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모임 안동 [65호]            <안동의 터줏대감> 안동안경공화국의 원로, 광명당 안경점
 
 

안동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안경점을 찾아가는 길이다. 매일 지나가다 한번씩은 봐오던 광명당 안경점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걸어오는 동안 내내 해오던 '눈작업(?)'을 멈췄다. 안경을 낀 사람과 끼지 않은 사람이 얼추 비슷한 숫자다. 아마도 안경사들은 이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지 않을까?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한 부류는 안경을 낀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최근 TV나 컴퓨터 등의 영상매체가 발달하면서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안경착용자가 연평균 30%이상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충격을 던져주기도 한다. 수치적으로도 가히 '안경공화국'으로 불릴 만하다.

* 46년간, 2대째 이어온 광명당

'안경공화국'의 원로장관, 광명당 안경원의 주인 권영화(57세)씨. 권영화씨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올해로 28년째 대석동에서 안경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권영화씨가 아버지로부터 안경점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에서 농경영을 전공하고 몇 해 동안 직장을 다닌 후의 일이다. 집안에서 장남인데다 다른 남자형제도 없고, 아버지의 나이도 점점 많아지셔서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권영화씨의 아버지이신 권상찰씨는 6·25 전쟁이 끝나고, 안동에서 53년부터 가판으로 안경점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생계를 잇기 위해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래서 택한 것이 안경점이었다. 그 당시 안경점은 요즘의 벤쳐기업처럼 신생업종이었다. 지금 안동에는 스무 군데가 넘는 안경점이 있지만, 그 당시 안동에 있던 안경점은 광명당 안경점을 비롯해, 조광당과 부종대 신발 옆에 있던 안경점까지 세 군데가 전부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두 군데 모두 없어지고 광명당 안경점만 남아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어른이 안경에 대한 공부를 하거나 교육을 받은 건 없었지만, 주위에 안경을 잘 맞춘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다 경험을 쌓아가며 한 거지요. 제눈에 안경이라고, 끼는 사람 눈에 맞으면 도수가 맞는 거고, 물론 손님에게 안경상식에 대해 잘못 얘기해준 적도 있었겠지요."
하며 권영화씨는 당시 안경산업이 태동하던 초기, 아버님이 안경점을 운영하시던 때를 되새겼다.

학생들이 하나 둘 안경을 쓰기 시작할 무렵인 1971년 이전까지 아버지의 안경점을 몇 년 거들던 권영화씨는 광명당 안경점을 본격적으로 물려받았다. 아버님가 안경 맞추시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토대로, 전문지식을 쌓을 필요를 느껴 눈에 관한 의학서적들을 보면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당시 안동에는 동방안경점을 비롯하여 여러 안경점들이 잇따라 생겼는데, 모두들 안경업계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안경점을 개업했다.

요즘은 대학에 안경광학과가 전문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있지만 당시엔 70년대초가 되면서야 비로소 안경사협회라는 민간단체가 결성되어 안경사 자격시험이 마련됐고, 그 이후 정부공인 안경사자격증이 통용됐다.

* 광명당을 찾는 단골손님들

상호에서 엿볼 수 있듯 부자(父子)의 일대기가 담긴 광명당 안경점은 대형화, 현대화되어가는 안경점과는 뭔가 다르다. 규모면으로도 잘 나가는 안경점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고정고객이 많다는 게 큰 차이다. 다음 일화를 들어보자.

어느날, 눈이 상당히 나쁜 여학생이 광명당을 찾아왔다고 한다. 다른 안경점에서도 여러번 안경을 맞췄으나 눈에 맞지 않아서 광명당을 찾은 것이다. 안경을 여러 방법으로 거푸 맞춰줬지만 눈에 맞지않아 여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고심한 끝에 안경을 맞춰줬더니, 여학생은 '잘 보인다'며 감사인사를 하고 갔다. 마지막에야 그 여학생이 원시와 난시가 겹친 특이한 안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 여학생의 눈에 맞는 안경을 맞춰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데서 다 안되는데 안경알 몇 개 버려도 내가 그 여학생한테 도움이 됐다니 기분 좋은 일이었지."

