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혁명 -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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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생활 속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산업사회의 무분별한 자연훼손의 결과임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자연훼손은 자연보호운동이나 환경보존운동 같은 도덕적 각성으로 치유가능한가? 저자는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오늘날 생태 문제의 핵심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자본주의라는 문명체계라고 본다.

자본주의가 근대세계의 혁신의 원동력으로서 역할 하여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생산체제로서 자리 잡은 이후로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로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가운데서 그 이전 시대에 문명이 이룩한 모든 업적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축적방식은 이전의 생산방식보다 현저하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축적의 사회적 비용을 빈곤층, 저개발국, 그리고 나아가서는 지구 전체(생태계)에 전가하기 때문에 점차로 인류의 발전과 심지어 인류의 (그리고 대부분의 "고등" 생물종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장애물로 변모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의 논리를 바탕으로 출발하였고 그 바탕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기 때문에 시발점에서부터 자연을 정복의 대상, "공짜 선물"로 인식하였으므로 생태파괴는 자본주의 문명체계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주류 정치경제학에서는 생태산업혁명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에너지시스템과 같은 기술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속시키려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의미한다. 이러한 녹색산업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생태적 근대화"라고 표현하며, 흔히 부유한 국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생태혁신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생태적 근대화는 "소유적 개인주자들(possessive-individualist)"이 지지하는 현존 사회질서와 충돌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지속가능"하며 따라서 생태혁명은 생산방식의 급진적인 전환이 아니라 기존체제의 근대화를 통하여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류 정치경제학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투입되는 에너지와 원재료의 양을 줄임으로써 자본주의 경제는 "탈 물질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의 근원은 생산관계이지 기술 자체가 아니라고 본다.

시장에 대한 맹신과 기술적인 접근방법, “오염방지 중심의 가치관”과 “절제의 정치” 등 윤리적 자기극복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의 무제한적인 성장욕구는 지구 생태계에 압력을 주게 되고 그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동원된 기술은 다시 압력을 증가시키는 모순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문명이 지나간 자리에는 사막이 남는다.’ 현대에 와서 이런 생태적 파괴의 경향은 전 지구적 범위로 확산되었고 자본주의는 이를 “창조적 파괴”라는 말로 미화시켰으나 실재로는 인류와 자연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는 “파괴적 창조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해마다 증가하는 GNP에 매달리는 구식 경제”의 꿈을 초월해야할 때가 되었다. “GNP증가는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거나 전쟁준비에 의해서만 보강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팽창된 잉여를 전쟁이란 엄청난 낭비를 통해 흡수할 뿐, 균등하게 배분하거나 공황을 유발하지 않고 해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금융, 보험, 독점기업이란 수단을 통해 유지되는 거짓 안정은 역동적인 평형상태를 달성할 수 있는 효율적인 사회적 수단의 사용을 좌절시킨다.

그래서 저자는 지속가능성 문제에 대한 장기적 해답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의존적이고 역동적인 공동체(와 공동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곧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저자는 사회주의의 기초삼각형이란 개념을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1) 사회적 소유, (2) 노동자들이 조직한 사회적 생산, (3) 공동체적 수요의 충족(교환가치 중심이 아닌 사용가치 중심의 공급) 등 세 꼭짓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정한 생태혁명은 자본주의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복원하고 모든 인간과 토지를 함께 끌어안는 공동체적 신진대사 체계를 추구하는 생태사회혁명을 요구한다. 이 방식은 필요한 경우에는 대안 기술의 적용을 수용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사회의 구성을 그 바탕이 되는 현존하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바꾸는데 중점을 둔다. 이 목표는 지속가능한 인간개발의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생산과 분배, 교환과 소비를 평등하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사회 질서의 주류 논리와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현대 세계경제의 특징인 인간/자연의 상호 신진대사관계의 균열이 지속되는 것을 막고 보다 유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생태적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혁명을 바탕으로 한 문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이런 혁명이 가능한가? 저자는 현실세계에서의 (사회주의적) 생태혁명의 사례로서 중남미 좌파정권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이런 대안을 수용하고 시도할 만한 것인지는 또 다른 논쟁의 시발이 될 것이지만 하나의 문명체계로서 자본주의가 한계에 이르렀고 대안적 문명체계를 수립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주저 없이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사회주의로 가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저자의 목적이 원인분석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가 한다. 그렇기는 해도 현실적 대안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여전히 아쉬운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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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근 2010-06-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명지전문대 행정과에서 2010년 2학기에 '행정과 리더십'강의를 담당하게 된 주동근입니다.
'한국의 대통령 리더십과 국가발전 - 바람직한 대통령 리더십 모델'이라는 책을 교재로 쓰려고 합니다.
이 책이 귀 출판사의 책이 맞는지요..
맞다면, 위의 메일 주소로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사랑 2010-06-02 06:5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메일 보냈습니다.
 



