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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고고학 - 미셸 푸코 문학 강의

미셸 푸코 지음
허경 옮김

...

목차

옮긴이 서문

프랑스어판 일러두기

I. 광기의 언어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말
광인들의 침묵
광기 안의 언어

II. 문학과 언어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말
첫 번째 세션
두 번째 세션

III. 사드에 대한 컨퍼런스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말
첫 번째 세션
두 번째 세션

프랑스어판 편집자 서문

문학에 관한 푸코 작업 일람

푸코의 간략한 생애(1926-1984)

인명 색인

내용 색인

옮긴이 서문

역자: 허경

철학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푸코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근현대문화사상연구소 공동 대표이다. 지은 책으로 <미셸 푸코: 개념의 고고학>(근간), <푸코와 근대성>(근간)이 있으며,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를 함께 썼고, 옮긴 책으로 <부채인간>, <푸코>,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 <라캉 이론의 신화와 진실> 등이 있다.

 

 

 

 

 

 

인간사랑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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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

ISBN : 978-89-7418-578-7

부가기호: 93160

가 격: 15,000원

저자: 자크 랑시에르

번역자: 곽동준

발행일 : 2014년 3월 20일

원서명: Courts Voyages au pays du peuple (1990)

원저자: Jacques Rancière

페이지: 170

판 형: 신국판

분 야: 국내도서>인문학>서양철학>현대철학

 

 

약력:

지은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년 알제리 출생. 파리에 있는 그랑제콜 중 하나인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 : ENS)를 졸업했다.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론 읽기』의 집필에 참여해 명성을 얻었다. 1974년 알튀세르의 이론을 비판하며 알튀세르와 결별한 후 1975년에서 1981년까지 『논리적 봉기』(Les Révoltes Logiques)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1969년부터 2000년까지 파리 8대학교 철학과에서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무지한 스승』(Le Maitre Ignorant, 1987),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Aux bords de politique, 1990), 『침묵의 언어』(La parole muette, 1998),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Le Partage Du Sensible : esthetique et politique, 2000), 『미학 안의 불편함』(Malaise dans l’esthétique, 2004) 등으로 대다수는 철학, 정치, 미학에 관련된 책들이며 문학과 영화 관련 책들도 있다.

 

 

 

옮긴이 곽동준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프랑스 리모주(Limoges) 대학에서 프랑스문학 석사와 그르노블(Grenoble) III 대학에서 바로크 시인, 생 타망의 시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 시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바로크 시와 바로크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역서로 제라르 듀로조이 『세계현대미술사전』(지편), 마르그리트 뒤라스 『간통』(원제: 여름밤 10시 30분)(상원), 앙드레 빌레 『피카소 기억들과 비밀정원』(신동문화), 모리스 르베 『프랑스 고전주의 소설의 이해』(신아사), 자크 오몽 『영화감독들의 영화이론』(동문선), 니콜라 부알로 『부알로의 시학』(동문선), 뱅상 아미엘 『몽타주의 미학』(동문선), 미셀 옹프레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인간사랑) 등이 있고, 『텍스트 미시 독서론』(전망), 『지역시대의 지역논단』(세종출판사)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서문 … 9

 

1부 새로운 고향 … 15

시인의 여행-윌리엄 워즈워스 … 17

유토피아의 땅-루이 드 루브루아, 생시몽 … 39

사람들의 노래-게오르그 뷔히너 … 57

바다의 거울-클로드 즈누 … 74

 

2부 가난한 여자 … 89

화석화된 꽃-쥘 미슐레 … 91

마르트와 르네-라이너 마리아 릴케 … 111

 

3부 자살하는 아이-로베르토 로셀리니 … 135

 

원문 주석 … 171

역자 후기 … 177

 

 

이 책은:

