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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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내면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폭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입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회의실 책상 앞에서,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도 우리를 따라다니는 이 감정. 임상심리학자 키렌 슈나크 박사의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 고민에 대한 과학적이면서도 따뜻한 해답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당신의 불안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안심시킵니다. 불안을 정신력 부족으로 여기는 태도를 벗겨내며, 불안은 인간의 신경학적, 생리학적, 그리고 진화적 필연임을 설명합니다.


불안은 결함이 아니라 신호이며, 우리의 생존을 돕는 내면의 경보음이라는 것. 그러나 현대사회는 이 경보가 과도하게 울려대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정보 과잉, 경쟁, 사회적 비교와 같은 요인들이 불안의 증폭 장치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저자는 불안을 없애야 할 적으로 여기지 말고, 그 구조를 관찰하라고 조언합니다. 불안을 해체(데몽타주)한다는 개념입니다. 영화의 몽타주처럼 우리 마음은 단편적인 기억, 부정적 감정, 미래의 상상 조각을 모아 불안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아닌, 왜곡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불안을 다루는 첫걸음은 이 거대한 심리적 콜라주를 하나씩 떼어내는 일입니다. 즉, 내가 느끼는 불안이 실제 위험인가, 아니면 상상의 확대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수용 전념 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의 핵심 원리이자 현대 정신치료의 가장 과학적인 접근입니다.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불쾌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머릿속에 떠오를 가능성이 커지는 것처럼 억압은 오히려 감정을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먼저 불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불안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우리 뇌의 두려움 회로, 감각과 경험의 상호작용 그리고 불안을 촉발하는 트리거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힙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불안의 요람에 관한 논의입니다. 기질과 성격, 부정적인 아동기 경험, 외상 등이 어떻게 불안의 토양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또한 우리가 왜 자발적 수감자가 되는지를 분석합니다. 왜곡된 사고방식, 편향된 주의 집중, 과민한 신체 감각, 낮은 스트레스 내성 등이 우리를 불안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요인들입니다. 특히 회피 행동은 불안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핵심입니다. 두려운 상황을 피할수록 그 상황은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슈나크 박사는 불안을 심리적 현상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신경생리학적으로 불안을 설명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몸의 움직임에서 찾습니다. 신경계를 스트레스 호르몬을 담는 잔이라 생각하라며, 그 잔이 넘치기 전에 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안이 차오르는 순간, 단순히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긴장을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호흡, 근육 이완, 산책, 가벼운 운동 등은 뻔한 조언이 아니라, 뇌의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분비를 직접 조절하는 신경계 진정 기술이었습니다.


불안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자동으로 상상한다는 점입니다. 불안한 뇌는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며, 불확실성을 통제하려 애씁니다.


저자는 이런 사고 패턴을 인지 왜곡이라 부르며, 불안을 만드는 대표적 요인으로 지목합니다. 만약 실패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은 현실의 사실이 아니라 의견 A에 불과합니다. 이때 저자는 의견 B를 제시하라고 조언합니다. 즉, 하지만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와 같은 대안적 사고로 균형을 맞추는 연습입니다.


저자는 생각을 교정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불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건넵니다. 생각은 현실이 아니며, 당신의 감정은 증거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 이 깨달음이 바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출발점입니다.


불안을 물리치려 하면 할수록 파도는 거세집니다. 파도를 막을 수는 없지만, 서핑하듯 올라탈 수는 있습니다. 저자는 감정을 수용하고 관찰하며 흘려보내는 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감정에 이름 붙이기, 자기 연민 실천, 생산적 주의 분산 같은 실제 임상 현장에서 검증된 기술들을 나열합니다. 생산적 주의 분산은 회피가 아니라 의미 있는 활동으로 주의를 옮기는 전략입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지만, 삶은 언제나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러시안 룰렛이 아닙니다. 불확실성은 위험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저자는 불안을 없애는 대신, 불확실성을 견디는 근육을 기르라고 말합니다.


