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역사의 재발굴, 영화 실미도를 보고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오픈백과사전 분류 : 역사, 인물 > 우리나라 역사 > 근현대사
백과사전 참조 : 박정희, 북한

71년 8월 23일 서울이 발칵 뒤집힌다. 군복을 입은 신원을 알수 없는 24명의 무장요원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것이다. 공비침투라는 군당국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은 한바탕 전쟁의 공포에 휘말리게 된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군인과 총격전끝에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수류탄 자폭으로 끔찍한 최후를 마친다.

그러나 이들은 공비가 아닌 북한 주석궁 침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은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밝혀진다.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진실을 밝힐 기회도 없이 역사속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린다.

이들은 누구인가? 무엇때문에 김일성 주석궁을 목표로 하던 총부리를 청와대로 돌렸는가? 실종돼 버린 이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수 없는 것인가?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살아남은 자는 소대장 김방일씨와 경비병 5명등 기간요원 6명뿐이다.

실미도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극상을 일으켜야만 했을까? 김방일씨는 훈련요원들의 피비린내 나는 하극상 이후 상황까지 실미도 난동사건 전모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김방일씨를 만나 당시 사건의 전모와 특수부대의 실체에 대해 들어본다. 그는 먼저 희생된 기간요원과 훈련요원들의 명복을 빌었다.

기자는 '이제는 말할수 있다' 라는 MBC의 방송을 보고 이사건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서 특수부대 소대장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있다 살아남은 김방일씨를 만나보았다. 실미도에 대해서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김방일씨는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었을까?

"너무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사건을 가슴에 묻고 죽을때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사건이 왜곡되는 것을 이대로 두고 볼수가 없어서 이제는 밝혀야 할때가 되었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기자를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기자는 김방일씨를 만나 역사속에 묻혀버린 이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를 잘아는 친구를 통해서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건을 알리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3개월간의 집요한 설득끝에 그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회한이 북받쳐 오르는 듯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된다. 침투한 공비 31명중 29명이 사살된다. 한명은 자폭하고 김신조는 생포된다.

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하극상, 청와대행, 자폭과 함께 훈련원 31명은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이사건은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수 없는 오욕으로 남아있다. 30년전 실미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71년 8월23일 난동 당시 총알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요원은 모두 6명. 변소간에 숨어있거나 매트리스에 몸을 숨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실미도 최고 실무책임자인 소대장으로는 유일하게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김방일씨는 당시상황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끔찍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해도 이보다 더 처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훈련병들에 의해 피살된 기간요원들의 시신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머리가 으깨져 뇌수가 방안 천장과 벽에 흩어져 있는 현장을 보는 순간 차라리 내가 먼저 죽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들은 왜 기간요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며 청와대로 향하게 했는가?

"만들어만 놓고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상이나 받으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지적했다.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 받았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없이 버려진 684부대.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이 다가온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하였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

기간병이었던 김태수씨는 화장실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이틀전에 화장실 청소를 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황석종씨는 매트리스 속에 들어가 오른팔로 머리 모양을 해서 살았다. 훈련병들은 그가 위장한 팔을 머리로 알고 명중시키는 바람에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

만들어만 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3년 4개월이나 버려진 실미도 특수부대. 결국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전적으로 국가에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출 처 : [기타] 인터넷 : http://cafe.daum.net/big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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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의 어느날,
<바람난 가족>을 혼자 보러 갔다.
개봉 첫날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뒤늦게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바람난 가족>에 관한 영화평을 보다가
나름대로 생각한 부분을 정리해본다.


<바람난 가족>이 한국사회의 가족의 실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뷰티>와 비슷하다.
<바람난 가족>은 말그대로 가족들간의 소통이 단절된 매마른 가족상을 그린 영화다. .
특히 성에 대한 소통구조는 한국사회 가족들에겐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가정에서 대화의 주제로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 한껏 권위적일 법한 시어머니(윤여정 분)가 자신의 성적 경험을 아들, 며느리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털어놓는 장면은, 정말 충격이었다.

성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다 할법한 사이인 '부부' 간에도 소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영화는 그걸 여실하게 보여준다.
남편 주영작과 아내 은호정, 두 부부의 섹스 후 ... 아내 호정은 남편과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자 자위행위를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충격이었다.
서로간의 대화가 없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대사...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 몸이 변한걸까. 예전엔 안그랬는데..."호정이 말했다.
영작은 "맘 변한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몸변했다는 얘긴 처음이다"라고.

그리고 입양한 아이의 비극적 죽음...
두 사람의 이혼...
모두가 언해피의 연속이다.
바람난 가족의 끝은 불행인 것일까.

하지만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모든 가족들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진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의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바로 서로에게 정말 솔직해지는 것이다. 자기 삶을 똑바로 살아가야 하고, 그리고 ... 그것을 토대로 서로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예전에 영화보고서 사이월드에 써놨던 감상글을 퍼왔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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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셋이 모이면 세상이 바뀐다"

극작/연출: 김인경
 극       단: 우금치



 




 

 

 

 

 

 


 



전통 마당극의 단골 등장인물인  삼신 할미가 무대에 등장해, 새로 세상밖으로 나갈 6명의 아이들에게 각각 성별을 결정해줄 찰라, 극이 시작됐다.