이 책에서는 여행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 그렇지만 저 머나먼 섬이나 이국적 경치가 아니라 방문자에게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이미지를 주는 아주 가까운 고장에 가는 여행이다. 바다 건너편에, 강이나 대로에서 떨어진 곳에, 도시의 수송로 저 끝에는, 단순히 그냥 사람들이 아닌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시로 돌아가거나, 지옥으로 내려가거나, 약속의 땅이 도래하는 것 같은. 나뭇잎에 내리쬐는 7월의 태양은 유럽대륙을 산책하는 영국 시인에게 축제의 자연에 주어진 혁명적인 프랑스의 새로운 빛이 된다. 손 강 강가의 한 주막에서 서로 부딪치는 술잔들, 어느 6월의 달콤한 저녁, 시골의 어느 일요일 울리는 바이올린과 노래 소리는 새로운 사회의 다정한 모임이 된다. 그리고 역사가는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지 않고도 그가 유혹한 여자 종업원에게서 프랑스를 만든 촌스럽고 야만스러운 사람들의 정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행의 즐거움에 마을이 아름답고, 늘 태양이 비추고, 여종업원이 예쁠 필요까지는 없다. 콘크리트 벽돌이나 벽토와 판자, 양철로 된 막사 위에 드리워진 겨울 하늘의 잿빛 풍경은 이미 말하고, 읽고, 듣고, 꿈꾸었던 것과 유사하게, 바로 그 낯선 가운데 오랫동안 찾다가 단번에 알아본 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가 직접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만으로 나그네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생생한 현실을 겪어보기 위해 집을 나서고 도시와 책을 떠나 직접 걸어 다녀보겠다고 한 사람들에게 옛날 마오쩌둥의 책에서 약속한 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현실은 책의 무기력함을 고발하면서 거기 있었지만, 책에서 기대하고 있던 것이나 흔히 글로 즐겨 나타내던 것과 아주 유사했다. 여행한다는 것, 여행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런 낯섦, 책에서 표현하는 글과 정반대거나 아주 유사한 이런 빛나는 삶을 발견하는 것. 억압의 분석이나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의 의미 이전에, 우리 세대의 생생한 정치적 경험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의 모범 답안처럼 호기심으로, 무관심하게 혹은 열정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이런 기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이 어떤 개념을 현실화시키는 생생한 풍경이나 장면에서 구체화하는 방법에 대해 의문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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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 라캉과 함께 한 헤겔

슬라보예 지젝

 

레나타(Renata)에게

서론: 불가능한 절대적 앎

미셸 푸코는 철학 자체를 반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이 철학의 장을 끄집어 낸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모든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규정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는 지난 두 세기의 철학은 헤겔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구성됐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범논리주의(panlogicisme)”의 괴물, 현실의 총체적 변증법적 매개의 괴물, 관념의 자기운동 속에서 현실이 완전히 와해되게 한 괴물을 구현한다. 이 괴물에 맞서 개념의 매개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요소가 여러 가지로 명확히 드러났다. 이 표시는 의지의 비합리적 심연이란 이름으로(쉘링), 개인의 실존(l’existence)의 역설이란 이름으로(키에르케고르), 삶의 생산적 과정이란 이름으로(맑스) 관념의 절대주의에 맞선 세 개의 커다란 포스트헤겔적 전복 속에서 이미 발견될 수 있다. 