완벽한 통제 대신 일상의 흐름에 맡기는 용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오히려 안정감을 얻습니다. 회복탄력성의 핵심 원리이기도 합니다.





후반부에서는 불안장애의 구체적 형태를 다룹니다. 질병불안, 사회불안, 공황장애, 죽음불안 등 슈나크 박사가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회피는 일시적인 평화를 주지만, 결국 불안을 지속시키는 연료가 됩니다. 반복 노출 기법과 안전 추구 행동의 해체를 통해 그림자와의 줄다리기를 끝내는 과정을 안내합니다.


『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에서는 불안을 극복한 이후의 사후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퇴보의 순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작은 성공을 기록하라, 우리의 마음은 정원과 같아서 꾸준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등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불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찰의 여정을 담은 책입니다. 불안을 알면,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위를 걷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불안을 치료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싶은 심리학 입문자, 감정 조절과 마음챙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 위로보다 실질적인 해결법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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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할까 로버트 볼튼 인간관계 수업 2
로버트 볼튼 지음, 박미연 옮김 / 트로이목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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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40년간 사랑받은 커뮤니케이션 고전, 말하기와 갈등 해결의 실전 매뉴얼. 로버트 볼튼 인간관계 수업 2편 『그 사람은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할까』. 1986년 개정판 출간 이후 40년간 아마존 커뮤니케이션 분야 1위를 지켜온 이 책은, 전 세계 1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검증된 커뮤니케이션 바이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로버트 볼튼 박사는 인간관계 트레이닝 전문기업 릿지트레이닝(Ridge Training) 창립자이자 전 세계 수만 명에게 듣기·말하기·갈등 해결의 기술을 교육한 대화 전문가입니다. 그의 연구는 실제 직장과 가정,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만 건의 대화 사례를 토대로 한 언어 실험의 결정체입니다.


"효과적인 자기주장의 특징은, 지배하지 않되 확고하다는 것이다." - p49


로버트 볼튼이 말하는 확고함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의 언어적 표현입니다. 말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나와 상대가 모두 존엄하게 설 수 있는 다리라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배우며 살아왔는지를 파헤칩니다. 그는 인간관계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복종형, 공격형, 그리고 자기주장형.


복종형은 예스맨입니다. 타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입니다. 반면 공격형은 반대편 극단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이긴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볼튼은 이 둘을 모두 비효율적 대화자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에는 존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연인이 서운한 행동을 해도 "괜찮아"라며 웃어넘기는 사람. 로버트 볼튼은 그들이 관계의 균형추를 스스로 잃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 사람은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할까』에서 알려주는 해법은 단호하지만 예의 있는 자기주장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되, 나의 감정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핵심 도구는 자기주장 메시지입니다. 단순히 "싫다"나 "그건 잘못됐다"가 아니라, 감정. 사실, 영향을 함께 담아내는 구조적 언어입니다.


"당신이 [문제 행동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때,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하게] 돼요. 왜냐하면 [그 행동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회의 도중 내 말을 자주 끊을 때(사실), 나는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요(감정). 그래서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게 점점 어려워요(영향)."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메시지는 비난이 아닌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의 행동을 방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듭니다. 로버트 볼튼은 자기주장은 방패를 들고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방패를 내려놓고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기술이라고 강조합니다.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분노를 내면화하고 자기존중감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주장은 존엄을 지키는 언어이며, 타인과 나 모두를 위해 쓰는 도구입니다.


자기주장을 배워도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상대가 논리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밀어붙일 때 우리는 방어적으로 변하고, 결국 싸움으로 번지곤 합니다. 이런 악순환을 밀어붙이기-밀어내기 현상이라 부릅니다.





그는 해결책으로 반사적 듣기(reflective listening)를 제시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편 『그 사람은 왜 자꾸 내 말을 끊을까』에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던지는 언어의 공격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추어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려는 태도. 이는 즉답보다 맥락을 읽는 지혜입니다.