Chroniques des temps consensuels de Jacques Rancière (Broché - 7 octobr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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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영남대 언론정보학부 주형일 교수
 
 
 

여기 모인 시론(時論)들은 내가 지난 10년 동안 브라질의 주요 신문인 폴라 데 상파울우Folha de Sãn Paulo의 부탁으로 쓴 것들 중에서 선택한 것이다. 다룬 주제들 중 일부는 신문사가 내게 제안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주제들은 국가적 논쟁과 세계적 분쟁, 새로운 전시회나 영화 등 사람들이 뉴스라고 부르는 것들이 제공한 사실들 중에서 내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다.

그런데 시론은 지나가는 시간의 사건들에 응답하는 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시간은 사건들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사건들은 항상 시간을 멈추는 방식들이며 사건을 사건으로 식별하게 만드는 시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방식들이다. 시론을 말하는 자는 지배를 말한다. 그것은 왕의 활동무대가 아니라 시간을 나누어 읽는 것이며 영역을 그리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의 일정한 구성이며 주목할 만한 것의 지각 양식이고 옛 것과 새 것의,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해석 체제이다.

나는 오늘날을 지배하는 것을 '합의'라는 명칭 하에 요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합의는 세태에 환멸을 느낀 문학이 기꺼이 묘사하는 그런 것—작은 차이에 대한 숭배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이 일치하고, 강한 열정들과 큰 이상들이 자기도취적 만족들의 화해에 자리를 양보하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다. 20년 전에 장난을 치고자 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제도들을 그것의 풍습들에 충돌 없이 일치시켰을 이 새로운 분위기를 칭찬했다. 오늘날 심각하길 원하는 사람들—대부분 같은 사람들—은 "대중 개인주의"의 지배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집단적 덕목들의 쇠퇴를 고발하며 그 안에서 모든 독재의 뿌리를 발견한다. 지적 논쟁들을 위한 이러한 용감함의 레퍼토리들이 갖는 공통적 기원은 잘 알려져 있다. 즉, 그들은 토크빌에게서 민주주의의 부드러운 풍습에 대한 찬사와 민주주의 구속에 대한 고발을 빌려오기도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합의가 정신들과 육체들의 이런 화해가 아님을 보게 된다. 새로운 인종차별주의와 민족말살, "인도주의적" 전쟁과 "테러에 대한 전쟁"은 여기에서 평론된 합의의 시대의 핵심에 위치한다. 총체적 전쟁과 극단적 악에 대한 픽션 영화들이나 나치의 인간말살의 해석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들 또한 여기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합의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의 작전지도이며 전쟁과 평화가 머무는 보이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의 지형도이다.  

합의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의미와 의미의 일치이다. 사물들을 제시하는 감각 체제와 사물들의 의미의 해석양식 사이의 일치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합의는 그것이 시각기계인 한에서 권력기계이다. 합의는 세계의 상태에 대한 두 개의 제안—하나는 마침내 평화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 평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즉, 있는 것만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을 화해시키면서 모두가 볼 수 있는 것만을 확인한다고 주장한다. 이 호두껍질 안에서 유토피아와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전개된 주장들이 요약될 수 있다. 전쟁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있기를 바랐다. 경제 집단들뿐만 아니라 사회계급들도, 인구뿐만 아니라 인민도, 일치시켜야 할 이해관계들뿐만 아니라 분쟁 중인 세계들도, 예측할 미래뿐만 아니라 해방시킬 장래도 더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모든 추가분들로부터 또는 이 모든 유령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제는 있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평화로워 질 것이다.