헤겔에 동일시하는 가장 호의적인 해설가들은 절대적 앎이 구성하는 한계를 넘어서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는 포스트헤겔적 경험이 이성의 진보란 틀을 폭파시키는 텅 빈 반복에 의해 역사-시간의 과정을 확고히 시작시켰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헤겔의 지지자들에게 있어서도 헤겔적 체계에 대한 관계는 항상 “난 잘 알지만 그래도”의 관계이다. 헤겔이 실제성(l’effectivité)의 근본적으로 적대관계적 성격, 주체의 분산 등을 단언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균열은 모든 상처들을 봉합하러 오는 절대 관념의 자기매개 안에서 마침내 사라진다. 절대적 앎의 위치는, 마지막 화해의 위치는 여기에서 헤겔적 사물(Chose)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은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우스운 괴물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면서도(절대적 앎은 물론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실현될 수 없는 관념이다!) 동시에 금지된(절대적 앎은 도망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풍부함을 개념의 자기운동 안에서 죽게 만들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사물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헤겔의 세력권 안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동일시가 실패하는 지점을 내포한다. 사물은 항상 희생돼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개별자의 살아 있는 실질(substance)을 집어삼키고 죽이는 “범논리주의적” 헤겔의 이런 모습은 그의 비판자들의 실재(le réel)이다. 이때 실재는 라캉적 의미이다. 즉, 실제로는 실존하지 않는 지점(헤겔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괴물)이지만 그럼에도 타자에 대한 부정적 참조를 이용해 우리의 위치를 정당화할 수 있으려면, 다시 말해 거리두기의 노력을 정당화할 수 있으려면 전제가 돼야 하는 지점의 건설이다. 절대적 앎의 괴물 앞에 선 포스트헤겔주의자들을 사로잡는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환상적 건설은 그것의 매혹적인 현전(présence)을 통해 무엇을 감추는가? 어떤 구멍, 어떤 텅 빔이다. 헤겔을 라캉과 함께 읽으려고 애쓰면서 이 구멍을 그려내 보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대타자(l’Autre) 안에서의 결여에 대한, 의미작용적(signifiant) 과정을 연결하는 중심이 되는 정신외상적 텅 빔에 대한 라캉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절대적 앎은 라캉이 분석 과정의 마지막 계기에 의해, 대타자 안에서의 결여의 경험에 의해, “통과하기(la passe)”라는 지칭에 의해 그려내려고 노력했던 것에 대한 헤겔적 이름이란 것이 드러난다. 만약 라캉의 유명한 표현처럼 사드가 우리에게 칸트의 진리를 제공한다면, 그 자신이 우리에게 헤겔의 변증법의 운동을 특징짓는 기본 모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드와 함께 하는 칸트, 라캉과 함께 헤겔이다. 그렇다면 헤겔과 라캉 사이의 관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늘날 상황은 명확해 보인다. 아무도 라캉이 헤겔에게 일정한 빚을 졌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참조는 아주 한정된 시기에 만들어진 특정한 이론적 대여에 한정된다고 인정된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 사이에 라캉은 정신분석 과정을 욕망의 인정 그리고/또는 인정의 욕망이 가진 상호주관적 논리의 용어들 안에서 설명하려 시도했다. 이때 이미 라캉은 헤겔적 체계의 닫힘에 대해, 절대적 앎에 대해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는 절대적 앎을 완벽히 동질적이고 완성됐으며 스스로 닫힌 담론의 접근 불가능한 이상형과 비슷하다고 봤다. 나중에는 전부가-아님(pas-tout)의 논리와 빗금친 대타자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헤겔에 대한 이 최초의 참조를 무효로 만들었다. 달리 보면 헤겔의 절대적 앎 ― 닫힌 “원들의 원” ― 과 라캉의 빗금친 대타자 ― 완전히 구멍이 뚫린 앎 ― 사이의 대립보다 더 양립 불가능한 대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라캉은 본보기가 되는 헤겔 반대자가 아닌가?