저자는 수많은 기업 교육 사례를 통해 반사적 듣기를 실천한 사람들의 성과를 입증합니다. 상사의 질책에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라로 끝내지 않고, "그 일이 중요하셨군요. 제가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 직원이 결국 더 신뢰를 얻더라는 겁니다.


로버트 볼튼은 갈등을 관계의 필수 영양소로 봅니다.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통제되지 않은 갈등입니다. 그는 갈등의 첫 단계로 감정의 해소를 강조합니다. 사람이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몸은 언쟁을 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아주 취약한 상태가 된다고 말입니다.


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논리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미 불길이 치솟는 곳에 기름을 붓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갈등 해소법을 단계적으로 소개합니다. 감정을 먼저 다룬 후, 문제의 본질로 넘어가는 절차입니다.


감정 노동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된 지금, 로버트 볼튼의 조언은 현실적입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되, 타인을 상처 주지 않는 언어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 더불어 인간관계의 기술이 단순히 스킬이 아닌 태도여야 한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로버트 볼튼이 말하는 대화란, 단순히 말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존중과 타인존중의 균형을 찾는 훈련입니다. 자기주장과 갈등 관리의 핵심은 존엄을 유지하는 언어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오해 속에서 쌓아온 말의 장벽을 허무는 책입니다. 당신은 지금, 상대를 설득하려고 말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해받고 싶어서 말하고 있나요? 결국 좋은 대화는 관계를 망치지 않고도 나를 표현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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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왕 정세권 - 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김경민 지음 / 와이즈맵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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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북촌 한옥마을을 걸으며 우리는 무엇을 보나요? 인스타그램에 올릴 예쁜 사진?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핫플? 하지만 그 골목골목에는 일제의 칼날 아래서도 조선인의 터전을 지켜낸 한 사람의 처절한 신념이 새겨져 있습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김경민 교수가 쓴 『건축왕 정세권』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소비해온 한옥마을의 진짜 이야기를 복원해냅니다. 부동산 시장 분석과 도시계획을 연구해온 저자는 빅데이터 기반 연구자답게 토지대장과 신문기사, 흩어진 역사 기록을 꼼꼼히 추적해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뜨겁고도 선구적인 뜻을 지닌 인물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단순히 한옥마을을 만든 사람이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건축왕 정세권』을 통해 잊혔던 한 시대의 진정한 건축가이자 민족의 실천가를 알게 되어 마음 깊이 뜻깊은 만남을 한 듯합니다.


1920~30년대 경성은 전쟁터였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 바로 토지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남촌을 차지한 뒤 북촌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살 집을 구하지 못해 자신들의 터전에서조차 쫓겨날 처지였습니다.


"경성이 어찌 조선사람의 경성인가"라는 당대의 한탄은 그저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제는 주택문제 해결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인 주거지를 확장하는 전략을 펼쳤고, 이는 곧 조선인의 공간적 축출을 의미했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정세권입니다. 그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북촌의 넓은 대지를 매입해 조선인을 위한 한옥단지를 개발했습니다.





기어코 이 지역만큼은 일본인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공간적 저항입니다. 만약 정세권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북촌은 일본 적산가옥으로 가득 찬 거리였을 겁니다.


북촌과 익선동에서 다세대 한옥을 공급한 사업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도시주택 개발 방식이었습니다. 참신한 점은 단독 대지에 대형 한옥이 아니라 좁은 대지에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 가능한 소형 한옥이라는 설계 변화였습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 다세대주택, 연립주택의 원형처럼 보일 수 있고, 주거 수요가 폭발하던 도시화 초기 경성에서 주거불안을 완화하는 혁신이었습니다. 정세권은 단순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시계획적 안목을 가진 디벨로퍼였고, 당시 조선 내부에서 보기 드문 유형이었습니다. 


