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때 [홀로서기]의 충격이 생각나는 시인. [점등인의 별...]에서 다소 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된 것은 아마도 [홀로서기]의 감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눈오는 날]-->[사랑한다는 것으로] --->[홀로서기]의 순서로 감흥이 오래 남았다.

눈 오는 날엔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고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으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 주겠지만
우리들이 가진 스스로의 외로움을
불편해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 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그대는 아직 내 속의 그림자로 존재할 뿐
눈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내 시행착오의 부분들이
눈 처럼 쌓여, 발자국을 지운다.

지금의 눈이 허상이라고 인정해도
눈 녹은 물방울은 실체가 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나는 어디쯤 서야 하나.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면 이길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 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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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으로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
<홀로서기>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면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인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냄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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