평화는 단지 자신의 다음과 같은 명백함을 너무 자주 회피한다. 즉, 노동조합은 있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명제를, 정부만이 있는 것과 있게 될 것을 연결할 줄 안다는 명제를 부정한다. 또 극단적 정당들은 혈통이 다른 이방인에 대한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새 전쟁들은 학살된 몸 위에 땅과 피의 권리들을 새긴다. 테러와 테러에 대한 전쟁은 서로 충돌한다. 합의는 따라서 시각과 해석의 기계이다. 이 기계는 쉼 없이 외형을 재건해야 하고 전쟁과 평화를 그것들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원칙은 간단할 수 있다. 전쟁은 다른 곳에서만 옛날에 일어난다고 기계는 말한다. 즉, 땅과 피의 어두운 법을 아직 따르는 나라들에서, 어제의 전투들과 낡은 특혜들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케케묵은 긴장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곳이 여기라고 확언하고 과거가 현재라고 확언하기 때문에 합의의 기계는 쉼 없이 공간들의 경계와 시간들의 단절을 다시 그려야 한다.

공간들을 나누기 위해서는, "케케묵은" 전쟁들을 합의의 세계의 가장자리에 놓기 위해서는 종종 폭탄이 필요하다. 시간은 보다 쉽게 조종될 수 있다. 합의는 시간의 현실이 하나이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사용들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서이고 시간의 현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현재의 강압적인 시나리오들에, 반항자들—근대성의 절름발이들이나 유토피아의 잘못 치유된 생존자들—을 한 곳에 몰아넣는 과거의 시나리오들에, 모든 에너지들의 펼침을 지휘하는 미래의 시나리오들에 시간을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여기 모인 시론들은 현재에 대한 쉼 없는 진단과 기억상실의 정치들, 과거와의 작별, 기념, 기억의 의무, 과거가 그렇게 알려지기를 거부하는 이유들에 대한 설명, 행복하다고 주장하던 미래들과의 결별, 새 세기와 새 유토피아들에 대한 찬양과 같이 시간에 맡겨진 굴곡들을 분석하는데 전념한다. 

시론은 따라서 이 합의의 놀이들을 분석하기 위해 자신의 조사지역들을 옮겨야 하고 시간의 다른 흔적들을 보러가야 하며 자신의 고유한 시간 시나리오들을 발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크로넨버그1)의 픽션 기계들이나 매튜 바니2)의 설치작품들을 졸라3)나 피카비아4)의 작품들과 충돌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시회에서 실제 현존에 대한 그리스도적 찬양이 고문서의 정치에 맞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악의 새로운 픽션들, 역사 영화들이나 재난 영화들 안에서 현재가 스스로 부여하는 얼굴을, 또는 영상의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논쟁 안에서 가시적인 것의 정치적 지위가 사라지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이 시론들은 그렇지만 시간의 신호들을 분류 정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합의의 논리에 속하며, 시간의 증상들을 쉼 없이 청진하는 그리고 사회 집단의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여 거기에서 항상 똑같은 악—현재에의 적응 부족과 미래에의 신봉 부족—을 식별해 내는 그것의 해석기계에 속하는 일이다. 합의는 하나의 현실만이 있으며 그것의 기호들을 소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간 안에 경계를 다시 긋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공간만이 있으며 시간의 모습들을 증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시간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합의는 우리에게 동의할 것만을 요구한다. 국민투표라는 최근의 사건은 그것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삽화를 제공했다. 우리에게 예 또는 아니오라는 선택을 제안할 때조차도 합의는 우리가 무(無)의 숭배자임을 자백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예라고 말할 것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합의가 아는 유일한 대립관계들은 현재와 과거, 확언과 부정, 건강과 병의 대립관계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관계의 놀이 안에서 남김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특정한 갈등의 가능성 그 자체이다. 있는 것 위에 가해지는 갈등, 어떤 현재와 다른 현재를 대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갈등, 보이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을 묘사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고 확언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 다른 방식은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치이다. 뒤에 이어지는 시론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의 공간을 다시 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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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레나타 살레츨,슬라보예 지젝 편집

라깡정신분석연구소 옮김




차례

서문




1부 시선  목소리

1. 대상 목소리.  믈라덴 돌라르: 김종주

2. 철학자의 맹인벽.  알렌카 주판치치: 이병혁

3. 죽이는 시선, 시선 안에서 죽이기: 마이클 파웰의<피핑 톰>.  엘리자베트 브론펜: 이수연

4. "나는 눈으로 너를 듣는다"; 또는 보이지 않는 주인.  슬라보예 지젝: 윤정주


2부 사랑의 대상들

5. 첫눈에.  믈라덴 돌라르: 김종주

6. 서구 주체성의 성적 생산,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하여.  프레드릭 제임슨: 양석원