한 예로, 북촌 가회동 31번지-익선동 166번지 개발에서 보듯 그는 여러 필지를 확보해 소형 한옥을 설계했고, 이를 분양하거나 임대하는 형태로 주택을 보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설계·시공·금융까지 복합적으로 기능하며, 주택 공급 기업으로서의 측면을 띠었습니다.


『건축왕 정세권』에서는 정세권의 등장배경과 그가 왜 최초의 디벨로퍼로 불리는지, 그리고 도시·주거·민족이라는 삼각축이 어떻게 그의 사업을 가능케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관광지로만 인식하는 북촌, 익선동이 사실은 절박한 필요에 의한 공간혁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왕십리 일대에서 일본인 주거단지 계획과 맞서 토지매입 경쟁을 벌인 일은 단지 땅값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조선인의 공간적 자율성과 주거권을 지키려는 전략이었습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고, 부동산과 주택사업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정세권은 불황 속에서도 오히려 주택개량과 서민주택 공급을 확대했습니다. 사회적 책임과 민족적 소명이 결합된 판단으로 말입니다.


정세권을 기억해야 한다는 저자의 뜻은 인물 복원 그 이상입니다. 정세권은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이며 또한 민족운동가였습니다. 사업이 위축되는 와중에도 조선물산장려회에 어마어마한 거금을 투여하고 있었던 겁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민족의 산업자립과 주체성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정세권은 물산장려회관을 건축했고 별도 회사 장산사까지 운영하며 잡지를 발간하고 생필품 공급망을 갖추었습니다.


집이 터전이라면, 말은 정체성입니다. 정세권은 자사의 수익을 민족운동에 투자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어학회 후원이었습니다. 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표준어사정위원회를 후원하며 한글과 조선어연구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그는 고문을 당했고, 일제는 그의 막대한 자산을 몰수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건양사는 결국 쇠락했고, 역사 속에서 잊혔습니다. 하지만 그가 조성한 북촌과 익선동 한옥마을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북촌과 익선동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이지만, 그것이 단지 트렌드나 미관 때문만은 아니라 민족의 살 집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의 꿈의 산물임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도시재생, 젠트리피케이션, 주거불안 등으로 도시 공간을 둘러싼 갈등을 목도합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공공성과 수익성은 조화될 수 있는가?, 주거공간이 단순히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이라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정세권의 삶에서 건져올리게 됩니다.


정세권의 한옥은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지워졌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근대 건축의 선구자로 기억되지도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북촌 골목을 걸을 때 혹은 익선동 카페골목을 찾는 순간, 그 공간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를 떠올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숨 쉬었던 사람들의 얼굴, 그 공간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신념을 상상하게 됩니다.


골목산책을 넘어 도시의 역사와 마주하는 시간. 『건축왕 정세권』은 역사가 지워버린 영웅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되돌려놓은 값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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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전쟁 -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KBS 다큐인사이트 〈인재전쟁〉 제작팀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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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KBS 다큐인사이트 〈인재전쟁〉은 방영 직후 200만 조회 수를 돌파하며 방송 이후에도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의 성공을 넘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인재전쟁: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책은 2025 최고의 문제작 <인재전쟁> 다큐의 확장판입니다. KBS 다큐 <인재전쟁> 방송 미공개 취재 내용 및 전문가 인터뷰가 수록되었습니다.


이 책의 중심에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불안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방향을 잃은 채 안정만을 좇게 된 현실. 『인재전쟁』은 그 불안을 해부하고, 국가가 지켜야 할 진짜 인재가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중국의 인재 전략은 교육을 넘어 국가의 생존 전략입니다. 딥시크 쇼크로 알려진 인공지능 기업의 등장은 그 상징이었습니다. 딥시크의 성공은 개인의 천재성을 극대화하는 인재 양성 교육과 창업 시스템이 길러낸 기술 인재 생태계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합니다.


