명애(Amor fati)라 불리는 삶의 긍정 철학으로 완성됩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는 인생의 모든 고통과 결핍을 포함해 그것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고 봤습니다.


『쇼펜하우어×니체 필사책』은 철학을 손으로 배우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집중의 기술을 필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필사는 복제 행위가 아닙니다. 철학자의 문장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문체와 사고의 리듬을 흡수하게 됩니다. 이 책은 180도로 완전히 펼쳐지는 제본으로 만들어져 편안하게 쓸 수 있습니다.


강용수 교수의 철학 에세이 10편을 통해 필사의 사유를 확장합니다. 철학은 삶의 목적과 과정을 의식하는 노력, 인생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 같은 주제는 필사 후의 성찰로 이어집니다.


흥미롭게도 두 철학자 모두 글쓰기와 독서에 관한 명언을 많이 내놓았더라고요.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생각만 받아들이면 스스로 생각할 힘을 잃어버린다"라며 무지성의 독서를 경계했습니다. 어떻게 쓰는가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드러낸다는 의미의 "문체는 곧 생각이다"라는 명제도 와닿습니다.


니체는 "글을 쓰는 열 가지 원칙", "말하듯이 써라" 등을 통해 피상적인 글쓰기를 거부하며 다양한 글쓰기 기술을 들려줍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축제를 벌여라", "읽은 책은 시간이 흘러야 가치를 알 수 있다" 처럼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독서 명언도 가득합니다.


100문장을 손으로 따라 쓰다 보면, 어느새 그 문장들이 나의 언어가 되고 나의 사유가 됩니다. 책장을 넘기는 독서와 달리, 필사는 몸으로 체득하는 철학입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내 생각이 어디쯤 있는가를 자문하게 됩니다. "인생의 40년은 본문이고 이후 30년은 주석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통찰과 "춤추는 별 하나를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품어야 한다"라는 니체의 역설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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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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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 세 번째 책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불안의 시대, 해즐릿이 던지는 직격탄을 만나보세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를 관통하는 것은 윌리엄 해즐릿의 정면돌파적 시선입니다.


시대의 권위에 맞섰던 급진적 지식인이었던 해즐릿은 일상의 사소한 감정부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까지 예리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세 권은 그가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떤 담론의 무기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유의 무기고입니다.


우리는 지금 해즐릿이 살았던 시대와 놀라울 만큼 유사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부활, 혐오의 확산, 경제적 양극화, 지적 나태함,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척의 범람. 해즐릿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해즐릿의 글은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사고를 외주화하며, 불편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우리 자신을 보여 주는 거울 말이죠. 해즐릿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생각하는가? 당신의 신념은 진짜 당신의 것인가? 당신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저 존재하는가?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위로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해즐릿은 그 역할을 합니다. 19세기 영국의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윌리엄 해즐릿. 그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고, 1830년 런던 소호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문장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팍을 후벼 팝니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아티초크 출판사가 국내에 소개하는 세 번째 해즐릿 에세이집입니다. 이번 선집에는 저항의 문장가라는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보여 주는 여덟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에세이부터 해즐릿은 칼을 빼 듭니다. "그에게 지금 유행하는 생각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건, 마치 옷의 앞뒤를 돌려 입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늘 입에 올리는 '최고의 사람들'이란 실은 자기 소유지에 살면서 타인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뜻한다."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해즐릿이 공격하는 '진부한 비평가'는 문학 평론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초상화입니다. 유행하는 담론에 편승해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떠드는 현대인 말이죠. 해즐릿은 이런 지적 나태함을 짚어냅니다.


"그가 말하는 '세상의 의견'이란 것도 사실은 자신이 드나드는 작은 모임 안에서 오가고 들리는 말들일 뿐이다."라며 에코 챔버 현상을 19세기에 이미 예견한 듯한 이 문장은 우리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서 전부를 본다고 착각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해즐릿은 진부함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위험이라고 봤습니다. 독립적 사고의 부재는 권위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니까요.