7.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레나타 살레츨: 한기

8. “성적인 관계는 없다”  슬라보예 지젝: 이만우

필자와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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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레나타 살레츨,슬라보예 지젝

정신분석학계에서 흔히 우리는 환자들이 순박하고 정신분석 이론에 대해 알지 못했던 옛날의 영웅시대를 향수에 적어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무지 덕분에 그들은 ‘더욱 순수한’ 증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무의식이 합리적인 지식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지 않았던 그런 증상들이다. 그런 시대에는 분석가한테 이렇게 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지난밤에 저는 용을 죽이고 무성한 숲을 지나 어떤 성곽으로 가는 꿈을 꾸었어요.” 그에 대해 분석가는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대답했다. “기본적인 꿈이군요! 용은 당신의 아버지이고 그 꿈은 어머니의 성곽이란 안전한 피난처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어요.” 자끄 라깡은 정확히 그 반대에 내기를 걸고 있다. 정신분석의 주체(분석되고 있는 사람)는 근대적인 과학의 주체가 되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도 그의 증상들이 지금 현재가 아니고 정의상 ‘순진했던’ 일이 결코 없었으며, (그 의미를) 알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서의 분석가한테 항상 건네지고 있어서 말하자면 그것들의 해석을 내포하는, 즉 가리키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융학파, 클라인학파, 라깡학파, 등등의 증상들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크게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현실이 어떤 정신분석 이론을 암암리에 참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양을 갖춘 전형적인 환자(피분석자)의 ‘자유연상’은 그의 장애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의 대부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두 가지 정신분석 간에 진행 중인 이러한 전투에서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의 운명일 뿐 아니라 근대성 그 자체의 운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성적인 지식을 고집할 것인지 어떤 종류의 직관적인 지혜로 되돌아갈 것인지? 이러한 전투, 즉 옛날 광명의 전투(bataille des lumières)의 지속은 두 성간의 관계라는 지역에서처럼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 아무데도 없다. 대략 100년 전에 히스테리 여성이란 인물의 갑작스런 출현이(리하르트 바그너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오토 바이닝거, 프란츠 카프카, 에드바르드 뭉크, 등등의 작품에서) 성적인 관계의 위기를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 그늘 속에서 계속 살아오고 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부부간의 조화에 대한 매혹적으로 순박한 주장에서 흔들리는 추가 다른 극단으로 갔으며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성간의 관계를 증언해준다. 즉 남자와 여자는 결코 상호보완적이지 못하고, 여기에는 이미 형성된 조화도 없으며, 두 성의 각각은 다른 쪽의 동일성을 위협하게 되고…. 이런 위기에 접근해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 번째 반계몽주의적인 방법에 따르면 이러한 불균형은 근대적인 주체가 전통의 유기적인 단위에서 그 뿌리를 상실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데, 어떤 종류의 전근대적인 지혜(예를 들어 옛날의 ‘기계적인’ 데카르트식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게 되어 있는 새로운 ‘전체론적 패러다임’의 모습)로의 회귀가 두 성간의 대립도 폐지시켜서 잃어버린 조화를 재정립하게 해줄 것이다.