특히 라캉에 대한 비판들이 헤겔에 대한 그의 빚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즉, 라캉은 목적론적 원 안에 텍스트의 확산을 억류하는 지하의 헤겔주의 때문에, 이성-남근중심주의에 갇힌 사람으로 머무를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해 라캉주의자들은 당연히 헤겔주의에 대한 라캉주의의 단절을 강조하면서, 라캉이 헤겔주의자가 아니고 과거에도 절대 아니었다고 지적하면서 라캉을 구하려 애쓰면서 응답할 것이다. 이제 헤겔-라캉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면서 이 논쟁에 다르게 접근할 때이다. 우리가 보기에 라캉은 완전히 헤겔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헤겔주의자는 아니다. 다시 말해 헤겔에 대해 명백한 참조를 한다는 점에서의 헤겔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가르침의 마지막 단계에서, 전부가-아님의 논리 안에서, 실재에 대한, 대타자 안의 결여에 대한 강조 안에서 그는 헤겔주의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라캉의 빛으로 헤겔을 읽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과 같은 “범이성주의자” 헤겔의 이미지가 아닌 완전히 다른 헤겔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기표의 논리의 헤겔, 즉 텅 빈 중심의 반복적 실증화(positivation)로서의 분절된 자기참조적(autoréférentiel) 과정의 헤겔을 나타나게 할 것이다.

