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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펌> 감독들의 3.12

"한나라당 의원들이 뒷짐지고 서 있는 장면, 공포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42)

                                                                       
"요즘 파주에서 계속 영화 촬영중이라 '생중계'로는 보지 못했다. 저녁뉴스로 편집된 화면을 봤다. 내게 그날의 영상은 한 편의 '공포영화'였다. 의장석에서 끌려나와 통곡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모습이 슬펐다기 보다 한쪽 편에서 뒷짐지고 있는 서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보면서 괴괴한 느낌이었다. 뒤쪽 멀리 떨어져 최병렬 대표나 박근혜 의원 등 지도부가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다들 생각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 한심했다. 마음 한편에선 사회개혁이나 개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 정치역사의 엄청난 퇴보다. 87년 6월항쟁이 떠올랐다. 그 때 청산하지 못한 기득권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지, 또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질긴지 이번 탄핵안이 통과되는 걸 보면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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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좀비들...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김지운 감독(42)

"참담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탄핵 결과에 대한 파장이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설마 가결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국회의 정치수준은 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어떤 잣대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지금의 탄핵정국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유치하다고 충무로에서 퇴짜맞는다. 말도 안되는 상상력은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수치고 만세 부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것 아니겠나. 탄핵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판단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나. 물론 전에도 정치인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은 여러 차례 연출되었지만 이번 사태는 그 정점이다.

탄핵에 찬성한 193명의 의원들은 괴상망측한 몰골의 '돌아온 좀비들' 같았다. 앞으로 나가던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집단적 광기였고, 동시에 좀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좀비들에게 역사가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국민들이 잘하겠지 하면서 봐준 게 있다. 그 잔재가 망령을 불어들였다.

어쨋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비들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다시는 좀비들이 살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매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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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으로 눌러버린 강간...결국엔 자위로 끝난 포르노 스펙타클" 
 [기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본 3·12 
 
그날 대통령 탄핵가결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 스펙터클은 내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게 보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걸 보는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협상과 토론의 중재에 의한 정치가 없었다. 그냥 힘으로 눌러서 벌이는 강간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보는 우리에게 즐겁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물어보는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그건 사실상 했는데 당사자들은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그래서 국민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안 했는데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여전히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갈 데까지 가서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한 게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애처로운 일이다. 거기서 오르가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그 하나는 흥분은커녕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해봐야 그건 자위행위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한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서 흥분한 연기는 가증스럽고 유치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항상 그걸 보는 사람들이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그냥 웃자면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이 스펙터클에 함께 참여하라고 제안을 받으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광화문에 선 그 수많은 시민들이 노!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데도 방송국을 찾아다니고 신문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중언부언하는 중이다. 무슨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느냐고? 그냥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같다'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당신이 잘 해서 이 포르노스펙터클과 맞서면서 당신 대신 거리에 서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한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한 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차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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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펌)

정치웹진은 '논쟁의 게토', 논객은 권력추종

정치웹진 공론장의 기능 심각하게 훼손당해, '당파성은 논쟁거리 아닌 응징거리'
현실정치 개입 편가르기 심화시켜, 대안미디어 실종 정치전략가들의 진지역할만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인터넷의 정치의 활성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피씨통신시절부터 온라인상에는 정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했으나, 2002년 대선과정을 거치면서부터는 사이버 정치는 주변부에서 벗어나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이 되고 있다.

이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정치칼럼웹진의 등장이다. 대선 직전인 2002년 10월 문을 연 대표적인 정치칼럼사이트인 <서프라이즈>는 네티즌들에게 단순히 정치를 둘러싼 논쟁의 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논리를 생산, 유포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토론회 모습     ©브레이크뉴스