주변에 제 때에 시력 교정을 하지 않았거나 안경을 끼지 않아 표정을 찡그려가며 안보이는 걸 애써 보려다 어른이 돼서까지 찡그린 표정을 가지게 된 이를 볼 수 있다. 혹은 근시가 심해서 멀리 있어서 안보이는 걸 아예 포기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다 보면,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예도 볼 수 있다. 안약자가 눈에 맞는 안경을 선택하는 것은 착용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고, 안경사에게도 보람된 일이다. 광명당 안경원에 단골손님이 많은 것은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권영화씨의 자세 때문이 아닐까.

*권영화씨의 안경에 관한 소신

권영화씨가 젊었을 때는 학생손님이 주류를 이뤘지만 요즘 광명당을 찾는 손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요즘 손님이 많이 줄었지요. 아내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부터는 가게에 신경도 못쓰고…,

그래도 예전 손님들이 오거나 하면 바둑도 두고 하지요."라며 가슴아픈 사연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스레 말했다. 그 사연은 이미 10여년전 일이라고 한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지금은 간병인을 구해 아내를 집안에서 치료하고 있다.

권영화씨 부부는 슬하에 세자녀를 뒀다. 이제 모두 장성해, 얼마후면 큰 아들이 장가를 간다. 자녀들도 모두 안경을 끼는데, 좋은 안경으로 자신이 손수 맞춰줬노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요즘 나오는 싸구려 안경은 잘 깨지진 않지만, 코팅처리가 덜 돼 있어서 흠집이 잘 나. 우선 싸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안경은 우리 몸에서도 특히 민감한, 눈에 착용하기 때문에 좋은 걸 선택해야지요."

강의시간외에는 평소엔 잘 쓰지 않는데, 모처럼 쓴 안경을 벗을 수 밖에 없었다. 좌우 시력이 다르고 근시가 있어 일 년전쯤 단돈 2만원을 주고 안경을 맞춘 적이 있다. 온통 흠집이 나있는 내 안경을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해서다.

안경은 시력이 나쁜 사람을 위해 사용되는 의료기구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와 관련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안경에 대해 잘 알고 구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사람들은 안경점에서 권하는 대로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안경 착용자들은 안경을 의료기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왕이면 자신의 개성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 요즘의 안경구매 패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저가 안경과 국내 소비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켈빈 클라인이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카르띠에 등의 고급 수입으로 상품이 판매의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돌안경에서 김구선생 안경까지

안경광학이 어느 정도 발달하게 되자, 사람들은 안경에도 멋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안경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일명 '돌안경'이라고 하는 안경이 있었다. 권영화씨는,

"예전에는 플라스틱이나 유리도 흔하지 않았고, 요즘처럼 안경기계도 없었어요. 그때는 돌을 일일이 손으로 갈아서 안경알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경값도 비쌌고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기 어려웠지…"

라고 말한다.

돌안경이라 불려지는 '경주 남석안경'은 경주 남산에서 캐낸 수정을 가공해서 만든 안경알로, 유리렌즈에 비해 온도에 따른 변화가 적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줬다. 그러나 6.25 이후 서구식 안경의 대량 보급으로 가격경쟁에서 뒤떨어지고 경주 남산 국립공원의 수정 채굴이 불가능해져 지금은 맥이 끊기게 됐다.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안경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안경이다. 학봉선생의 안경은 테는 대모(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어졌고 귀에 거는 끈이 원래는 쪽빛실이었으나 끈이 떨어져 밤색 헝겊을 박아 달아놓았다. 코의 경첩은 놋쇠로 만들어 뒷면에 부착하고 앞판 장식이나 못은 구리로, 부러진 안쪽 안경 귀는 놋쇠로 보수되어 있다.