이런 독해는 따라서 범진리주의 그리고/또는 역사주의의 퇴적층으로부터 구출된 헤겔, 기표의 논리의 헤겔을 끄집어내면서 두 용어들의 정의 자체를 바꾼다. 반대급부로 라캉의 학설이 갖는 가장 전복적인 핵, 즉 대타자 안의 구성적 결여라는 핵을 분명히 그려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대화 형식이다. 어떤 실증적 사고의 방향을 전개하려면 그것에 반대되는 주장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헤겔에 대해 이미 언급된 일반적 생각들은 헤겔주의 안에서 “이성의 제국주의”가 갖는 본보기 사례를 발견한다. 이런 폐쇄된 체계 안에서 개념(Concept)의 자기운동이 모든 차이들을 그리고 물질적 과정의 모든 분산을 부각시킨다. 그런 일반적 생각들은 라캉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헤겔에 대한 다른 생각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헤겔에 대해 라캉이 명시적으로 확언한 것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확언들을 대부분 침묵하면서 지나친다. 우리가 보기에 라캉은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헤겔주의자인지를 몰랐다”. 왜냐하면 헤겔에 대한 그의 독해는 코제브(Kojève)와 이폴리트의 전통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증법과 기표의 논리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헤겔에 대한 라캉의 모든 명시적 참조를 처음에는 한쪽에 치워두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적 논쟁은 그 용어 자체에서도 변화된 것처럼 보인다. 주체의 분산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주제들은 더 이상 철학적 논쟁에 양분을 제공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칸트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여러 버전(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윤리에 이르기까지)의 입장으로의 이론적 회귀를 중개하는 정치(Politique)의 특정한 재 현재화(인권,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가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다. 칸트의 이런 재 현재화는 철학을 복권시키도록 해준다. 그리고 철학을 이데올로기적-상상적 효과로 축소시키는 “증후적 독해들”로부터 철학을 구하고, 따라서 “이성의 전체주의”(이런 관점에서 포스트칸트적 관념주의의 발전과 동일시된)를 피하면서, 다시 말해 역사적 과정의 지평선을 열어두면서 철학적 성찰이란 주제에 새로운 신빙성을 부여하도록 해준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의 책도 이런 경향과의 암묵적 대화를 해 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수준들에서 철학의 세 영역들을 참조해가며 진행될 것이다.

― 우선 칸트적 영역 자체: 라캉으로부터 시작해 우리는 잘못 알려진 칸트의 차원을 그의 재 현재화 안에서 연결하려 노력한다. 이 칸트의 진리는 사드이다. 그는 쾌락의 지령을 숨기는 불가능한 초자아적 명령의 칸트, 원초적 에 대한 그의 이론 안에서 쉘링에 의해 급진화된 칸트이다.

― 칸트 철학의 이 재 현재화의 영향 하에서 맑스는 오늘날 잊혀졌다. “전체주의”의 경험 후에 맑스로부터 무엇을 구해낼 것인가? 증후를 발명한 사람(라캉, “RSI”세미나)아 남는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지위에 대한, 환상과 증후의 관계 등에 대한 몇몇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

독사(doxa)에 따르면 분석철학은 헤겔의 가장 급진적 반대자처럼 지각된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헤겔적 변증법의 알려지지 않은 핵은 명백한 헤겔주의의 여러 버전들에서보다는 분석철학의 특정한 경향 안에서 더 작동한다(예를 들어 크립키Kripke의 반묘사주의antidescriptivisme).

이 삼중의 대화를 기반으로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은 정치-이데올로기적 영역의 라캉 이론의 윤곽을 대충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소위 “전체주의적” 현상을 진단하고 동시에 민주주의의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지위를 파악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는 라캉의 학설이 정치-이데올로기적 영역의 이론의 밑그림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밑그림들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현대 사상의 커다란 수수께끼들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의 해결은 다른 수수께끼의 해결과 일치할 것이다. 그것은 왜 라캉의 헤겔주의가 갖는 진정한 차원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는가?라는 것이다.

이 책은 자크-알랭 밀레르(Jacques-Alain Miller)의 지도 아래 진행되고 1985년 11월에 파리 8대학교의 정신분석학과에서 발표된 박사학위 논문인 “증후와 환상 사이의 철학”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 작업을 응원해 준 프로이트의 장(Champ freudien)의 그와 다른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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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étails sur le produit

L'animal que donc je suis de Jacques Derrida et Marie-Louise Mallet (19 janvier 2006)

 

 

나라는 동물

자크 데리다 지음

마리루이즈 말레 편집

남수인 옮김

 

역자: 스리즈 - 라 - 살 국제문화관(여기서는 간단히 스리지로 명명)에서 1997년에 열린 10일 간의 심포지엄에서 데리다가 발언한 강연록이다. 서문에서 편집자가 설명하고 있지만 데리다는 강연을 글로 완전히 작성하여 읽는다. 이 책의 I, II, III은 그렇게 작성된 강연록이고 마지막 IV만 간단한 메모에 의거한 즉석 강연이다. 우리는 번역에서 강연이지만 일반 철학에세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출판물이기 때문에 글로 취급하여 경어사용을 배제했다.