두 번째 에세이에서 해즐릿은 우리 사회가 찬양하는 '온화함'을 비판합니다. "온화함, 또는 흔히 그렇게 여겨지는 성품은 모든 덕목 가운데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열에 아홉은 그저 게으른 기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수많은 '착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분쟁을 싫어해"라며 중립을 가장한 방관자들 말입니다. 해즐릿은 이런 온화함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인도주의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해즐릿에게 온화함은 위선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세 번째 에세이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파고듭니다. "첫인상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인상을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에 속아 잊어버렸다가, 결국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라고 말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묘한 불편함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편견을 가지면 안 돼"라며 넘어갔던 순간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첫인상이 정확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해즐릿은 우리에게 직관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며, 그의 삶 전체가 표정에 새겨져 있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직접 찍어낸 흔적이며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네 번째 에세이에서 해즐릿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급진적 유니테리언 목사의 아들로 자란 그는 종교의 본질과 그것을 악용하는 인간의 위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이 에세이는 신앙 자체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앙을 가장한 자기기만, 경건함의 탈을 쓴 권력욕, 구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해부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고, 신앙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며, 구원을 미끼로 권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여전합니다. 해즐릿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진정한 믿음인가, 아니면 사회적 안전망인가? 당신은 신을 따르는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가?


다섯 번째 에세이는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이 드러내는 인간관계의 민낯을 이야기합니다. "가난은 굴욕만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민낯까지 드러낸다. 가난 그 자체보다 상처가 되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받는 대우다."라고 말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는 친구였던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연락을 끊고, 성공했을 때는 관대하게 봐주던 실수들이 실패하면 치명적 결함이 되는 현실. 해즐릿은 가난이 물질적 결핍 이상의 것, 즉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섯 번째 에세이는 인도인 곡예사의 묘기를 관찰하며 예술과 기술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해즐릿은 자신의 직업적 고민을 드러냅니다. 곡예사는 실수하면 피를 흘리지만, 작가는 형편없는 글을 써도 당장은 아프지 않습니다. 그 모호함이야말로 글쓰기의 위험이자 유혹입니다. 곡예사의 기술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작가의 기술은 평가와 역사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콘텐츠 범람의 시대.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해즐릿은 예술가의 책임을 말합니다. 피 흘릴 각오가 없다면, 칼을 들지 말라고.





표제작인 일곱 번째 에세이는 청춘을 찬미하면서 동시에 그 허상을 폭로하는 글입니다. 젊음의 가장 큰 자산은 무한한 시간이 있다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 간극이 청춘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위험하게 만듭니다.


청춘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지만, 동시에 그 착각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역설. 만약 우리가 진짜로 유한함을 체감한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춘의 오만함은 필요악입니다. 문제는 그 환상이 깨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에세이는 병상에 누워 바라본 세계를 묘사하며, 고통과 고독이 가져다주는 통찰을 이야기합니다. 몸이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 본질적인지 알게 됩니다. 건강할 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지, 반대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해즐릿의 문장은 때로는 시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철학처럼 날카롭습니다.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을 자극하고,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보편적 진리에 도달합니다. 해즐릿의 문학 비평론은 월터 페이터와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었고, 20세기의 조지 오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에서도 해즐릿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덟 편의 에세이를 관통하는 핵심은 위선에 대한 거부입니다. 해즐릿은 이면에 숨은 거짓을 폭로합니다. 각성의 시작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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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머리보다 중요한 눈치 사용 설명서 - 마음의 벽을 넘어, 배려로 완성하는 직장생활
가와하라 레이코 지음, 송해영 옮김 / 한가한오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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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보고서를 잘 쓰고, 일정 관리를 완벽하게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는 눈치 빠른 사람에게 돌아가곤 합니다. 당신에게 부족한 건 '배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술이 곧 일머리이기도 합니다. 『일머리보다 중요한 눈치 사용 설명서』에서 직장 스트레스 솔루션을 만나보세요.