학봉선생이 쓴 안경보다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우각대못 실다리 안경'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재질은 쇠뿔이며 비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안경집은 대나무를 파서 조롱박 형태로 만든 것이다. 장식은 세련된 칠보문이 투각된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옛 안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여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중국을 통해 전래되던 안경이 우리나라에서도 1600년대 초 경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안경으로 정조(正祖)가 썼던 옥안경을 들 수 있다. 이 안경은 다리는 실로, 테는 옥으로 만들어져 매우 동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 속옷회사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내놓은 옥재질의 속옷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왕족만이 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심한 근시라 안경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쓴 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일제시대로 넘어가면 안경도 시대별로 유행을 탄다. 권영화씨는,

"김구 선생님 안경 알지? 김구 선생이 쓴, 알이 동그란 안경은 당시에 유리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이야. 6·25 이후에는 맥아더 장군이 쓰던 안경이 유행했지. 그리고 그 이후로 마비스, 아랑 안경 등이 나왔고."

라며 시대별로 유행한 안경에 대해 열거했다.

안경패션도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일까? 20세기말, 현재 유행하는 안경에서 다음 세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읽게 될까? 한 시대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시대 문화는 사람들의 삶살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눈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권영화씨도 그러할 것이다. 눈에 대해선 어떤 사람에게든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권영화씨는 사람들이 '눈이 왜 나빠지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근시가 왜 생기냐면, 너무 한 곳만, 바로 앞만 오래 보고 살아서 그래. 멀리 있는 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해야 눈이 건강한 거지요. 간단하지요.?"

과학잡지의 Q&A처럼 명쾌하게 답한다.

권영화씨 말처럼 '안경공화국'은 단지 시력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바로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적 현실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내 앞에만 머무는 눈을 이제 내곁의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세상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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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안경은 학봉 김성일의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각대못 실다리 안경'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질이 쇠뿔이며 비껴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장식으로 세련된 칠보문이 투각되어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옛안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안경으로 정조가 썼던 옥안경을 들수 있고 일제시대로 넘어가면 유리산업의 발달로 김구선생이 썼던 동그란 유리제품의 안경이 나온다.

<이향미/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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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모임 안동 [64호]           안동의 터줏대감- 안동초등학교 골목 옹기전

 
 


                                                                                                                                              글/이향미(객원기자)


숨쉬는 그릇 옹기를 찾아서

김치, 고추장, 된장, 젓갈,… 대표적인 우리의 먹거리다. 이런 음식은 여러날 동안 저장하면서 맛을 숙성시켜야 하는 발효식품이다. 발효식품은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담는 그릇이 좋아야 한다.

발효식품을 제맛 그대로 보관하기에는 공기가 적절히 통하는 옹기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야말로 숨쉬는 그릇이 바로 옹기다. 안동 사람들은 김치를 일러 짠지라 불렀다. 안동 사람들의 겨울철 부식이었던 짠지를 보관했던 옹기, 안동 짠지의 맛을 내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옹기는 도대체 뉘 손을 거쳐 우리들 마당까지 들어왔을까?  이번 사랑방 터줏대감은 안동에서 가장 오래된 옹기전과 옹기장수이다.

안동초등학교와 대안당 약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오다 보면 장식용인지 판매용인지 모를만큼 옹기 몇 개가 슈퍼앞에 놓여있다. 간판도 달지 않은 그 가게는 슈퍼마켓이라고 해야할 만큼 옹기전으로는 궁색하기만 하다.

나중에야 안동 장날 만난 어느 아주머니에게서 안동에서 옹기전하면 지금 이곳을꼽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코카콜라가 청량음료의 대표적인 이름이 됐듯이 이곳은 달리 간판이 없이 '안동국민학교 골목 옹기전'으로 안동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곳이다.