*** 우리 사전의 정의: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동물은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물, “길짐승, 날짐승, 물고기, 벌레, 사람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프랑스어로 animal[또는 bête]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이른다. 요컨대 animal을 동물이라고 옮기는 것은 엄밀히 말해 맞지 않을 것이나, 우리말에 이 동물이라는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는 듯하다. 데리다는 animal 대신에 bête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 animal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동물과 짐승은 완전 동의어가 아니다. 짐승은 날짐승과 길짐승, 네 발을 가진 몸에 털 난 동물, 바다 속에 사는 동물 가운데서는 포유류만 포함하므로, 즉 물고기, 벌레 등은 포함하지 않으므로 우리말로 짐승과 동물은 동의어가 아니다.

아쉬운 데로, 그리고 우리말에서도,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동물에 인간을 제외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므로 animal은 동물로, bête는 짐승으로, 동물의 동의어처럼 사용하여, 옮기기로 한다.

데리다가 독어(원어) 단어에 이어 프랑스어 단어로 다시 받아 주는 경우, 독어는 그대로 옮기고 프랑스어만 우리말로 번역했다.

편집자 서문

자크 데리다는 “동물”에 관해 쓴 자신의 텍스트들을 언젠가 합쳐서 큰 책 한 권으로 만들리라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 그 계획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더 바쁜 일들에 밀려서 그는 뒤로 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 그는 스리지-라-살 심포지엄의 제목을 “자서전적 동물”이라고 붙인 한 편, 강연을 위해 매우 긴 원고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10여 시간이라는 그 지속시간으로 볼 때, 강연원고라기보다는 세미나원고라 할만했다. 강연록 가운데 서문만 전체 강연에 붙인 제목인 <결국 나라는 동물>이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의 보고서록에 수록되어 출간 되었는데, 이 제목 밑의 “계속”이라는 표기는 나머지 부분도 출간될 의도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2003년 그에게 바쳐진 Cahier de L'Herne를 위한 미간 텍스트들 가운데 그는 이 강연의 끝 무렵에 위치하고 있던 한 편의 텍스트를 <만일 동물이 대답한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고자 선택한 바 있다.

그 자신이 강연 도중에 상기시키는 바이지만, “동물”의 문제는 그의 텍스트들 다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저작 작업에 집요하게 들어있는 이 동물 문제는 최소한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는 분명 철학에 의해 가장 무시된 또는 잊히어진 동물의 삶의 양상들에 대해 “동정”을 느끼는 어떤 적성, 강하고 각별한 감수성이다. 그로부터 제레미 반담이 동물들에 대해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Can they suffer?”라고 제기하는 문제에 그가 부여하는 크나큰 중요성이 오는 것이다. “문제는, 동물들이 이치를 따질 수 있는가?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다 - 라고 벤담은 말한다.” 이것은 겉보기에 단순하지만 자크 데리다에게는 매우 심오한 문제이다. 데리다는 그의 텍스트들에서 여러 번 이 문제에 되돌아온다. 그는 동물의 고통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 게다가 - 이것이 두 번째 원천이 되는데, 벤담에 의해 제기된 이 문제는 그에게 매우 큰 철학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고,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항구적이고 더없이 완고한 사유 전통을 우회적 경로의 비정면적인 대립에 의해 뒤집어 볼 호기로 보인다. 이 사유 전통은 인간을 zôon logon ekhon 또는 animal rationale로, 즉 “동물”로, 그러나 이성을 가진 동물로 정의할 때조차, 인간을 사실상 모든 나머지 동물류와 대립시켜서 인간 속의 모든 동물성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반대로 동물은 인간의 “고유성”인 것으로 간주된 것, 요컨대 “... 말, 이성, 죽음의 경험, 애도, 문화, 제도, 기술, 의복, 거짓말, 가식으로 가장하기, 흔적지우기, 기증, 웃음, 눈물, 존경 등”을 전혀 갖지 못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 속에 들어 살고 있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전통은 ‘이 모든 것’이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봤다”고 자크 데리다는 강조한다. 철학적 “로고스중심주의”는 통제의 입장과 불가분한 것으로 이것은 먼저 “동물에 관한 명제, ‘로고스’를 갖지 못한, ‘로고스’를 ‘가질-능력’을 갖지 못한 동물에 관한 명제이다. 요컨대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하이데거까지, 데카르트에게서 칸트와 레비나스와 라캉까지 유지되는 명제 또는 입장 혹은 선전제이다” 라고 또한 그는 쓰고 있다. 동물에게 가해진 폭력은 게다가 이 허위-개념인 “동물(l'animal)”과 함께, 단수로 사용된 이 단어로부터 시작된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지렁이에서 침팬지까지의 모든 동물들(tous les animaux)이 동질적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 전체에 근원적으로 “인간”이 대립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폭력에 대한 대응이기라도 하듯 그는 이 다른 단어 “l'animot(아니모)[+동물animal(아니말)+단어mot(모)-역자]”를 고안한다. 이 아니모는 단수에서 발음상으로 복수 “animaux(아니모)”를 들려주고 그래서 ‘아니말’[총칭적 동물-역자]이 지우고 있는 동물들의 무궁한 다양성을 상기시키며, 또한 필기된 “아니모”는 “l'animal”이란 단어가 정확히 하나의 “단어(mot)”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텍스트 내에서 이 “아니모”가 사용된 다양한 경우는 경고신호들, 경각심고취 같은 것으로서, 이 “아니말”이란 단어의 부득이한 단수로의 사용이 우리를 너무도 일상적이고 너무도 주목받지 못한 독단론적 수면 속에 잠기는 것을 막고자 한다.

