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님의 시를 좋아하시나요? 이생진님의 시는 언제나 암울한 것 같으면서도 왠지 리듬이 좋고 의미심장해서 좋았다.
대학때 처음 님의 시를 보고서 시가 이리도 비장할 수 있구나. 자연(제주도와 그 바다)을 보면서 인생을 이리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전달하는 힘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이 멋진 표현들 하며....)
간결과 리듬 그리고 그 깊은 의미들을 느껴보시죠.
몇편 안되는 시지만 말입니다.
이생진님에 관한 것이야 인터넷에 다 있겠고....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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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바다 성산포1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에서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피운다
태양은 수만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대지 않는다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가 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술을 마실때도 바다옆에서 마신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소리에 귀를 찢기었다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어진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 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 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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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이생진
그렇게 넓은 우주공간에
그리도 많은 생물가운데에서
그리도 흔한 사람들 틈에
너는 여자
나는 남자로 태어나
까닭 모를 전쟁을
몇 번씩 치르고도
살아서 사랑한다는 사실
긴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재산
너와 내가 살아서
너와 내가 사랑한다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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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했던 세상
-이생진
누구나 한번쯤은 실망했던 세상을
그래도 달래가며 살아가는 것은 기특하다
어지러운 틈새로 봄이 순회처럼 들어오면
꾀꼬리 걱정을 하고
나뭇잎이 푸르르면 내 몸매도
유월로 차리던 사람
일시불을 꺼내주며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살라고 졸라도
살아가기 막막한 때가 있겠지만
월부를 꼬박꼬박 치르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그 누구의 노예로도 남아있길 부정하며
모르는 사이에 노예로도 살고
그 누구의 그리움에도 한번은 미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운 표정을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남이 보기엔 쓸모없는 누구일망정
옷깃을 여미며 꼿꼿이 예절을 바로 세워놓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생활이 하도 쓸쓸해서
시간을 피해 나와 서성거리다가도
다시 그 생활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털어놓고 보면
누구나 한번씩은 해보았을 자살미수
그래도 껄껄 웃다가 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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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는 바다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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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묘지
-이생진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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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상
-- 이생진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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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이생진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 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 내 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바다도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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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이생진
한 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 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시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 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 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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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이생진
섬에는 어딜 가나 동백이 있다
동백이 없는 섬은
동백을 심어야지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바위에 뿌리 박기에
못이 박혔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