때문에 한때 정치칼럼웹진은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거대언론이 독점하고 있던 담론형성능력을 대신하는 ‘대안 미디어’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1년이 지난 현재 정치칼럼웹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 서프라이즈, 동프라이즈, 남프라이즈 등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이트를 정하고 전폭적인 지지와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를 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더 이상 ‘미디어’로서의 기능은 없어졌다고 단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이들 정치칼럼웹진은 정치권의 정당들과 궤도를 같이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치칼럼웹진이 컨텐츠 생산자들인 인터넷 논객이 ‘당파성’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브레이크뉴스>가 창간 5주년을 기념해 27일 주최한 ‘인터넷 논객들의 당파성,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정파 종속적 당파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기형 연구위원     ©브레이크뉴스
한국언론재단 미디어연구팀의 이기형 연구위원(언론학 박사)은 이날 발제를 통해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치열하게 진행중인 언론의 역할과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싸움은 인터넷상의 정치담론의 공론장이 지나치게 좁게 정의된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파당성(partisanship)에 의해 혼탁해지거나 극단적인 언설과 비난을 만들어냄으로써 민주적인 공론장으로서의 정치웹진의 기능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그러나 “당파성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친 당파성이나 특정 노선이나 정치집단에 대한 성찰없는 추종이 더 문제”라며 “논객사이트 내에서 지나친 정치적인 편향이나 경향성에 의해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이 훼손되거나 비생산적인 측면으로 논쟁이 흐를 가능성을 조정하거나 정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결론적으로 “정치웹진이 표피상의 객관주의나 양시론이 아닌 어느 정도의 당파성과 정치적인 경향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현실개입적인 글과 정치적인 연설들을 제공하는 것은 보수적이거나 상업화된 언론매체가 아직도 강세인 현재의 오프라인 미디어 지형을 고려할 때 강점이자 웹진들의 존재이유”라면서 “그러나 시비와 편가르기가 주를 이루고 숙의(deliberation)가 결여된 웹진의 공간은 ‘논쟁의 게토’로 전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스스로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변희재 <브레이크뉴스> 기획국장은 “일부 인터넷 논객들은 더 이상 논객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인”이라며 강하게 성토했다.

변 국장은 “강준만 교수가 DJ지지라는 당파성을 드러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6가지 원칙이 분명히 있었고, 이후 DJ가 6가지 원칙에서 벗어나자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며 “최근 논객들은 당파성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더불어 “일부 논객의 당파성 여부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응징거리”라고 주장했다.

변 국장은 더불어 “나는 노무현 정부가 정치개혁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내가 파병에 반대하며 정권비판의 글을 쓰면 곧바로 '반노'로 규정하고 '민빠'(맹목적인 민주당 지지자)라고 부른다”며 인터넷에 만연된 편가르기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변희재 기획국장     ©브레이크뉴스
변 국장은 마지막으로 “시장의 논리로 지나친 당파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조선일보식 논리”라며 “한 인간이나 권력에 대한 올인(all-in)이 아니라 명확한 정책 방향을 잡고 그 기준으로 지지와 비판을 결정하는 당파성을 확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로 나선 최내현 <미디어몹> 편집장(전 딴지일보 편집장)은 “당파성의 문제는 옳음과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는 가치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문화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최 편집장은 “인터넷 논객이 플레이어(player 선수)의 역할을 맡게 되면 우리편이 어떻게 해야 유리한가에 매달리는 전략전술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며 “이것은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감상법’ 같은 글쓰기와 같은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최 편집장은 “정치칼럼사이트가 등장하면서 인터넷 논객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생겼음에도 이에 대한 위상정립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논객에 대한 위상정립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최 편집장은 “서프라이즈 서영석 대표가 종종 ‘특종’이라며 글을 쓰곤 하는데, 칼럼니스트는 고급정보를 접해야 할 필요성이 없으며, 오히려 일부러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정무 <민중의소리> 편집장은 “최근 인터넷 논객의 글에는 현장과 대중이 결여돼 있다”며 ‘2002년 대선당시만 해도 인터넷 논객의 글에 현장과 대중이 담겨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집장은 “인터넷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권 문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며 “그 문법에 따르면 스스로가 한 발 물러선 것처럼 느끼게 되고 팩트를 왜곡시킨다”고 말했다.

이 편집장은 그러나 “인터넷 정치 논객의 글은 제도권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성회 e-politics전략연구소 소장은 당파성에 대해 “김대중 주필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봉사하는 것과 서영석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에 봉사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라며 “오히려 지금은 훨씬 더 뻔뻔해졌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김 소장은 “인터넷은 미디어적 속성과 정치전략의 무기로서의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당파성을 갖는 것이 필연이지만, 현재 몇몇 사이트들은 미디어적 속성은 거의 없고 ‘정치전략가들의 진지’ 역할만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더불어 “인터넷 논객이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권력과 대중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며 “현재의 퇴행적 당파성은 단지 추종주의”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마지막으로 “인터넷 정치칼럼사이트가 계속된 분화과정을 겪는 것은 퇴행적 파당성으로 인해 대중 스스로가 논객을 거부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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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펌)

