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구) 문지 스펙트럼 12
이상 지음, 이경훈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이상의 작품 중에서 그나마 쉽다는 「날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본다. 「날개」의 '나'는 유곽임이 확실한 곳에서 볕도 들지 않고 옷도 없고 외출도 하지 않는, 무엇보다도 돈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이다. 전반부의 그는 아내가 매춘을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아내에게 돈이 있다는 것을 의아해하며 이러 저러한 것을 연구하고 발명하는 기이한 사내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그는 변화한다. '나'의 아내가 그에게 돈을 주면서 그의 사회성을 일깨우려고 하면서이다. 구체적으로는 그의 외출을 통해서이다.

아내가 준 돈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싶어서 외출을 한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가진 돈 5원을 주고서 이 유곽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잔다. 돈의 유용성을 깨친 것이다. 그는 지향없다고 했지만 외출시 찾아간 곳은 자본주의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이고 이광수의 '무정'에서 이형식이 감개무량(!)해 하던 경성역으로 향한다. 이전까지 볕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무기력하고 자아분열자적인 삶을 살아온 그였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발전도 변화도 없는 매춘의 장소에서 무기력하게 살아온 그는 외출을 통해 문명을 맛보면서 이제 더이상 유곽에서 살 수는 없었을 테다. 비록 문명으로 나온 삶이 어항의 금붕어처럼 개성이 상실된 채로 살아갈지라고 말이다.

어쨌든 「날개」의 나가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낮의 문명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다시 낮아지려고 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자본주의체제의 열쇠와도 같은 돈을 알려준, 자기에게 사회성을 일깨워준 ‘아내의 모가지’가 이제야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비록 아내가 감기약 대신에 수면제를 주었다는 의심이 계기가 되어서 어두침침한 방을 벗어난 것이지만, 이제는 아내가 증오의 아달린을 줬건, 사랑의 아스피린을 주었건 그건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에. 아내에게 돌아간다는 항목은 이미 배제된 선택사항이기에.

어떤 사회적인 활동 없이 낮잠을 자던 그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의 과거의 어떤 대단한 상처가 있었던 간에 그 상처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인가? 말조차 나오지 않았고 무시되기 일쑤였을 그가 목소리을 내어서 더듬더듬이라도 말을 내뱉을 수 있을 것인가? 삶의 시시함에 무력했다던 그가 삶에 대해 이제는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인가? 영양실조의 초라한 모습을 벗어 던지고 궁핍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인가? '나'는 한 번 일상의 그들과 섞여 보자고 하지만 이 완고한 선택도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못하다. 「날개」에서는 이제 한번 날아보자고 다짐하면서 끝맺지만 실제로 작가 이상의 삶을 통해 유추해보면 그는 추락할 것임에 분명하다. 문명의 아들이 되길 소망했던 이상이 본 것은 문명에 끼지 못한 우리 식민지 조선이었으며, 그가 겪은 바는 문명에서 개개인이 소멸되는 아픈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절망했던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이 자본주의가 더 견고해진 사회에서 또한 살고 있지 않나. 그가 느낀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흘렀지만 변함없이 자신이 가졌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현실에 처해있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지기 때문일 테다. 「날개」를 통해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이상의 좌절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 만으로도 읽을 만한 층분한 가치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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