예순일곱의 옹기장수 42년 세월

주인 아저씨와 채 인사도 나누기 전에 이웃에서 가게를 하는 아저씨 한 분이 찾아왔다. 그는 옹기전의 주인 우병두(67)씨를 이렇게 소개했다. '옹기를 인 듯 한번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살아온 옹기장수'라고.

"언제부터 옹기장수를 하셨어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회상의 열차를 타기 위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그가 담배를 피는 동안 가게 앞으로 놓인 몇 안되는 옹기로 눈을 돌렸다.

초가을 볕이 가게 앞으로 늘어선 옹기들의 어깨죽지를 비춰 마치 검게 그을린 아낙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낙네는 가득 채운 물동이가 새지 않도록 곧장 앞만 보고 걷는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고 보니, 그 이웃 아저씨가 우병두씨를 소개했던 말에 뼈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스물 여섯 살 나이로 옹기를 팔기 시작했다는 그는 어느새 예순 일곱의 노장이다. 횟수로 42년째 옹기를 팔았고, 그 돈으로 5남매를 키웠다고 한다.우병두씨는 미군강점기때인 1948년부터 옹기를 팔기 시작해 안동이 읍으로 승격되고부터는 제법 옹기전을 크게 벌일 수 있었다.

스물여섯의 나이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신시장 대신새마을 금고 자리다. 그리고 지금의 신시장 어물도가니에서 개인장사를 처음 시작해 서부동 서울막창 자리, 당북동 교육청 자리를 전전하다 지금 안동초등학교 앞에서는 20년째 옹기전을 해오고 있다.

우병두씨는 이제 슈퍼마켓 주인으로 전업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옹기장사가 하도 안돼 한 6년 전부터 슈퍼를 같이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옹기전에 거는 기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주객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규모가 꽤 컸다고 한다. 가게 주위가 모두 빈 공터였는데 옹기전을 마주보고 있는 삼영장 여관이 들어서기 전, 그 땅도 크고 작은 옹기들이 가정집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렸던 곳이란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궁색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건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옥상에는 그야말로 예전의 옹기전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옹기들이 옥상의 낮은 담장 주위로 몰려 있었다.

"요거는 버지기고, 요거는 장담는 단지시더. 보통 장단지는 식구수대로 들루치."

장독을 식구 수에 맞춰 적당한 것을 고르듯이 독은 크기에 따라 나뉜다. 반자리 독, 다섯 개 한자리 독, 여섯 개 한자리 독…설명을 들으며 어릴 적 우리집 장독을 연상해본다.대문짝처럼 뚱뚱했고, 뒤꿈치를 들어 장독 입구에 겨우 머리를 대고 깜깜한 곳으로 더듬더듬 손을 넣어 된장을 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외의 부엌살림들, 예전엔 대부분의 부엌살림이 옹기였다. 뚝배기, 간장병, 시루, 화로,주전자, 젓갈 동이, 소래기, 물동이, 물장군, 약탕기...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이 곳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인분을 지고 나르던 거름장군도 옹기였다고 한다.


옹기광택제 '광명단'

"그럼 좋은 옹기는 어떤 거예요?"옹기 장수에게 옹기 고르는 법한번 배워보자. 옹기는 문을 두드리듯, 독을 손으로 퉁기면 '뚜앙 뚜앙'하고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튼튼하다. 그리고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새지 않는다. 표면이 매끄럽다고 해서, 표면이 반짝이는 것은 좋지 않다.

옹기 표면이 반짝거리는 것은 '광명단'이라고 하는 광택제를 사용한 것이다. 광명단은 옹기에 광택을 내기 위해 굽고 나서 옹기 표면에 덧칠하는 화학약품으로, 납성분이 들어 있어서 사람 몸에는 해롭다고 한다.

"버섯도 화려한 것이 독버섯이듯이 옹기도 마찬가지시더. 사람도 겉만 번듯하면 안되는 것맨치로."