중국은 인재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계합니다. 중앙정부의 5개년 계획은 교육, 산업, 과학기술 전 분야에 직접적으로 투영됩니다. 『인재전쟁』은 딥시크 CEO 량원펑을 배출한 저장대학교부터 항저우의 창업 실험실, 중국의 대입 시험 가오카오 현장까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이미 시험을 잘 보는 아이를 뽑는 방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시험 성적이 뛰어난 학생만이 혁신 역량을 가진 것은 아니며, 창의성이 뛰어난 학생 중에는 성적이 평균 이하인 경우도 있다는 인식이 제도 설계에 반영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평균 이하의 창의성이 제도 속에서 평가받을 길이 없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중국의 과학자들이 영웅으로 대접받는 문화입니다. "평생을 과학자로 살아온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식은 정년 무렵 한국에서 들려온 R&D 예산 삭감 소식이었다."라는 문장은 과학자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국가의 방향성을 가름짓는다는 사실을 이 한 문장이 압축합니다.


중국의 젊은 인재들이 공대에 몰리는 이유는 단순한 성취 욕구가 아니라, 과학자로 사는 삶이 존중받는 사회적 신호 때문입니다. 중국의 공대 열풍은 산업적 계산이 아니라 존엄의 설계에 가깝습니다.


이제 카메라는 한국으로 향합니다. 다큐팀은 한국의 주요 학군지와 이공계 현장을 오가며 의대 쏠림 현상의 정체를 추적했습니다.


"재수생 C군은 공과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공대는 안 된다, 가서 뭐 먹고 살 거냐’는 말이 결정적이었다."라는 한 문장에 한국의 현실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구조적으로 내면화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선택이 의대라는 하나의 안전망으로 집중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 기억상으로도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공대가 바로 그 안전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재전쟁』은 이를 사회적 인식의 진화가 아닌 불안의 변주로 해석합니다. 이 불안은 제도와 문화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두려움의 정서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 결과 산업은 기술 인력을 잃고, 사회는 창의적 모험을 잃습니다. 의대 쏠림은 단지 교육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상상할 용기가 사라진 징후입니다.


『인재전쟁』 이를 두고 불안을 질서로 삼은 사회의 비극이라고 표현합니다. 경쟁은 늘 존재하지만, 방향을 잃은 경쟁은 결국 체념의 반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대 대신 의대를 택하는 학생들, 연구 대신 자격증을 택하는 청년들, 창업 대신 공무원을 택하는 인재들. 이 모든 선택의 배경에는 위험을 최소화하라는 사회적 명령이 깔려 있습니다.


『인재전쟁』은 이 문제를 단순히 교육의 실패로 보지 않습니다. 기술 패권 전쟁터라는 개념으로 논의를 확장합니다. 핵심은 결국 사람. 곧 인재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런 인재를 길러낼 제도적·문화적 토대가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국가의 미래는 기술력보다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국이 공대를 통해 인재의 기반을 키우는 동안, 한국은 불안을 통해 인재의 날개를 접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공계 위기는 결국 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산업 등의 산업 정체로 이어집니다. 한국의 무역특화지수는 하락세를, 중국은 그 반대의 궤적을 그렸습니다. 이제 기술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되었고, 인재는 그 전쟁의 병기입니다.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한국이 점점 후방으로 밀려나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이 창의성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인재전쟁』은 단순히 중국은 이렇고, 한국은 저렇다 식의 비교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더 이상 과학자를 꿈꾸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배경에 깔린 정서 구조를 파헤칩니다. 결국 사회가 불안을 통제하지 못하면, 인재는 체제의 도구로만 존재할 뿐 창의의 주체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재는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물음은 곧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한국의 인재는 지금, 의대 입시 원서 앞에 서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인재는 창업 실험실에서 실패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더 멀리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과학자들이 존중받는 사회, 실패가 허용되는 교육, 불안이 아닌 호기심이 경쟁의 원동력이 되는 환경. 한국이 다시 서야 할 자리입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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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랩 편집부 지음 / (사)마인드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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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인문 철학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IPKU Magazine 4호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 속도의 시대에 선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는 어디서 오는지 16명의 필자들과 함께 풀어냅니다. 무의식적으로 쌓아올린 선택과 관계, 감정의 지층을 한 겹씩 벗겨내며 '진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유의 보고와도 같습니다.


