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야 너 아니냐 문학과지성 시인선 200
성민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내가 쌓아둔 해야할 많은 일들을 손대기 싫어서 한동안 하작하작대기만 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다만, 게을러서. 해야할 일이 바투 다가왔음에도 어떻게든 미루려하는 지독한 게으름이 생활을 곤란케 하고 더욱이 타인을 고달프게 하니 문제는 문제인데, 도통 바로잡아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리. 게다가 이 고약한 생활습관은 다른 무엇도 아닌 기질인 것을.

해야할 일이 쌓이고 쌓여서 산처럼 우뚝 솟아있을 때일수록 세상만사 다 잊고 마음내키는 대로, 그야말로 손 잡히는 대로 즐거움을 주는 책들을 읽고 싶다. 그리고 이 책도 포함된다.

성민엽, 정과리가 엮은 <詩야 너 아니냐>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101번째에서 199번째까지의 서시(序詩)만을 추려 내어 놓은 책이다. 서시는 그 시집이 어떤 류의 시들로 묶였는지,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도대체 무얼 주되게 말하고 싶었는지 헤아려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서시가 100편이나 실려있다. 시인들의 숫자만해도 76명이나 된다. 그래서 지레짐작으로 혼자 겁을 먹었다. 각기 다른 시인의 작품 열 몇 편 정도 소개하고 해설까지 덧붙여 있던 책과는 다르게, 너무 많은 작가들의 시들이 모여있어서 혼란스러움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이는 시인들이 너무나 극명하게 다른 각자가 추구하는 시세계가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겁을 먹었지만 많은 시인들이 수런수런하는 모양새가 그리 나쁘지 않고 오히려 추구하는 바가 정도의 차이이지 비슷하게 다가오고 오히려 많은 시인들을 접할 수 있어서도 좋기만 했다. 이는 애써 숨겨왔던 나의 무지몽매함이 볼가져서 창피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름조차 낯선 문인들이 대반사였기에. 나는 이제 이들의 시집을 하나하나 읽어갈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시의 힘을 믿는다. '바람을 일으키며/모든 걸 뒤바꾸꾸며' '돌연 한없는 꽃밭/코를 찌르는 향기/큰 꿈결 한바탕' '막힌 것들을 뚫으며/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무한 변신을 춤추며/밀려오는 게 무엇이냐/오 詩야 너 아니냐.'하고 정현종이 말한 것처럼 시는 그러하다. 더욱이 내게 시는 피폐하고 병든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고 고쳐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 죽-. 아래와 같은 경험으로 미루어.

바람에 사윈 불이 황량히 재로 남겨진 것을 보는 것처럼, 한동안 갈피를 못 잡겠더라. 그러던 중, 방황하던 초기에는 친구란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여기저기 여러 친구들에게 칭얼거리고 투정부리고 온갖 미운 모습을 많이 보였더랬다. 하도 지겹도록 해대니까 친구들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그만 둘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었던 게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낯 뜨겁게 하는 짓을 지칠 줄도 모르고 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결심하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그러면서 말하지 못한 내 속은 곪을 대로 곪아갔고, 비딱한 마음은 묘한 상실감에 시달려야했다. 그럴 때 내게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이 '시'더라. 답답해서 오래도록 문자에 눈길을 줄 수 없을 때, 그나마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이 시였다. 평소에는 잘 읽지도 않았던 시들을 방황으로 점철된 날들에 쉬엄쉬엄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읽었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고 따듯한 위로를 주었다.

그런 시들 가운데 이 시선집에도 있는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 각인되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그때만큼 절실하지 않을 텐데 신기하게도 지금 다시 보아도 새롭고 당시의 기분이 느껴진다. 그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곳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