의성문화회관에 오랜만에 좋은 재밌는 마당극이 올려졌다. 극단 우금치의 "북어가 끓이는 해장국"이다. 대전에서 민족극운동을 펼쳐온 우금치. 재작년이던가? 성주 민족극한마당에서 노인문제를 다룬 '쪽빛황혼'을 본 이후 두번째 보는 작품이다. 

아이들은 각각 고추(남자아이)와 사과(?, 여자아이)를 부여받는다. 그 중에 여자 아이가 "나는 여자로 태어나기 싫어요"하며  자신이 차별받으며 살아왔던 전생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며 삼신할미에게 대항한다. 삼신할미는 요즘은 "남녀평등이나 여성상위 시대다 하면서 여자들도 살기 좋아졌다며 다시 한번 여자로 살아보거라"하며 설득하는데...

"이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 그것에 대해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얼마전 직장내에서 차별문제로 골머리를 썪이던 내 경우를 생각하면 이번 마당극은 조금이나마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공연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할머니, 아주머니 관객들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남성관객들도 한번쯤은 생활 깊숙이 스며있는 남성위주의 문화, 성차별적인 문화가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극을 통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극에서는 세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한 쌍은 맞벌이 부부, 또다른 한쌍은 중산층의 딸부잣집, 나머지 한쌍은 부인이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겨우  살아가는 부부. 이들 세부부가 일상에서 겪는 사례들을 현대사회에서의 '남녀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밀도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극을 위해 약간은 과장된 면도 있지만 말이다.

극에서 보여주는 남녀차별의 사례는 대충 다섯가지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맞벌이 부부의 아침 출근 장면을 유재길과 이미경을 통해 보여준다. 풍물과 마임, 절제된 대사를 통해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여자들에게 편중되어 있는 가사노동을 표현했다.

황말녀와 그 남편, 그리고 그의 시어머니가 등장하는 중산층의 딸부잣집으로 마당이 바뀌고,아들을 낳기 위해 비상식적인 행위까지 마다 않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딸만 넷을 낳은 황말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성화에 못이겨 온몸을 갖가지 기자도구로 치장하고, 돌부처의 코를 갈아먹고, 아미타삽신교라는 사이비 교주를 찾아 아들 낳기를 빈다. 

'북어와 여자는 사흘에 한번 패야한다'?는 통설이 심심찮게 얘기되는 현실을 슈퍼댁과 그 남편을 통해 보여주는데. 남편의 폭력에 의해 무기력해지는 아내들의 의식을 고발한다. 백수건달 백만수, 슈퍼마쳇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얹혀살면서도 남편이라는 권위를 이용, 폭행을 일삼는 반면, 슈퍼댁은 여자이기 때문에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고 모든 것을 인내한다.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직장내에서의 남녀차별문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직장내 성차별과 기혼여성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압력.

대충 뽑아놓은 남녀차별의 사례가 당하는 여성들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지많은 않은 문제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면, 제도나 문화가 바뀌어야 할 부분도 있고, 의식이 개혁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하는 여성들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깨닫고, 서로 연대해야 남자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이 극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서로 다른 처지에 속해있어서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던 여자들이 동류의식을 확인하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뭉치게 된다. 바로 주부 파업으로~ 아내들이 사라지자 남성들이 집안 가사일이며, 아이들 돌보는 문제 등을 떠안게 되는데. 이에 반해 남자들의 연대의식은  거미줄 처럼 너무나 강고하게 얽혀 있다. 한번 틈이 생기면 더 똘똘 뭉쳐진다.  같은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군대 등등. 


무대위에 권투링이 둘러쳐지고, 결론부분에 도달해 남여 격돌이 벌어진다. 끝까지 버티는 여성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남성.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전선이 그어진 채 목소리를 높이는 남성과 여성. 계속되는 대립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대화로 상대방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데... 극은 화해모드로 바뀌고 대동놀이로 남성과 여성과의 대화타협으로 끝을 맺는다.  

중간중간 관객들을 끌어들여 객을 극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장면은 마당극이 갖을 수 있는 묘미였다. 이런 현실비판 의식을 극을 통해 보여주는 것 자체가 마당극의 운동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번 극을 통해 거창하게 여성해방을 얘기하진 말자.  "여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 , "남성으로서 이해하고 양보하기"라는 명제라도 각자가 깨닫고 간다면 이번 극은 성공이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나 관객 입장에서 말이다.

* 2003년 12월 20일, 의성문화회관에서 "북어가 끓이는 해장국"을 봤습니다.
 토요일 오후고, 당직서던 날이라 취재겸 마당극을 보러 갔었는데,  공연장에 들어서니 문화지킴이의 은영과 그의 후배 지민, 그리고 민속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언니(갑자기 이름 생각이 안나네요)가 와있더군요. 의외의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봤던 공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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