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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안경점을 찾아가는 길이다. 매일 지나가다 한번씩은 봐오던 광명당 안경점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걸어오는 동안 내내 해오던 '눈작업(?)'을 멈췄다. 안경을 낀 사람과 끼지 않은 사람이 얼추 비슷한 숫자다. 아마도 안경사들은 이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지 않을까?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한 부류는 안경을 낀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최근 TV나 컴퓨터 등의 영상매체가 발달하면서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안경착용자가 연평균 30%이상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충격을 던져주기도 한다. 수치적으로도 가히 '안경공화국'으로 불릴 만하다.
* 46년간, 2대째 이어온 광명당
'안경공화국'의 원로장관, 광명당 안경원의 주인 권영화(57세)씨. 권영화씨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올해로 28년째 대석동에서 안경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권영화씨가 아버지로부터 안경점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에서 농경영을 전공하고 몇 해 동안 직장을 다닌 후의 일이다. 집안에서 장남인데다 다른 남자형제도 없고, 아버지의 나이도 점점 많아지셔서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권영화씨의 아버지이신 권상찰씨는 6·25 전쟁이 끝나고, 안동에서 53년부터 가판으로 안경점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생계를 잇기 위해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래서 택한 것이 안경점이었다. 그 당시 안경점은 요즘의 벤쳐기업처럼 신생업종이었다. 지금 안동에는 스무 군데가 넘는 안경점이 있지만, 그 당시 안동에 있던 안경점은 광명당 안경점을 비롯해, 조광당과 부종대 신발 옆에 있던 안경점까지 세 군데가 전부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두 군데 모두 없어지고 광명당 안경점만 남아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어른이 안경에 대한 공부를 하거나 교육을 받은 건 없었지만, 주위에 안경을 잘 맞춘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다 경험을 쌓아가며 한 거지요. 제눈에 안경이라고, 끼는 사람 눈에 맞으면 도수가 맞는 거고, 물론 손님에게 안경상식에 대해 잘못 얘기해준 적도 있었겠지요." 하며 권영화씨는 당시 안경산업이 태동하던 초기, 아버님이 안경점을 운영하시던 때를 되새겼다.
학생들이 하나 둘 안경을 쓰기 시작할 무렵인 1971년 이전까지 아버지의 안경점을 몇 년 거들던 권영화씨는 광명당 안경점을 본격적으로 물려받았다. 아버님가 안경 맞추시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토대로, 전문지식을 쌓을 필요를 느껴 눈에 관한 의학서적들을 보면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당시 안동에는 동방안경점을 비롯하여 여러 안경점들이 잇따라 생겼는데, 모두들 안경업계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안경점을 개업했다.
요즘은 대학에 안경광학과가 전문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있지만 당시엔 70년대초가 되면서야 비로소 안경사협회라는 민간단체가 결성되어 안경사 자격시험이 마련됐고, 그 이후 정부공인 안경사자격증이 통용됐다.
* 광명당을 찾는 단골손님들
상호에서 엿볼 수 있듯 부자(父子)의 일대기가 담긴 광명당 안경점은 대형화, 현대화되어가는 안경점과는 뭔가 다르다. 규모면으로도 잘 나가는 안경점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고정고객이 많다는 게 큰 차이다. 다음 일화를 들어보자.
어느날, 눈이 상당히 나쁜 여학생이 광명당을 찾아왔다고 한다. 다른 안경점에서도 여러번 안경을 맞췄으나 눈에 맞지 않아서 광명당을 찾은 것이다. 안경을 여러 방법으로 거푸 맞춰줬지만 눈에 맞지않아 여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고심한 끝에 안경을 맞춰줬더니, 여학생은 '잘 보인다'며 감사인사를 하고 갔다. 마지막에야 그 여학생이 원시와 난시가 겹친 특이한 안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 여학생의 눈에 맞는 안경을 맞춰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데서 다 안되는데 안경알 몇 개 버려도 내가 그 여학생한테 도움이 됐다니 기분 좋은 일이었지."
주변에 제 때에 시력 교정을 하지 않았거나 안경을 끼지 않아 표정을 찡그려가며 안보이는 걸 애써 보려다 어른이 돼서까지 찡그린 표정을 가지게 된 이를 볼 수 있다. 혹은 근시가 심해서 멀리 있어서 안보이는 걸 아예 포기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다 보면,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예도 볼 수 있다. 안약자가 눈에 맞는 안경을 선택하는 것은 착용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고, 안경사에게도 보람된 일이다. 광명당 안경원에 단골손님이 많은 것은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권영화씨의 자세 때문이 아닐까.
*권영화씨의 안경에 관한 소신
권영화씨가 젊었을 때는 학생손님이 주류를 이뤘지만 요즘 광명당을 찾는 손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요즘 손님이 많이 줄었지요. 아내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부터는 가게에 신경도 못쓰고…,
그래도 예전 손님들이 오거나 하면 바둑도 두고 하지요."라며 가슴아픈 사연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스레 말했다. 그 사연은 이미 10여년전 일이라고 한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지금은 간병인을 구해 아내를 집안에서 치료하고 있다.
