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ze and Voice as Love Objects: <I>SIC 1</I> ([sic] Series) by Renata Salecl, Mladen Dolar, and Alenka Zupancic (Hardcover - Oct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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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레나타 살레츨,슬라보예 지젝 편집

라깡정신분석연구소 옮김




차례

서문




1부 시선  목소리

1. 대상 목소리.  믈라덴 돌라르: 김종주

2. 철학자의 맹인벽.  알렌카 주판치치: 이병혁

3. 죽이는 시선, 시선 안에서 죽이기: 마이클 파웰의<피핑 톰>.  엘리자베트 브론펜: 이수연

4. "나는 눈으로 너를 듣는다"; 또는 보이지 않는 주인.  슬라보예 지젝: 윤정주


2부 사랑의 대상들

5. 첫눈에.  믈라덴 돌라르: 김종주

6. 서구 주체성의 성적 생산,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하여.  프레드릭 제임슨: 양석원

7.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레나타 살레츨: 한기

8. “성적인 관계는 없다”  슬라보예 지젝: 이만우

필자와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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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레나타 살레츨,슬라보예 지젝

정신분석학계에서 흔히 우리는 환자들이 순박하고 정신분석 이론에 대해 알지 못했던 옛날의 영웅시대를 향수에 적어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무지 덕분에 그들은 ‘더욱 순수한’ 증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무의식이 합리적인 지식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지 않았던 그런 증상들이다. 그런 시대에는 분석가한테 이렇게 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지난밤에 저는 용을 죽이고 무성한 숲을 지나 어떤 성곽으로 가는 꿈을 꾸었어요.” 그에 대해 분석가는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대답했다. “기본적인 꿈이군요! 용은 당신의 아버지이고 그 꿈은 어머니의 성곽이란 안전한 피난처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어요.” 자끄 라깡은 정확히 그 반대에 내기를 걸고 있다. 정신분석의 주체(분석되고 있는 사람)는 근대적인 과학의 주체가 되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도 그의 증상들이 지금 현재가 아니고 정의상 ‘순진했던’ 일이 결코 없었으며, (그 의미를) 알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서의 분석가한테 항상 건네지고 있어서 말하자면 그것들의 해석을 내포하는, 즉 가리키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융학파, 클라인학파, 라깡학파, 등등의 증상들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크게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현실이 어떤 정신분석 이론을 암암리에 참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양을 갖춘 전형적인 환자(피분석자)의 ‘자유연상’은 그의 장애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의 대부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두 가지 정신분석 간에 진행 중인 이러한 전투에서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의 운명일 뿐 아니라 근대성 그 자체의 운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성적인 지식을 고집할 것인지 어떤 종류의 직관적인 지혜로 되돌아갈 것인지? 이러한 전투, 즉 옛날 광명의 전투(bataille des lumières)의 지속은 두 성간의 관계라는 지역에서처럼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 아무데도 없다. 대략 100년 전에 히스테리 여성이란 인물의 갑작스런 출현이(리하르트 바그너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오토 바이닝거, 프란츠 카프카, 에드바르드 뭉크, 등등의 작품에서) 성적인 관계의 위기를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 그늘 속에서 계속 살아오고 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부부간의 조화에 대한 매혹적으로 순박한 주장에서 흔들리는 추가 다른 극단으로 갔으며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성간의 관계를 증언해준다. 즉 남자와 여자는 결코 상호보완적이지 못하고, 여기에는 이미 형성된 조화도 없으며, 두 성의 각각은 다른 쪽의 동일성을 위협하게 되고…. 이런 위기에 접근해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 번째 반계몽주의적인 방법에 따르면 이러한 불균형은 근대적인 주체가 전통의 유기적인 단위에서 그 뿌리를 상실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데, 어떤 종류의 전근대적인 지혜(예를 들어 옛날의 ‘기계적인’ 데카르트식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게 되어 있는 새로운 ‘전체론적 패러다임’의 모습)로의 회귀가 두 성간의 대립도 폐지시켜서 잃어버린 조화를 재정립하게 해줄 것이다.