저자 가와하라 레이코는 일본 전역 기업에 고객 만족 솔루션을 제공해온 전문가입니다. 눈치와 배려의 개념을 수십 년간 연구한 저자는 직장에서 살아남는 힘은 일을 잘하는 능력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술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눈치란 그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벽과 상대의 벽을 동시에 인식하는 감각적 지혜입니다. 팀워크를 원하지만 무례한 친절에는 피로를 느끼는 시대. 그 균형점을 배려로 제시합니다.


우리가 배려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괜한 참견일까라는 망설임 때문입니다. 저자는 그 벽을 허무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을 제시합니다.


감사 인사를 받지 못하거나 오지랖 넓은 사람처럼 보여도 괜찮다고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배려의 본질이 호의의 효율이 아니라 관계의 순환임을 강조합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동료에게 건네는 아침 인사는 조직 내 소통의 문을 여는 첫 단추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죄송합니다를 감사합니다로 바꾸는 언어 습관도 같은 맥락에서 다뤄집니다. 저자는 작은 말 한마디가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는지, 그 반복이 결국 신뢰를 쌓는 첫걸음임을 짚어줍니다.


자신의 벽에 이어 상대의 벽을 다루는 법을 알려줍니다. 여기서는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존중의 기술이 등장합니다. 거친 표현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기,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의자 권하기,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하기 같은 방법들이 펼쳐집니다.


당연해 보이지만 바로 그 당연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드문 것이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를 조직 내 인간적 신뢰의 결핍으로 규정하며, 배려는 결국 기본의 복원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직장에서 배려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습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배려를 습관으로 만드는 다섯 가지 기술을 소개합니다. 한정, 예고, 공유, 영역, 기억. 이 다섯 키워드는 직장 내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을 통찰하면서 동시에 소통의 효율을 높이는 구체적 행동 지침으로 작동합니다.


첫 번째, 결정 피로를 줄이는 한정 기술은 상대가 선택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돕는 방법입니다. 메신저에 빠르고 간결하게 답장하기 같은 세세한 예시를 통해 상대의 시간을 아껴주는 방법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배려의 힘으로 불안을 줄이는 예고 기술이 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갑작스러운 회의 호출이 얼마나 불안한지 잘 압니다. 이를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예고의 힘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말을 시킬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기, 전화 걸기 전 메시지로 먼저 물어보기 등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행동들이 상대의 심리적 안전감을 높입니다. 이런 세심함이 결국 팀 전체의 퍼포먼스를 끌어올립니다.


배려의 세 번째 축은 공유입니다. 저자는 조언할 때는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며, 짧고 명료한 피드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도움을 준다는 명분 아래 상대의 시간을 빼앗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그 대신 조언이 길어질 때는 멈출 줄 아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공유란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네 번째, 영역의 기술에서는 직장인들이 어려워하는 피드백의 예의를 구체적으로 다뤄줍니다. 상대의 사정을 먼저 듣고, 지적하기 전에 공감부터 표현하는 태도는 관계의 윤활유가 됩니다. 문제 제기 메일은 난처함을 먼저 전하고 제안으로 마무리하라는 팁도 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기억을 배려의 완성이라 부릅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를 기억하기, 의기소침한 동료에게 먼저 다가가기, 칭찬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기 같은 행동입니다.


말투, 작은 행동 하나가 공기의 밀도를 바꿉니다. 저자는 그 미묘한 흐름을 포착하는 능력인 눈치력을 키우는 법을 알려줍니다. 눈치는 노력으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며 관계의 방향을 바꾸는 유연한 힘입니다.


『일머리보다 중요한 눈치 사용 설명서』는 꾸준한 배려는 신뢰를 쌓고, 그 신뢰는 눈에 보이는 성과와 결과, 더 나은 기회와 운으로 이어진다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눈치의 본질은 꾸준함입니다. 배려는 즉시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가장 확실한 커리어 자산이 됩니다. 직장 내 생존 전략을 넘어, 인생 전체의 커뮤니케이션 철학으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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