강준만과 유시민, 인터넷논객들의 유형비교
명확한 정책방향으로 지지와 비판의 당파성을 확립해야
이성과 논리가 없는 당파성은 광신과 권력에 대한 아부
 

강준만의 김대중 지지

첫째, 나는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을 원한다. 둘째, 남북문제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탁견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비교적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넷째, 역사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정치인 김대중의 민주화 투쟁 공로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다섯째, '이지메'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독재정권과 일부 국민들의 박해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여섯째, 지역문제의 해결이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원하는 마지막 이유다

1995년,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를 출판하며 스스로의 당파성을 드러낸 전북대 신방과 강준만 교수가 밝힌 김대중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이다. 한국의 사회비평 혹은 정치비평은 강준만 이전과 강준만 이후로 구분해야할 정도로 그가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그 중 가장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부분도 바로 그의 당파성 드러내기이다. 그는 김대중 집권 시기 내내, 이러한 당파성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오직 호남정서에 기대 맹목적으로 DJ를 지지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김대중을 지지하는 이유가, 한 인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에 관한 것임을 일찌감치 밝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김대중 집권 이후 그 여섯 가지 기준을 가지고 김대중을 재평가할 수 있었다. 급기야 그는 2000년 1월, 단행본 <인물과사상> 13권에서 김대중 정권의 몰락을 선언한다.
 
 "김대중 정권 몰락의 첫 번째 이유는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게 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이전의 정치 패러다임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비교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말 잘하는 솜씨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든 게 고작이었다. 그 특유의 자화자찬병은 여전했고 모든 게 구태의연했다. 김대통령이 누굴 특별히 실망시킬 만한 '배신'은 저지르지 않았다. 다만 변화가 필요한 때에 변화를 하지 않고 구태의연을 고집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물론 그건 바로 인간 김대중의 한계였으며, 이건 비판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김대중에 대한 당파적 지지를 선언한 97년부터 김대중 정권의 몰락을 선언한 2000년 사이에 강준만 교수는 사안에 따라서 지지와 비판을 반복했다. 물론 그에 대한 기준은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지지 이유이다. 특정 정치인 혹은 특정 정권을 지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정권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실천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갖는 정치사회적인 의미는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모조리 양비론으로 인한 당리당략적 접근으로 희석시킴으로써, 정책이 왜곡되는 역효과를 방지한다는 데 있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정부가 적극적으로 펴나간 햇볕정책은 전국민이 지지를 해주어야 하는 사안임에도 기존의 양비론적 접근으로 본다면 "정권의 인기를 위하여 남북문제를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2000년 4.13총선 바로 전날 발표된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보수언론은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정략적 이용을 비판했고, 실제로 득표에 결정적인 영향일 끼친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정책에 관한 당파적 입장으로 판단하면, 남북정상회담은 총선 바로 전날이든, 그 다음날이든, 합의 자체를 높이 평가해야하는 것이고, 실제로 이러한 정책이 총선 득표에 유리하다면 이는 얼마든지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언론들이 늘 정책으로 승부하라 그러지 않던가?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정책 승부였던 것이다.

장신기의 노무현지지

대표적인 인터넷 논객 장신기는 2002년 2월 <노무현 필승론-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거름)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정치공학적 입장에서 당시 이회창 대세론의 대항마로 인식된 이인제 대안론의 허구성을 파헤쳤다.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투표 행태상, 영남과 호남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노무현만이 대선 승리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책은 이인제 진영의 반발로 인해 경선 당시 큰 영향일 끼쳤다. 이 책이 단지 득표공학적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그의 차기작인 <노무현 반DJ신드롬을 넘어서>(시대의창)에서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노무현은 신뢰의 정치인이자 통합의 정치인이다. 노무현은 냉전 반북의식과 반호남 정서를 기본 축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공세를 정면에서 맞서 싸우며 승리의 역사를 개척한 신념의 정치인이다.
 
노무현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한국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민주적 리더십을 확립할 수 있는 정치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분열된 시민 사회에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정치인 노무현의 연속적인 영남출마 및 낙선, 그리고 그가 수 차례의 연설에서 밝힌, 남북화해 정책 등등을 보며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갖는 효용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첫째, 노무현에 신뢰를 줄 수 있는 정직한 정치인이다.
둘째, 노무현은 냉전 반북의식과 반호남 정서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셋째, 노무현은 민주적 리더십을 확립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넷째,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분열된 시민사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적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이다.

