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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 욕망의 바이러스인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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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의 불안한 미래를 상실철학으로 대안 제시하는 책 <호모사피엔스, 욕망의 바이러스인가?>. 시인이자 자기소통상담가 윤정 저자의 해체심리학과 상실철학에 관한 내용은 <4박 5일 감정여행> 책을 통해 접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책을 만났을 땐 기존 책과 주제가 확 달라 보여 무척 낯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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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 욕망의 바이러스인가?> 책 상당 분량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적 담론에 할애했습니다.
중반까지는 우주와 생물의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집중해서 들려줍니다. 리처드 도킨스 책 <이기적 유전자>, 유발 하라리 책 <사피엔스>를 읽은 분이라면 낯설지 않은 주제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결국 저자의 상실철학과 연결되더라고요. 빅히스토리가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한 상실철학과 이어지니, 그 연결고리가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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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생명은 창조주의 인도나 생명의 질서를 지닌 손길에 의해서가 아닌 우연히 일어난 전기적 속성에 반응할 뿐이라며, 성직자였던 저자의 서두치고는 과학적 시선에서 이야기합니다. 각종 물리, 화학 용어가 등장하며 이 책이 자연과학 책인가 싶을 정도로요.
윤정 저자는 우주 탄생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호모사피엔스 출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생명놀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구를 생명의 숙주로 보는 개념도 재미있네요. 유전자는 생명들이 공생의 삶을 선택한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호모사피엔스는 공생 때문에 탄생한 거라는 거죠.
우연과 선택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생명의 질서가 생겼고, 결국 인간을 탄생시킴으로써 박테리아는 공생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생명을 조각하는 예술가라고 칭하고 있어요. 우리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게 아니라 공생으로 협력한 생명체들 때문에 나타난 것뿐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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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질서를 갖춘 모든 생명을 보존해온 영원하고 싶은 생명의 욕망이 머문 기록물입니다. 오랜 세월체를 통과하려면 유전자는 공생과 협력이라는 생명적 의미를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가 미생물과 공존하지 못해 현대적 질병이 생기는 요즘에 이르러서는 이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요.
호모사피엔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의 전망을 선택하는 능력의 중요성은 이미 완독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책 주제였던 만큼 익숙한 내용이긴 한데요. 윤정 저자의 해체심리학에 연결하니 또 새롭게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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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질서를 욕망하는 호모사피엔스. 이대로 문명이 지속되어도 괜찮은지 묻습니다. 여기서 비인격적이고 공생적 의미 없는 바이러스와의 차이를 짚어줍니다. 물질적 욕구는 충족되었지만 이윤 추구의 구조 속에 종속된 바이러스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자연로봇인 호모사피엔스는 기계와 공생하며 공진화해야 한다는 숙제 속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문제를 안게 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지구를 포함해 여러 숙주를 거쳐 이제 문명의 도구인 기계라는 숙주에 속해져 자연스러움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더 우울하고 불안해진 걸로 설명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책에서도 결국 행복론으로 귀결될만큼, 윤정 저자의 상실철학도 이 부분과 관련이 깊습니다. 호모사피엔스가 기생하는 바이러스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바이러스의 기생적인 삶 대신 욕망하는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윤정 저자는 상실철학을 통해 호모사피엔스 속에 누적되어 있는 공생적 가치, 생명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현재 구조 속에서 행복해하지 않는 호모사피엔스에게 상실철학 관점에서 제안하는 대안입니다.
상실철학이란, 상처를 찾아 수용하고 상실시키면서 스스로 자기소통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상실철학을 적용해 생명의 성찰적 의미를 회복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엑손, 인트론 등의 과학 용어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들을 접목해 이번 책은 그야말로 과학과 철학의 만남이 제대로였어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해되는데, 사실 문장 하나하나가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철학적인 부분은 특히 그랬는데요, 읽을 땐 이해되는듯한 착각이 들면서 알듯말듯... 까다롭네요. 중반까지는 일반적인 교양과학 책 수준으로 읽어낼 수 있었지만, 후반부에서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제 능력에서는 좀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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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없는 편지 코너는 호모사피엔스가 우주, 지구에게 보내는 글을 시 형태로 표현했는데 무척 독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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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나오면 질릴 수 있는데 다행히 단조롭지 않은 에세이, 시인다운 감성이 곳곳에 묻어 나오는 다양한 분위기를 만날 수 있는 책입니다. 요즘 푹 빠져서 보고 있는 알쓸신잡 방송에서... 정재승 교수가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지 이야기한 부분도 이 책에 나와 있어서 반갑게 읽었네요.
호모사피엔스는 우주와 자연을 지휘하는 생명체가 아닌, 지구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적 존재라는 말로 서문을 연 윤정 저자. 암울한 호모사피엔스의 운명은 또한 자신의 잘못을 가장 잘 아는 생명이라는 것에 희망을 품어 봅니다. 우주적 생명의 가치를 욕망하면서 살려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보고, 공생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상실철학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