끝으로, 이렇게 동물들을 박대한 철학적 전통에 대한 이러한 해체의 쟁점은 동물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해체는 전망의 단순한 전복을 이뤄내자는 것이 아니니, 예를 들어 “동물” 일반에다 이 철학적 전통이 동물에게서 항상 박탈해온 것을 복원시키고자 하거나 또는 전통적 대립에다 그보다 덜 허위적이지도 않은 무차별화의 혼동을 대입하고자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해체는 끊기 있게 차이점들을 수합해 보임으로써, 긴 세월 사람들이 “인간”과 “동물”의 전통적인 대립을 설립시키게 한다고 믿어왔던 그 “고유성”이라는 것의 추정된 경계선들에 내포된 취약성을, 다공성(多孔性)을 부상시키고자 한다. 이러는 와중에 해체는 동물 “일반”이 가진 “동물성”에의 확실성을 뒤흔들어 버리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확실성도 역시 뒤흔들어 놓는다. 자크 데리다가 애써 강조하듯이 “요체는 동물에게 이런 저런 능력을 주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인간이라 불리는 것이 인간이 동물에게 거부하는 점을 엄밀히 인간에게, 그러니까 결국 자신에게 부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순수하고 엄정하고 분할 불가능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나 하는가 검토해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동물”에 대한 문제가 그의 사유 속에서 그토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왜 그가 이에 대해 책을 펼 계획에 집착했는지 더욱 잘 이해를 한다. 만일 그에게 이 계획을 실현할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이 책이 어떤 것이 됐을 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게 됐으니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스리지의 대강연 원고 가운데 이미 출판된 바 있는 두 부분과 함께 아직 출판되지 않은 부분을 이 책 속에 합본함으로써 그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부분들은 두 가지 종류이다. 하나는 강연의 이미 출판된 두 절편 사이에 위치한 부분으로, 여기서 데리다는 플라톤에서 레비나스까지 “동물”에 관한 동일한 사유도식들에 되돌아와 “흔적을 따라가”듯 쫓아간다. 이 텍스트는 자크 데리다의 다른 모든 강연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의 세미나들에서의 발표들이 그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사소한 오타의 교정과 각주에 인용된 저작들에 대한 몇 가지 참조사항의 추가 (또는 참조사항에 대한 명확화) 이외에는 전혀 손질 없이 본래 상태로 편집됐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의 끝에 강연의 마지막 부분이 들어 있는 점인데, 여기서 하이데거 작품에 나타난 동물의 문제가 취급되고 있다. 이 텍스트의 위상은 다른 것들과 조금 달라서 출판에 몇 가지 특이한 문제점들을 제기한다. 강연은 1997년 7월 15일에 시작하여 이튿날까지 이어졌고 토론시간을 포함하여 9시간 이상 지속됐다..... 그리고 10일 간의 심포지엄은 예정돼 있었던 다른 강연들로 계속됐는데, 여전히 참석자들은 데리다를 더 듣고 싶어했다. 그의 강연 도중에 여러 번 언급된 하이데거에게서의 동물의 문제가 아직 논해지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결국 심포지엄의 마지막 날, 7월 20일 늦은 오후 자크 데리다는 이 기대를 받아들여 사전 준비 없이 즉흥 강연에 들어간다. 이 즉흥 강연은 사전에 작성된 원고 없이, 하이데거 작품들에서 참조한 페이지들에 대한 몇 가지 메모만을 중심으로 행해져서 이 강연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녹취물이 전부이다. 그러나 비록 즉흥적인 것이기는 해도 이 강연은 그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노선 가운데 하나를 구성하는 접근법으로서 출판물 속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녹취물을 최대한 충실히 문자화하여 여기에 수록한다. 즉흥 연설에서 피할 수 없이 행해지는 몇 가지 잘 못된 부분들만이 수정되었다. 우리는 입말을 나타내는 성질, 자주 쾌활함을 표시하는 친밀한 말투를 삭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단어들이나 마찬가지로 자주 의미를 담고 있는 그 어투의 많은 다양성들이 지문에서 피치 못하게 상실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발음된 모든 단어들을 정확히 글로 옮기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주의를 충분히 기울이면 충분하다), 리듬이나 침묵들, 구두기호의 역할을 하는 억양의 강세를 옮겨야 할 때면 어떤 해석(interprétation)이 가미되기 마련인데, 자크 데리다가 이 구두기호들에 얼마나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지는 잘 알려진 바다. 그러니 그 자신이 이 녹취물의 출판에 관여했다면 그는 분명히 이 초록, 그의 말을 빌리면 이 단순한 “실루엣”을 새로 썼으리라. 그러나 그가 상기 시키고 있듯이 하이데거에게서의 동물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그가 여러 텍스트들, 특히 <인간의 종국>, <Geschlecht종족>, <하이데거의 손>, <<정신론>>, <하이데거의 귀>, 그리고 <<논리적 궁지들Apories>>에서 취급하기 때문에, 이들을 읽거나 또는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만일 나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우리에게 함께 시간이 있었더라면 [...]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다...”. “만일 나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나는 보여줄 시도를 했을 텐데[...] 지금은 더 멀리 나갈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만일 그 부분까지 갈 시간이 우리에게 있게 되면 그 점에 대해 오래 이야기 했어야 할 것이다[...] 난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만일 나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이 텍스트 속에 든 현기증과 원환의 순간들에 대해 지적하고 강조했을 텐데. 이 점은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감탄부호를 나는 그 엄청난 담론을 통해 따라가 봤을 텐데. 나에게 시간과 힘이 있게 되면 그리 할 생각이고, 그러길 바란다 [...] 이 텍스트에 경의를 표하고 싶으니까...” 녹취를 옮긴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가지지 못한 시간에 대한 이 시간의 모티프가 계속 되돌아오는 것에 충격을 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티프는 오늘날 우리에게 조종(弔鐘)과 같은 토날리테를 띤다. 이 불안의 상황적인 이유(심포지엄이 종료되는 시점으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터라, 비록 청중이 더 많이 듣고 싶어 하지만 혹시 청중의 집중력을 지치게 할 지 모른다는 우려)를 넘어, 데리다의 친구들과 독자들은 목소리에 밴 매우 자주 들어본 불안과 번민, “떨림”을 감지한다. “만일 내게 시간과 힘이 있다면”: 거대한 작품이지만 이에 만족하기커녕, 그의 사유는 불확실한 앞-날à-venir을 향해, 그 무엇보다 우선 텍스트에, 테마에, 문제에, 모티프에, 주제화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에, 사건의 도래에 정당한 대우를 하기 위해 내닫는다... 더없이 엄밀하고 철저한 “해체”는 언제나 정확함보다는 이 정당함에의 배려에 의해 활력을 얻어왔다.

1997년 그에게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에 이미 오래 전부터, 1997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 매우 자주, 다음의 짧은 문장은 되돌아오고 있었다: [돌아보면] “인생은 너무나 짧았을 것이다.” 이 전미래는 이제 그 “절대 용법”을 발견하고 있다...

마리-루이즈 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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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rande étrangère : A propos de littérature de Michel Foucault, Philippe Artières, Jean-François Bert et Mathieu Potte-Bonneville (21 mars 2013)

      번역자: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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