  두 번째 접근방법의 주장은 이렇다. 즉 19세기말에 히스테리 여성을 남성의 동일성에 대한 위협으로 지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특징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특징은 아직도 ‘설정되지’ 않았고 아직도 ‘단독으로’ 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본질적인’ 방식으로 항상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적인 관계가 없다”(라깡)는 것이 틀에 박힌 문구가 되었던 정확히 역사적인 맥락(100년 전에 두 성간의 관계상의 커다란 위기로서 정신분석을 탄생케 했던 것)과 이런 진술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라깡의 주장과의 사이에는 상반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유한 변증법적인 분석에서 보편성과 역사화는 정확히 상관적이다. 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은 표준적인 판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19세기말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의 통찰력은 그것들의 발견의 역사적인 맥락에도 불구하고서가 아니라 발견의 역사적인 맥락 때문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라깡의 “성관계는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어째서 사랑이 있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을 제공해준다. 사랑은 미끼, 즉 신기루인데, 그 기능은 두 성간의 관계가 보이는 환원 불가능하고 구성적인 ‘탈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부분 대상들’―전(前)남근적인 향락의 나머지, 즉 부성은유에서 아직도 ‘지양되지’ 않은, 부성은유에 의해 중재되지 않은 향락의 나머지―은 성적인 관계의 충족을 가로막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구체화한다. 라깡은 프로이트의 부분 대상 목록(젖가슴, 대변, 남근)에 시선과 목소리라는 두 가지를 덧붙였다. 따라서 시선과 목소리가 특히 사랑의 대상들이 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목소리나 시선과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이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매체, 촉매가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전제로부터 세 가지 결론들이 나온다. 첫째, 사랑은 단순한 착각이나 상상적인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대상의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넘어서 진정한 사랑의 목표는 실재적인 것의 핵심이 되는데,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이 그 대상 속에 들어있는 것, 간단히 말해서 라깡이 타대상(l'objet petit a)이라고 부른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도―은 그 대상한테서 모든 상상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특성을 벗겨냈을 때 그 대상에서 남아있는 것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둘째, 사랑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화는 그 대상을 못 견디게 만드는 향락의 ‘비역사적’ 외상적인 핵심을 고급화하고 길들이고 상징화하려는 매우 많은 (결국엔 실패하는) 시도들이다. 셋째, 사랑은 ‘그저 사랑’이 될 수 없고 항상 권력과 지배를 위한 전투가 벌어지는 스크린, 즉 영역이 된다. 사랑의 촉매로서 목소리는 최면적인 힘 그 자체의 매체가 아닌가? 다른 쪽의 보호방패를 빼앗는 매체, 그(녀)에게 직접적인 통제를 획득하고 그(녀)를 우리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매체가 아닌가? 시선은 타인을 복종으로 유인하는 매혹의 매체(권력의 광경에 의해 매혹되는 주체의 시선이란 모습으로)일 뿐만 아니라 통제의 매체(사찰하는 시선의 모습으로)가 아닌가? 60여년 전 파시스트의 위협에 뒤따라 발터 벤야민은 미적인 것의 좌익 정치화로 정치적인 것의 파시즘적인 미학화에 반대하자고 제안했다. 동일한 방법으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섹슈얼리티의 정치화(성차이가 실제적인 사회에서 지각되는 방식의 정치적인 중복결정을 분석함으로써)로 정치적인 것의 성화(sexualization)에 반대해야 한다(남녀의 우주적인 원리들의 균형을 재정립하려는 뉴 에이지의 노력을 통하여 남녀 성의 ‘자연적인’ 가족 간의 위계구조에서 정치적인 위계구조의 명백하게 반동적인 뉴 라이트적인 ‘근거’로부터 정치투쟁을 리비도적인 교착상태의 표현―미해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부터 나온 행동화로서의 반항, 등등―으로 환원시키는 허위프로이트학파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1부와 2부는 각각 기본개념(목소리와 시선; 사랑)의 정교화로 시작되는데, 거기엔 세 가지 역사적인 분석들이 부착되어 있다. 「시선, 목소리」라는 1부는 믈라덴 돌라르로부터 시작되는데,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의 해체와는 달리 과도한 전(前)상징적인 향락의 두 가지 대상적인 나머지로서 목소리와 시선에 대한 라깡 이론의 귀결로부터 작업된 것이다. 돌라르의 논문에 이어 알렌카 주판치치의 논문은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가는 계몽주의 전통에서 눈멂의 역설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짓 편견과 미혹시키는 착각에서 나온 주체의 전형적인 사례가 눈먼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엘리자베트 브론펜은 마이클 파웰의 컬트영화인 <피핑 톰>을 자세히 읽어봄으로써 히치콕식의 살인적인 시선의 동기를 전개하고 있다. 끝으로 슬라보예 지젝은 2부로의 통과를 준비해준다. 첫째, 그는 ‘부분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증오의 대상과 맺는 인종차별주의/성차별주의 주체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선과 목소리가 정치-이데올로기 투쟁에 관련되는 방식을 공략하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의 폭력이 분출되는 표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도시에서 유대인을 전멸시키거나 외국인을 마구 때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전멸시키려고 노력할까? 그 대답은 이중적이다. 폭력은 대타자의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상징적인 허구를 목표로 삼으며, 또한 그것을 넘어서 대타자의 동일성의 환상적인 ‘실재계의 핵심’을 목표로 삼는다. 「사랑의 대상들」이란 2부에서 다시금 믈라덴 돌라르가 기괴함(das Unheimliche)이란 프로이트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타대상(l'objet petit a)의 미로를 전이적인 사랑의 원인으로 표명하고 있다. 돌라르를 뒤이어 세 편의 구체적인 분석들 가운데 첫 번째 논문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푸코의 설명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섹슈얼리티가 인간 주체의 가장 깊숙한 비밀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안 덕분에 그는 기독교의 전복적인 신랄함을 완화시킬 수 있었고 계급사회에서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레나타 살레츨은 세 편의 문학적인 텍스트(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와 「뮤즈의 비극」,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들>)에 관하여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랑과 사회제도 사이의 관계의 역설을 탐구하고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현대의 ‘바그너적인’ 사랑에 관한 두 편의 영화(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소테의 <금지된 사랑>)의 분석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끝맺는 논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랑의 영역에서 가치저하로의 보편적인 경향”(프로이트)이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보이는 시대인 오늘날에 진정한 사랑이 오로지 그 성취를 회피하는 한에 있어서 가능할 뿐이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사랑의 대상은 오직 거부되면서 그 품위를 지켜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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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Financial Crisis: Causes and Consequences by John Bellamy Foster and Fred Magdoff (Paperback - Jan 1, 2009)
 
