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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갱부>를 마지막으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차분 출간된 네 권의 마지막 책 읽기가 끝났습니다. 소세키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이 쏠쏠하네요. <갱부>는 소세키의 다른 책과 약간 다른 느낌으로 소설이 아닌 회고록을 읽는 듯한 느낌이기도 해요. 현재의 '나'가 과거 시점의 '나'를 기억하며 씁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올 자격 같은 게 전혀 없는 사람, 얼뜨기 같은 천성... 이렇게 자존감이 바닥을 친 열아홉 살의 '나'는 부잣집 도련님 신분에서 가출 청소년 상태가 됩니다. 일단 집을 뛰쳐나와 나름대로 자살의 명소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걷습니다. 그 길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참 변덕스럽다 싶을 정도로 죽고 싶은 마음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 아아, 지겹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걷는 것이지, 이 흐릿한 앞길을 빠져나가기 위해 걷는 게 아니었다. 빠져나가려고 해봐야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뿐만 아니라 걸으면 걸을수록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릿한 세계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 - p19~20
아예 성격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할 만큼 스스로 생각변화에 모순 많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면서도 인력에 이끌려 뭔가 붙잡아준다면 덥석 잡을 생각도 있겠다 하며 속세에 집착하는 마음도 싹틉니다. 그 계기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일 할 생각없느냐는 제안을 받자마자 변하지요. 죽을 생각이었다가, 그것도 안 되면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가.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어(일 제안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 일할 생각이 든거지요. "지금 생각하면 한심할 따름이다."라며 지금의 '나'도 과거의 '나'를 비난합니다.
제안받은 그 일이란 게 바로 갱부입니다. 생각해보니 갱부란 것이 굴 안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하는 일이니 오히려 그의 상태에 딱 맞지 않겠습니까. 일하면서도 사람이 없는 곳에 있으며,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일할 수 있으니 최후의 결심이 뜻대로 진행되면서 얼마간 애초의 목적도 달성하게 되는 셈이라고요. 속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천직이다 싶은 생각마저 합니다. 즉, 자멸의 방법으로서 갱부가 되려고 마음먹지요.
장정일 님이 이 책에 쓴 해설을 보니 당시 청년들의 번민 자살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갱부>는 청년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한 소세키식 답변이라고 평하고 있네요. <갱부>는 한마디로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걸 자꾸 붙잡는 상황의 연속인데요, 과거의 나를 타인으로 보고 회상하며 기록하면서 새로운 기분들이 몰아치며 낯선 경험을 하게 되는 의식의 흐름을 계속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변화하는 자의식을 통해 성장하는 '나'를 보는 셈이죠. 부잣집 도련님의 가출기는 결국 고생하면서 정신 차리는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의식이 희박한 상태로 인간 무덤 같은 갱 내부를 둘러보는 '나'의 마음은 갱내의 어둡고 탁한 공기 때문에 몽롱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의 변화를 계속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갱부가 되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나'는 정작 갱부였던 적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나왔을 때, 순간 너무 허탈해져서 웃음이 터졌네요. 이제는 소세키 책을 볼 때마다 나오는 허탈하고 실없는 반전을 오히려 즐기고 있습니다. <갱부>는 죽더라도 멋지게 죽고 싶은 겉멋 든 아이의 성장기입니다. 매순간 변하는 치열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