광명단은 조선시대 말경부터 일제시대까지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쓰여졌다. 페인트의 원료로 광명단을 섞으면 윤기가 좋아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땔감이 덜 들어가 이윤을 높일 수 있다.

그렇지만 광명단의 납성분으로 음식물에 독이 녹아들기도 하고 옹기의 숨구멍이 막혀버려 음식이 자연스럽게 발효되는 것을 막는다. 이 광명단 때문에 전통옹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대부분 몰락해 버리고 몇몇만이 남아 전통옹기의 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옹기굴 사라지고, 일년에 서너개 파는게 고작


"옹기장사는 70년대까지는 잘 됐지요. 80년대 들어서는 플라스틱이 나오이께네 사양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지요. 안동인근으로 옹기굴이 완전히 없어진 거도 한 10년이 넘어요"

안동인근의 옹기굴은 임하, 신석, 예곡, 명동, 풍산 등지에 있었다. 그러나 우병두씨 말대로 안동인근의 옹기굴은 모두 사라진지 오래다. 안동 외곽으로 나가면 진보에 옹기굴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진보에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옹기장이 이무남씨가 진보옹기를 면면히 잇고 있다.옹기는 운반하는 과정에서 깨지기 일쑤다. 그래서 웬만큼 튼튼한 놈이 아니면 안된다. 그래서 우병두씨는 기술이 좋은 옹기장이 있는 옹기굴을 찾아 거래를 했다. 주로 영덕, 진보, 울산의 옹기굴에서 물건을 실어왔다고 한다.

"요새는 일년에 서너 개 팔면 많이 파는 거씨더."

한 달에 서너 대의 차로 들여오던 것이 일년에 겨우 서너 개가 팔린다고 한다.
어느덧 이런 사람들의 무심함과 세월의 변화를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병두씨다.

"사람들 생활 방식이 바뀌었는데 어예니껴."


예전엔 여느집 부엌살림을 살펴보더라도 어머님이 아끼는 옹기 하나쯤은 있었지만 지금은 부엌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반듯하게 빚어져 나오는 신식 사기 그릇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또한 김치를 담아 옹기를 이용하던 시절은 지나고 김치전용냉장고가 등장했다.

길을 가다 얼핏 옹기가 눈에 띄어 반가워서 봤더니, 담뱃불을 끌 수 있도록 모래를 반쯤 채워넣어 재떨이 대용으로 쓰고 있다.

"이제 나도 칠십줄에 들어서고 이 장사도 이제는 더 못하지요."


하며 씁쓸하니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예전에 거래하던 사람들과 가끔씩 연락하며 지내고, 무공해 옹기라고 해서 요즘도 간혹 찾는 사람이 있다는데, 위안을 삼는다고 한다.

안동지 편집기자와 취재를 마치고 점심은 옹기그릇에 먹어보고 싶었다. 마침 새로 연 음식점의 옹기 수제비가 입맛을 돋우었다. 수제비보다는 옹기그릇에 군침이 돈 것일까? 그 동안 우리는 문화부문 전체에 걸쳐 서양자본주의 문화를 도입하고 그것을 생활화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제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반세기가 지나고 식민주의적 독소가 가시면서 젊은이들은 아직은 소수지만 스스로 우리 것을 배우고 그것을 현대사회에 맞게 개량해 세계무대에 내놓을 줄을 안다.

사물놀이나 개량한복이 그러하듯이 말이다.우병두씨 말처럼 숨쉬는 첨단 재질의 옹기를 여전히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옛 우리 전통적인 것들속의 우수함을 알아 현대생활로 끌어들여 응용하고 반영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전통옹기의 희망도 있는 것이다. (끝)

이 기사를 쓴건 한 3년전 일 겁니다. 제가 사는 안동에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이라는 문화저널이 있습니다.  안동의 터줏대감을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그때 썼던 글과 그 이후에 썼던 글들을  올려 둘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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