 

대금융위기

 

존 벨라미 포스터/프레드 맥도프 저

박종일 역  
  
  

목차  


서문

도론

제 1 부 : 원인

   1장 가계부채의 거품

   2장 부채와 투기의 폭발

3장 독점-금융 자본

4장 자본주의의 금융화

제 2 부 : 결과

5장 자본의 금융화와 위기

6장 실물경제로의 복귀



색인



서문

2008년 11월 6일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의 역전에 관해 지난 몇 달 동안 쏟아져 나온 평론 가운데서 미국의 풍자잡지 「양파」(The Onion)에 실린 기사만큼 정곡을 찌른 글은 없을 것이다. 2008년 7월 14일에 이 잡지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후퇴의 저주에 빠진 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투자할 새로운 거품”이었다. 양파는 다음과 같은 장난기 어린 기사를 실었다: “미국경제는 건전한 투자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몇 달 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대금리 주택담보대출) 거품이 꺼진 후 금융업계가 적절한 공상속의 수익원을 찾아 나서자 새로운 투자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대체거품은 등장하지 않았고 투자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현실세계의 반격’이라고 부른다—가 펼쳐지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또 한 차례의 금융거품이 일지 않으면 경제가 침몰할 것임을 비아냥거리는 이 기사에서 「양파」지는 유력한 경제 분석가의 말을 인용하였다: “시카고의 투자가 밥 타이켄은 ‘미국경제는 또 하나의 거품을 필요로 한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가라앉지 않고 계속 헤엄치려면 거품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1)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양파」지는 현대의 독점금융자본의 핵심적인 문제—생산의 정체와 그 대응책으로 등장한 금융거품의 성장. 거품이 걷히면 우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즉, 현실세계의 반격이다—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세계사적인 사건의 절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적절한 명칭이 필요하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경제 붕괴 사태보다도 극심하였기에 지금까지 언제나 대문자로 표시해오고 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의 한가운데 있는 지금의 사태를 어떤 사람들은 “대금융위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 80년 전인 1929년에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뒤이어 대공황이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대금융위기는 경제사의 한 전환점이지만,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전모를 예측할 수가 없고 오로지 이 위기를 맞아 사람들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느냐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현재 진행 중인 대금융위기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학이란 사실상 정치경제임을 깨달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상 이 책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 앉아 세상바라보기”인 셈이며, 그 거인들도 다른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앉았기에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차차 설명하겠지만, 이 책은 폴 배런(Paul Baran), 폴 스위지(Paul Sweezy), 해리 맥도프(Harry Magdoff)가 쌓아올린 기초 위에서 쓰였고 이들은 또한 마르크스, 베블렌, 슘페터, 케인즈, 칼레츠키, 스타인들, 민스키 같은 선각자들의 저작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우리들의 독창적인 저작이라고 주장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이 책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발전해온 분석틀을 물려받아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 적용함으로써 보통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을 통한 급격한 변화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대금융위기를 분석한 이 책을 읽고서 배런, 스위지, 맥도프........그리고 마르크스의 보다 거시적이고 심오한 분석에 접근해가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 책 『대금융위기』의 핵심적인 내용은「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에 이미 실렸던 것이다.「먼슬리 리뷰」는 1949년 이래로 미국 내부의 생생한 비판적 관점과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이런 노력을 격려해준「먼슬리 리뷰」의 독자들은 물론이고 직접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이 책을 쓸 때 직접적인 도움을 준 동료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브렛 클라크, 존 메이지, 클로드 미스키에비치, 마틴 파디오, 존 J. 심슨, 마이클 예이츠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이들보다 결코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스캇 보처트, 요시에 후루하시, 한나 홀먼, 라이언 조나, 빅터 월리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캐리 앤 나우모프와 에이미 드마리스트도 우리를 돕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었다. 해리와 폴과 함께 했던 가장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자 이 책을 그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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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Teaching Thinking: Philosophical Enquiry in the Classroom by Robert Fisher (Paperback - Jun 15, 2008)
 