권영화씨 부부는 슬하에 세자녀를 뒀다. 이제 모두 장성해, 얼마후면 큰 아들이 장가를 간다. 자녀들도 모두 안경을 끼는데, 좋은 안경으로 자신이 손수 맞춰줬노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요즘 나오는 싸구려 안경은 잘 깨지진 않지만, 코팅처리가 덜 돼 있어서 흠집이 잘 나. 우선 싸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안경은 우리 몸에서도 특히 민감한, 눈에 착용하기 때문에 좋은 걸 선택해야지요."
강의시간외에는 평소엔 잘 쓰지 않는데, 모처럼 쓴 안경을 벗을 수 밖에 없었다. 좌우 시력이 다르고 근시가 있어 일 년전쯤 단돈 2만원을 주고 안경을 맞춘 적이 있다. 온통 흠집이 나있는 내 안경을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해서다.
안경은 시력이 나쁜 사람을 위해 사용되는 의료기구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와 관련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안경에 대해 잘 알고 구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사람들은 안경점에서 권하는 대로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안경 착용자들은 안경을 의료기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왕이면 자신의 개성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 요즘의 안경구매 패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저가 안경과 국내 소비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켈빈 클라인이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카르띠에 등의 고급 수입으로 상품이 판매의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돌안경에서 김구선생 안경까지
안경광학이 어느 정도 발달하게 되자, 사람들은 안경에도 멋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안경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일명 '돌안경'이라고 하는 안경이 있었다. 권영화씨는,
"예전에는 플라스틱이나 유리도 흔하지 않았고, 요즘처럼 안경기계도 없었어요. 그때는 돌을 일일이 손으로 갈아서 안경알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경값도 비쌌고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기 어려웠지…"
라고 말한다.
돌안경이라 불려지는 '경주 남석안경'은 경주 남산에서 캐낸 수정을 가공해서 만든 안경알로, 유리렌즈에 비해 온도에 따른 변화가 적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줬다. 그러나 6.25 이후 서구식 안경의 대량 보급으로 가격경쟁에서 뒤떨어지고 경주 남산 국립공원의 수정 채굴이 불가능해져 지금은 맥이 끊기게 됐다.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안경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안경이다. 학봉선생의 안경은 테는 대모(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어졌고 귀에 거는 끈이 원래는 쪽빛실이었으나 끈이 떨어져 밤색 헝겊을 박아 달아놓았다. 코의 경첩은 놋쇠로 만들어 뒷면에 부착하고 앞판 장식이나 못은 구리로, 부러진 안쪽 안경 귀는 놋쇠로 보수되어 있다.
학봉선생이 쓴 안경보다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우각대못 실다리 안경'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재질은 쇠뿔이며 비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안경집은 대나무를 파서 조롱박 형태로 만든 것이다. 장식은 세련된 칠보문이 투각된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옛 안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여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중국을 통해 전래되던 안경이 우리나라에서도 1600년대 초 경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안경으로 정조(正祖)가 썼던 옥안경을 들 수 있다. 이 안경은 다리는 실로, 테는 옥으로 만들어져 매우 동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 속옷회사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내놓은 옥재질의 속옷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왕족만이 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심한 근시라 안경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쓴 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일제시대로 넘어가면 안경도 시대별로 유행을 탄다. 권영화씨는,
"김구 선생님 안경 알지? 김구 선생이 쓴, 알이 동그란 안경은 당시에 유리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이야. 6·25 이후에는 맥아더 장군이 쓰던 안경이 유행했지. 그리고 그 이후로 마비스, 아랑 안경 등이 나왔고."
라며 시대별로 유행한 안경에 대해 열거했다.
안경패션도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일까? 20세기말, 현재 유행하는 안경에서 다음 세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읽게 될까? 한 시대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시대 문화는 사람들의 삶살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눈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권영화씨도 그러할 것이다. 눈에 대해선 어떤 사람에게든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권영화씨는 사람들이 '눈이 왜 나빠지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근시가 왜 생기냐면, 너무 한 곳만, 바로 앞만 오래 보고 살아서 그래. 멀리 있는 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해야 눈이 건강한 거지요. 간단하지요.?"
과학잡지의 Q&A처럼 명쾌하게 답한다.
권영화씨 말처럼 '안경공화국'은 단지 시력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바로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적 현실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내 앞에만 머무는 눈을 이제 내곁의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세상을 바래본다.
===============================================================================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안경은 학봉 김성일의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각대못 실다리 안경'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질이 쇠뿔이며 비껴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장식으로 세련된 칠보문이 투각되어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옛안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안경으로 정조가 썼던 옥안경을 들수 있고 일제시대로 넘어가면 유리산업의 발달로 김구선생이 썼던 동그란 유리제품의 안경이 나온다.
<이향미/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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