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ques des temps consensuels de Jacques Rancière (Broché - 7 octobr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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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영남대 언론정보학부 주형일 교수
 
 
 

여기 모인 시론(時論)들은 내가 지난 10년 동안 브라질의 주요 신문인 폴라 데 상파울우Folha de Sãn Paulo의 부탁으로 쓴 것들 중에서 선택한 것이다. 다룬 주제들 중 일부는 신문사가 내게 제안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주제들은 국가적 논쟁과 세계적 분쟁, 새로운 전시회나 영화 등 사람들이 뉴스라고 부르는 것들이 제공한 사실들 중에서 내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다.

그런데 시론은 지나가는 시간의 사건들에 응답하는 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시간은 사건들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사건들은 항상 시간을 멈추는 방식들이며 사건을 사건으로 식별하게 만드는 시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방식들이다. 시론을 말하는 자는 지배를 말한다. 그것은 왕의 활동무대가 아니라 시간을 나누어 읽는 것이며 영역을 그리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의 일정한 구성이며 주목할 만한 것의 지각 양식이고 옛 것과 새 것의,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해석 체제이다.

나는 오늘날을 지배하는 것을 '합의'라는 명칭 하에 요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합의는 세태에 환멸을 느낀 문학이 기꺼이 묘사하는 그런 것—작은 차이에 대한 숭배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이 일치하고, 강한 열정들과 큰 이상들이 자기도취적 만족들의 화해에 자리를 양보하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다. 20년 전에 장난을 치고자 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제도들을 그것의 풍습들에 충돌 없이 일치시켰을 이 새로운 분위기를 칭찬했다. 오늘날 심각하길 원하는 사람들—대부분 같은 사람들—은 "대중 개인주의"의 지배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집단적 덕목들의 쇠퇴를 고발하며 그 안에서 모든 독재의 뿌리를 발견한다. 지적 논쟁들을 위한 이러한 용감함의 레퍼토리들이 갖는 공통적 기원은 잘 알려져 있다. 즉, 그들은 토크빌에게서 민주주의의 부드러운 풍습에 대한 찬사와 민주주의 구속에 대한 고발을 빌려오기도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합의가 정신들과 육체들의 이런 화해가 아님을 보게 된다. 새로운 인종차별주의와 민족말살, "인도주의적" 전쟁과 "테러에 대한 전쟁"은 여기에서 평론된 합의의 시대의 핵심에 위치한다. 총체적 전쟁과 극단적 악에 대한 픽션 영화들이나 나치의 인간말살의 해석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들 또한 여기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합의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의 작전지도이며 전쟁과 평화가 머무는 보이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의 지형도이다.  

합의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의미와 의미의 일치이다. 사물들을 제시하는 감각 체제와 사물들의 의미의 해석양식 사이의 일치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합의는 그것이 시각기계인 한에서 권력기계이다. 합의는 세계의 상태에 대한 두 개의 제안—하나는 마침내 평화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 평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즉, 있는 것만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을 화해시키면서 모두가 볼 수 있는 것만을 확인한다고 주장한다. 이 호두껍질 안에서 유토피아와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전개된 주장들이 요약될 수 있다. 전쟁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있기를 바랐다. 경제 집단들뿐만 아니라 사회계급들도, 인구뿐만 아니라 인민도, 일치시켜야 할 이해관계들뿐만 아니라 분쟁 중인 세계들도, 예측할 미래뿐만 아니라 해방시킬 장래도 더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모든 추가분들로부터 또는 이 모든 유령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제는 있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평화로워 질 것이다.

평화는 단지 자신의 다음과 같은 명백함을 너무 자주 회피한다. 즉, 노동조합은 있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명제를, 정부만이 있는 것과 있게 될 것을 연결할 줄 안다는 명제를 부정한다. 또 극단적 정당들은 혈통이 다른 이방인에 대한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새 전쟁들은 학살된 몸 위에 땅과 피의 권리들을 새긴다. 테러와 테러에 대한 전쟁은 서로 충돌한다. 합의는 따라서 시각과 해석의 기계이다. 이 기계는 쉼 없이 외형을 재건해야 하고 전쟁과 평화를 그것들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원칙은 간단할 수 있다. 전쟁은 다른 곳에서만 옛날에 일어난다고 기계는 말한다. 즉, 땅과 피의 어두운 법을 아직 따르는 나라들에서, 어제의 전투들과 낡은 특혜들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케케묵은 긴장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곳이 여기라고 확언하고 과거가 현재라고 확언하기 때문에 합의의 기계는 쉼 없이 공간들의 경계와 시간들의 단절을 다시 그려야 한다.

공간들을 나누기 위해서는, "케케묵은" 전쟁들을 합의의 세계의 가장자리에 놓기 위해서는 종종 폭탄이 필요하다. 시간은 보다 쉽게 조종될 수 있다. 합의는 시간의 현실이 하나이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사용들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서이고 시간의 현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현재의 강압적인 시나리오들에, 반항자들—근대성의 절름발이들이나 유토피아의 잘못 치유된 생존자들—을 한 곳에 몰아넣는 과거의 시나리오들에, 모든 에너지들의 펼침을 지휘하는 미래의 시나리오들에 시간을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여기 모인 시론들은 현재에 대한 쉼 없는 진단과 기억상실의 정치들, 과거와의 작별, 기념, 기억의 의무, 과거가 그렇게 알려지기를 거부하는 이유들에 대한 설명, 행복하다고 주장하던 미래들과의 결별, 새 세기와 새 유토피아들에 대한 찬양과 같이 시간에 맡겨진 굴곡들을 분석하는데 전념한다. 

시론은 따라서 이 합의의 놀이들을 분석하기 위해 자신의 조사지역들을 옮겨야 하고 시간의 다른 흔적들을 보러가야 하며 자신의 고유한 시간 시나리오들을 발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크로넨버그1)의 픽션 기계들이나 매튜 바니2)의 설치작품들을 졸라3)나 피카비아4)의 작품들과 충돌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시회에서 실제 현존에 대한 그리스도적 찬양이 고문서의 정치에 맞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악의 새로운 픽션들, 역사 영화들이나 재난 영화들 안에서 현재가 스스로 부여하는 얼굴을, 또는 영상의 소유권에 대한 법률적 논쟁 안에서 가시적인 것의 정치적 지위가 사라지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이 시론들은 그렇지만 시간의 신호들을 분류 정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합의의 논리에 속하며, 시간의 증상들을 쉼 없이 청진하는 그리고 사회 집단의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여 거기에서 항상 똑같은 악—현재에의 적응 부족과 미래에의 신봉 부족—을 식별해 내는 그것의 해석기계에 속하는 일이다. 합의는 하나의 현실만이 있으며 그것의 기호들을 소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간 안에 경계를 다시 긋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공간만이 있으며 시간의 모습들을 증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시간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합의는 우리에게 동의할 것만을 요구한다. 국민투표라는 최근의 사건은 그것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삽화를 제공했다. 우리에게 예 또는 아니오라는 선택을 제안할 때조차도 합의는 우리가 무(無)의 숭배자임을 자백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예라고 말할 것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합의가 아는 유일한 대립관계들은 현재와 과거, 확언과 부정, 건강과 병의 대립관계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관계의 놀이 안에서 남김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특정한 갈등의 가능성 그 자체이다. 있는 것 위에 가해지는 갈등, 어떤 현재와 다른 현재를 대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갈등, 보이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을 묘사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고 확언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 다른 방식은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치이다. 뒤에 이어지는 시론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의 공간을 다시 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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