  두 번째 접근방법의 주장은 이렇다. 즉 19세기말에 히스테리 여성을 남성의 동일성에 대한 위협으로 지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특징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특징은 아직도 ‘설정되지’ 않았고 아직도 ‘단독으로’ 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본질적인’ 방식으로 항상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적인 관계가 없다”(라깡)는 것이 틀에 박힌 문구가 되었던 정확히 역사적인 맥락(100년 전에 두 성간의 관계상의 커다란 위기로서 정신분석을 탄생케 했던 것)과 이런 진술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라깡의 주장과의 사이에는 상반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유한 변증법적인 분석에서 보편성과 역사화는 정확히 상관적이다. 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은 표준적인 판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19세기말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의 통찰력은 그것들의 발견의 역사적인 맥락에도 불구하고서가 아니라 발견의 역사적인 맥락 때문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라깡의 “성관계는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어째서 사랑이 있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을 제공해준다. 사랑은 미끼, 즉 신기루인데, 그 기능은 두 성간의 관계가 보이는 환원 불가능하고 구성적인 ‘탈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부분 대상들’―전(前)남근적인 향락의 나머지, 즉 부성은유에서 아직도 ‘지양되지’ 않은, 부성은유에 의해 중재되지 않은 향락의 나머지―은 성적인 관계의 충족을 가로막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구체화한다. 라깡은 프로이트의 부분 대상 목록(젖가슴, 대변, 남근)에 시선과 목소리라는 두 가지를 덧붙였다. 따라서 시선과 목소리가 특히 사랑의 대상들이 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목소리나 시선과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이 사랑을 돋보이게 하는 매체, 촉매가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전제로부터 세 가지 결론들이 나온다. 첫째, 사랑은 단순한 착각이나 상상적인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대상의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넘어서 진정한 사랑의 목표는 실재적인 것의 핵심이 되는데,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이 그 대상 속에 들어있는 것, 간단히 말해서 라깡이 타대상(l'objet petit a)이라고 부른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도―은 그 대상한테서 모든 상상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특성을 벗겨냈을 때 그 대상에서 남아있는 것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둘째, 사랑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화는 그 대상을 못 견디게 만드는 향락의 ‘비역사적’ 외상적인 핵심을 고급화하고 길들이고 상징화하려는 매우 많은 (결국엔 실패하는) 시도들이다. 셋째, 사랑은 ‘그저 사랑’이 될 수 없고 항상 권력과 지배를 위한 전투가 벌어지는 스크린, 즉 영역이 된다. 사랑의 촉매로서 목소리는 최면적인 힘 그 자체의 매체가 아닌가? 다른 쪽의 보호방패를 빼앗는 매체, 그(녀)에게 직접적인 통제를 획득하고 그(녀)를 우리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매체가 아닌가? 시선은 타인을 복종으로 유인하는 매혹의 매체(권력의 광경에 의해 매혹되는 주체의 시선이란 모습으로)일 뿐만 아니라 통제의 매체(사찰하는 시선의 모습으로)가 아닌가? 60여년 전 파시스트의 위협에 뒤따라 발터 벤야민은 미적인 것의 좌익 정치화로 정치적인 것의 파시즘적인 미학화에 반대하자고 제안했다. 동일한 방법으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섹슈얼리티의 정치화(성차이가 실제적인 사회에서 지각되는 방식의 정치적인 중복결정을 분석함으로써)로 정치적인 것의 성화(sexualization)에 반대해야 한다(남녀의 우주적인 원리들의 균형을 재정립하려는 뉴 에이지의 노력을 통하여 남녀 성의 ‘자연적인’ 가족 간의 위계구조에서 정치적인 위계구조의 명백하게 반동적인 뉴 라이트적인 ‘근거’로부터 정치투쟁을 리비도적인 교착상태의 표현―미해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부터 나온 행동화로서의 반항, 등등―으로 환원시키는 허위프로이트학파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1부와 2부는 각각 기본개념(목소리와 시선; 사랑)의 정교화로 시작되는데, 거기엔 세 가지 역사적인 분석들이 부착되어 있다. 「시선, 목소리」라는 1부는 믈라덴 돌라르로부터 시작되는데,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의 해체와는 달리 과도한 전(前)상징적인 향락의 두 가지 대상적인 나머지로서 목소리와 시선에 대한 라깡 이론의 귀결로부터 작업된 것이다. 돌라르의 논문에 이어 알렌카 주판치치의 논문은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가는 계몽주의 전통에서 눈멂의 역설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짓 편견과 미혹시키는 착각에서 나온 주체의 전형적인 사례가 눈먼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엘리자베트 브론펜은 마이클 파웰의 컬트영화인 <피핑 톰>을 자세히 읽어봄으로써 히치콕식의 살인적인 시선의 동기를 전개하고 있다. 끝으로 슬라보예 지젝은 2부로의 통과를 준비해준다. 첫째, 그는 ‘부분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증오의 대상과 맺는 인종차별주의/성차별주의 주체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선과 목소리가 정치-이데올로기 투쟁에 관련되는 방식을 공략하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의 폭력이 분출되는 표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도시에서 유대인을 전멸시키거나 외국인을 마구 때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전멸시키려고 노력할까? 그 대답은 이중적이다. 폭력은 대타자의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상징적인 허구를 목표로 삼으며, 또한 그것을 넘어서 대타자의 동일성의 환상적인 ‘실재계의 핵심’을 목표로 삼는다. 「사랑의 대상들」이란 2부에서 다시금 믈라덴 돌라르가 기괴함(das Unheimliche)이란 프로이트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타대상(l'objet petit a)의 미로를 전이적인 사랑의 원인으로 표명하고 있다. 돌라르를 뒤이어 세 편의 구체적인 분석들 가운데 첫 번째 논문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푸코의 설명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섹슈얼리티가 인간 주체의 가장 깊숙한 비밀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안 덕분에 그는 기독교의 전복적인 신랄함을 완화시킬 수 있었고 계급사회에서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레나타 살레츨은 세 편의 문학적인 텍스트(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와 「뮤즈의 비극」,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들>)에 관하여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랑과 사회제도 사이의 관계의 역설을 탐구하고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현대의 ‘바그너적인’ 사랑에 관한 두 편의 영화(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소테의 <금지된 사랑>)의 분석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끝맺는 논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랑의 영역에서 가치저하로의 보편적인 경향”(프로이트)이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보이는 시대인 오늘날에 진정한 사랑이 오로지 그 성취를 회피하는 한에 있어서 가능할 뿐이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사랑의 대상은 오직 거부되면서 그 품위를 지켜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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