역자: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노희정 교수
 
 
책 제목: 사고하는 법 가르치기(가제)

목차
 

감사의 말씀

서문




1. 사고에 대해 사고하기

2. 어린이 철학

3. 탐구 공동체

4. 이야기로 사고하기

5. 대화식 교수법

6. 교실에서의 철학

7. 교육과정 전반의 사고




부록1: 아이들에게 철학적 탐구를 위한 질문과 주제

부록2: 사고 용어: 개념의 교육과정

부록3: 대화 기술 점검표

부록4: 우리는 어떻게 대화의 과정을 평가하는가?

부록5: 토의의 평가: 어린이를 위한 질문

참고문헌

인터넷 정보

색인

감사의 말씀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에서 ‘어린이 철학’ 운동 발달 과업에 함께 참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지난 30 여 년 동안 초등학교 학생들의 철학적 토의의 잠재력을 맨 처음 나에게 보여준 Michael Whalley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Will Robinson, Roger Sutcliffe, Karin Murris, Jonna Haynes, Victor Quinn, Roger Prentice, Sara Liptai, Steve Williams, Paul Cleghorn을 포함하여 SAPERE(교육에서의 철학탐구 및 반성 진흥 협회)의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들은 내가 어린이 철학의 이론과 실제를 이해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린이 철학 운동의 선구자인 Matthew Lipman과 Ann Margaret Sharp, 그리고 그들의 동료인 Montclair 주립대학의 IAPC(어린이철학진흥협회)의 회원들에게 감사하며, 어린이 철학 프로그램의 인용을 허락해 준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미국의 Gareth Matthews를 포함하여 스코틀랜드 Catherine McCall, 오스트레일리아의 Phil Cam, Lynne, Laurence Splitter, 캐나다의 Michel Sasseville, 그리고 벨기에의 Marie-Pierre Doutrelepont, 오스트리아의 Daniella Camhy 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특히 Julie Winyard, Lizann O'Conor와 나의 초등학교철학 프로젝트에 공헌한 서부 런런 학교의 여러 교사 연구자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Brunel 대학교에서 나의 연구에 도움 주셨던 동료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나와 함께 철학적인 토의를 공유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의 사고는 참신했으며 철학적 관심은 깊이가 있었다. 특히 가족 내의 철학적 토의의 가치를  알게 해 준 나의 아들 Tom과 Jake를 포함하여 이 책에 인용된 여러 어린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Debbie Pacey와 Johanna Kiernop의 공헌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학교와 회의에서 출판이나 개인적 서신을 통하여 학생들이나 나와 작업을 공유하고, 내가 어린이 철학을 통해 사고함을 가르치는 것의 잠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여러 교사와 연구자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런 모든 분들의 노력이 이 책에 담겨 있으며, 이 책의 흠이나 부족함은 순전히 나 때문에 생긴 것임을 말씀드린다.



서 문




나에게 있어 철학은 어린이들과 함께 사고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나는 사고의 모험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좀 더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학교선생님

어린이들의 사고를 증진시키기 위한 도전은 교육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최근 교육과정 개선의 초점이 되었다. 8살 Paul은 ‘우리는 사고를 통해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요.’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에게 사고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세계적으로 펼쳐지는 ‘어린이 철학’ 운동의 핵심이다. 이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 세계 3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모든 연령층, 각양의 능력을 지닌 학생들의 사고, 학습, 언어의 기술을 강화한다.