평온과 행복을 위한 삶의 기술로서의 지관止觀. 멈출 지(止)와 볼 관(觀). 불교의 고전적 수행법에서 빌려온 멈추고 바라본다는 개념을 현대인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실마리를 이 책에서 펼쳐보입니다.


여유로운 관찰이라는 기술을 바탕으로 뻗어 나온 16개의 에세이는 속도 강박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마치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1부 생각 멈추기 편에서 필자들이 들려주는 것은 '자동 조종 상태의 깨달음'입니다.





양영순 필자의 「의식, 그리고 알아차림」은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주 진정한 의도 없이 반응하고 있는지를 진단합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순간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통과합니다. 신문을 읽다가도, 누군가와 대화하다가도, 그 모든 순간이 기계적 반응의 연속입니다.


관념의 힘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하현주 필자의「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지를 보여주는 이준용 필자의 「'망상' in 버드맨」, 자연은 멈춤의 철학적 입문서라고 말하는 최은영 필자의 「자연에서 배우는 수행의 평등성」등 사유가 펼쳐집니다.


2부는 명상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직업 현장, 어둠 속, 신체 감각 영역으로 끌어내립니다. 앤드류 올렌츠의 「사무공간에서의 마음챙김」은 일터라는 가장 각박한 공간에서 명상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흩어진 주의력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 이메일을 읽을 때도, 회의를 할 때도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적 명상의 형태입니다.


마음챙김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우동필 필자의 「마음챙김 혁명과 그 이면, 진정한 탐진치 뿌리 뽑기」, 편안함과 안정의 권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 김윤화 필자의 「명상이 삶을 깨우는 '독'이 되려면」, 감각 박탈의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에 접근한 손수빈 필자의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은 명상은 산꼭대기 수도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 책상 앞에서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3부는 명상의 궁극의 현장으로 관계에 대해 보여줍니다. 혼자 눈을 감고 호흡하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것도 명상이라는 겁니다.


현대 관계의 가장 흔한 병폐인 과도한 질문에 대한 회의를 담은 배태랑 필자의 「우리 사이를 굳이 묻지 않아도」, 종교의 외형을 걷어내고 순수한 염원의 맛을 복원한 유희 필자의 「종교 없는 기도」, 영화 '해피엔드'를 통해 환상에 대한 분석을 펼치는 유슬기 필자의 「'해피엔드', '이대로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유」, 종교 공동체의 리듬에서 삶의 거룩함을 발견한 정경일 필자의 「수도원에서 배우는 일상의 성화」까지 존재의 리듬에 대한 다양한 글을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4부는 개인의 선택, 감정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 재점토의 시간입니다. 편상범 필자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합니다」는 일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박수빈 필자의 「삼킨 감정, 소리치는 몸, 이제는 들어야 할 때」는 신체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상민 필자의 「무아와 기억」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無我)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개념의 충돌을 다룹니다.


이세준 필자의 「그림 동화책에 빠진 어른의 자기 변명」은 어른이 아이의 것에 이끌리는 것을 나름 정당화합니다. 성인이 동화에 매몰될 때, 그것은 때로 현실도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내면의 어린 자아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이 양가성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는 가속의 시대에 멈춤을, 생산성의 시대에 사유를, 자아의 강화의 시대에 자아의 해체를 제안합니다.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멈추어 바라보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멈춤이 약함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이며, 관찰이 수동이 아니라 가장 능동적 참여이며,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것이 미래의 포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관 止觀: 멈춰서 바라보기』. 익숙함을 의심하고 마음을 새로이 읽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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