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 마음의 칼 권성희 기자 | 12/10 12:03
선배 하나가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사업을 한다든가 하는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무척 놀랐다. 알고보니 그 선배는 직장생활하면서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을 통해 꾸준히 미국 책을 사서 읽었다. 그렇게 쌓인 책이 100권을 훌쩍 넘어섰다. 선배는 이 중에서 내용이 괜찮은 책을 추려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이 꿈이 출판사를 세우는 밑거름이 됐다.
1~2년전 TV 청소년 드라마에서 멋있는 대사 하나를 만났다. 가정 환경이 불운해서인지 주먹질이나 하면서 지내는 한 고등학교 학생이 있었다. 그를 진정 아끼는 친구가 해준 말이다. "사나이는 모두 가슴에 칼 한자루씩 품고 산다. 그런데 그 칼은 함부로 뽑아들면 안 된다. 진짜 필요할 때, 일생에 꼭 한 번쯤만 뽑아서 보여주는 거다."
칼이란 세상을 향한 한(恨) 혹은 분노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마음 속의 결심과 인내, 절제라고 받아들였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다는 식의 흔해빠진 무협소설이나 영화 스토리에 비유하자면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의 결심, 그 결심을 실현하기 위한 인내의 훈련, 유혹에 대항한 절제라고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거창하게 칼이랄 것은 없어도 응어리 하나씩은 갖고 살아 간다. 분하고 속상하고 더럽고 치사한 상황을 만나면서 쌓이는 응어리. 그러나 이 응어리가 다 칼이 되지는 못한다. 그저 혼잣말로 하는 욕이나 뒤에서 하는 흉보기, 또는 술 한잔이나 담배 한 대에 그냥 쓸려 버린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이루는 사람은, 응어리를 쓸어버리지 않고 칼로 키운다. 울분을 지금 당장 터뜨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 울분을 극복해 자신의 인생을 더 아름답고 맛있는 요리로 만들 수 있게 마음 속의 칼을 간다.
선배에게 출판사는 마음의 칼이 아니었을까. 직장생활하면서 '정말 못 참겠다' 싶은 일을 만날 때마다 그냥 '에이, 못 마땅해'라고 한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땅한 일'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칼로 책을 읽고 선정하고 준비했던 것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SF-공포소설 작가인 스티븐 킹의 자전적인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 출간)에 보면 킹의 마음의 칼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험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경비와 대형 세탁소 직원으로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SF와 공포소설에 대한 창작열이 있었다.
대부분의 범인은 이런 꿈이 있어도 이 꿈을 마음의 칼로 갈지 못한다. 그러나 킹은 세탁소 일이 끝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줄기차게 소설을 써서 몇번이고 잡지와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던 '캐리'란 소설이 성공하기까지 그는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소설가로서의 마음을 칼을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도 이제 막바지다. 지난해 이맘 때와 비교해 무엇이 변했는가. 마음의 칼을 부지런히 갈았다면 분명 뿌듯한, 아니면 최소한 이렇게 노력했지 하는 무엇인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칼을 갈지 않은 사람에게는 2001년이나 2002년이나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을 빼고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일 뿐이다.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