이 책은 어린이 철학의 이론과 실제를 다루고 있으며, 영국의 어린이와 학교를 대상으로 연구한 내용을 싣고 있다. 이 책은 가정과 학교에서 어린이 집단과 함께 하는 철학적 탐구를 촉진하며, 토의를 통한 학생들의 비판적, 창의적 탐구를 격려한다. 이것은 어린이들에게 철학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토의(철학적 토의)에 참여하는 방법, ‘철학하는(philosophize)’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책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철학적 토의가 어린이들에게 말하고 경청하는 데 가치를 두도록 하는 데 유용한 방식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말하고 생각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루고, ‘어린이 철학’이라고 불리는 접근 방식을 통해 보다 좋게 말하고 생각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제1장은 ‘사고에 대해 사고하기(Thinking about Thinking)’이다. 이 장은 먼저 ‘사고하는 방법(Teaching Thinking)’1)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이유와 철학이 좀 더 효과적인 사고를 개발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때 할 수 있는 역할을 탐색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 왜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가?

 • 어떤 종류의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는가?

 • 왜 어린이 철학인가?

철학은 그 주요 주제가 사고하는 방법과 관련된 유일한 학문이며 사고의 증진을 목표로 한다. 교사가 직면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어린이들에게 사려 깊은 토의를 하게 할 것인가?’ 이다.

제2장은 ‘어린이 철학’이다. 여기서는 어린이 철학 프로그램과 립맨(Matthew Lipman)의 초창기 연구에 대해 소개한다.

 • 어린이 철학이란 무엇인가?

 • 어린이 철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어린이 철학은 어떤 사고를 개발하는가?

여기서는 립맨의 접근 방식의 개요가 간단한 자료와 함께 소개되고, 교실 토의를 통해 개발되고 있는 몇 가지 사고 기술들이 발췌 소개된다. 어린이 철학은 추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탐구공동체’라 불리는 특정 교수 전략을 통해 도덕적 사고와 사회 교육을 위한 맥락을 제공한다.

제3장은 탐구공동체이다. 여기서는 어린이가 철학적 토의에 참여하는 것이 어떻게 교육의 도덕적, 사회적 목적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 어떻게 철학적 토의를 계획할 것인가?

• 어떻게 철학적 토의를 촉진시킬 것인가?

• 어떻게 어린이 철학의 장점을 평가할 것인가?

  이후의 장은 철학적 토의가 어떻게 적용되어 모든 학습 영역에 확장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제4장은 이야기로 사고하기다. 여기서는 어떻게 철학적인 토의가 이야기의 사용을 통해 자극되어 비판적 사고와 문식성(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을 개발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왜 사고를 위한 이야기인가?

• 어떤 종류의 사고가 사용될 수 있는가?

• 사고를 위한 이야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사고를 위한 이야기’ 접근은 교실 토의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예들을 통해 설명된다. 이야기는 철학적 탐구를 자극 좋은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화식 토의를 이끄는 최선의 방식은 무엇인가?

제5장은 대화식 교수이다.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을 탐색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대화식 교수란 무엇인가?

• 대화식 교수는 전통적 교수와 어떻게 다른가?

• 대화식 토의를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

이 장은 대화식 교수가 어떻게 교육의 기본적인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인지적 목적을 만족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6장은 교실 철학이다. 여기서는 어린이 철학의 핵심 요소를 요약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어떻게 탐구를 확장하는가?

• 무엇이 철학적 토의를 가능하게 하는가?

• 어린이 철학은 어떤 활동을 하는가?

마지막으로 제7장은 교육과정 전반에 걸친 사고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철학적인 토의가 교과과정의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철학적 탐구는 어떻게 교육과정에 적용되는가?

• 철학적 탐구는 어떤 교차적 교육과정(cross-curricular) 기술을 개발하는가?

• 철학적 대화는 모든 교과목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

책의 끝 부분에 계획하고 가르치고, 철학적 토의를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부록이 있으며, 참고서적의 문헌, 핵심 주제에 대한 색인 등이 있다.

이 책은 학교에서 교사와 어린이들과 함께 한 연구로부터 나온 철학 토의의 예들이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인용들은 어린이들과 교사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상이한 나이와 능력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책에서 교실 토의의 발췌문을 통해 소개된 주제와 질문의 목록은 부록 1에 있다.

여기서 기술된 사고와 학습의 모델이 여러분이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관념들의 모험에 영감을 제공하고, 여러분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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