장신기의 이러한 노무현을 지지하는 네 가지 이유는 마치 97년의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노무현이라는 인물 개인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이 펴나갈 사회개혁적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정치칼럼 사이트 시대소리에 노무현지지 포기선언을 하고 말았다.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노무현씨는 역사의 배신자다. 노무현씨에게 앞으로 발생할 더욱 참혹한 결과에 가장 중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노무현씨 못지 않게 노무현 대통령을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개혁 세력의 자존심과 위상에 심대한 타격을 준 노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김대중 이후의 질서에 대한 고민의 내용이 부족했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식 보수적 근대화 노선에 반대하는 개혁 진보 세력의 가장 큰 흐름인 자유주의적 진보 노선의 선도적 정치인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중요한 정치적 논쟁은 바로 김대중씨를 중심에 놓고 전개되었다.

노무현씨는 김대중 이후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그 기반 위에서 개혁과 통합을 펼쳐나갈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과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씨가 집권할 당시보다 월등히 유리한 정치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1년만에 자신의 중요한 지지층을 떨쳐내면서 오직 노빠의 품 속에서만 머무르려고 하는 퇴행적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금 DJ + α로 외화되는 평화 개혁 통합 노선은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큰 상처를 받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노무현지지 논리'를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으로서 사죄를 드림과 동시에 평화 개혁 세력이 나아가야 하는 길에 대해서 같이 고민할 것을 다짐한다.<노무현 지지 논리를 펼친 것에 대해서 사죄합니다>

장신기는 지지 포기 선언을 하기 이전부터, 여러 가지 정책적 이유를 들어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첫째, 한나라당과 공조하여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하여 개혁진영을 분열시켰다.
둘째, 두 번에 걸친 이라크 파병으로 친미종속외교를 심화시켰다.
셋째,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에 골프를 치는 등, 민족공조 정신을 후퇴시켰다.
넷째, 민주당을 인위적으로 분열시키며 개혁세력의 역량을 약화시켰다.

장신기는 처음부터 노무현을 DJ 플러스 알파로 인식하였다. 노무현이 후보시절 누누이 이야기했던 DJ의 부채는 버리고 자산만 승계한다는 원칙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자산을 모두 버리고 간다고 판단하여 지지를 포기한 것이다. 장신기가 노무현을 지지한 논리를 그대로 이어보면 현재 도저히 노대통령의 노선을 지지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강준만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은 배신자인가>(인물과사상)에서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밝혔다.

문제는 그간 내가 쓴 책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나는 노무현을 옹호하는 책을 쓰면서 노무현이 그런 배신을 저지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어떤 사람이 내게 조롱하듯이 물었다. '아니 그것도 예상 못했단 말입니까?' 그랬다. 나는 정말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노무현이 대북송금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까지 이해했다.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까지도 동의했다(민주당 분당은 유권자들까지 양분시키는 '파괴적 해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권력의 속성과 정치의 이치를 잘 안다고 자부해온 나로서는 노무현이 김대중을 어느 정도 밟고 넘어가는 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예상했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민주당 분당을 예상하지 못한 건 '신의'를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무현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수의 엘리트 집단이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건이 벌어지기 전 민주당 분당에 반대하는 주장을 여러 차례 공개했지만, 내게 무슨 대단한 힘이 있었겠는가. 내게 남은 건 일개 글쟁이로서 져야 할 책임뿐이었다

언론학자 양문석의 노무현 지지철회

강준만과 장신기는 각각 포괄적 의미에서 김대중을 지지한 경우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지지대상이 권력을 잡았을 때, 비판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한두 가지 정책 사안에서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전체적으로 판단하여 쉽게 비판에 임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은 배신자인가>라는 책을 내기 전에 미리 <노무현 죽이기>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때는 이미 인터넷 네티즌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책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보다는 옹호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무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게 중심은 비판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부디 노무현이 옳은 길로 가주기를 바랄 뿐이다. 노무현은 어떤 점에선 지금 자신이 자신의 고집과 인의 장막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청와대 바깥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아마도 강준만 교수의 입장에서는 노무현이 측근 이외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그의 배신을 비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한두 가지 잘못하더라도 포괄적으로 지지를 해온 논객이라면 세부적인 정책으로 비판을 하기란 부담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당파성 자체를 정책으로 구분한다 해도 바로 이런 포괄적 지지의 문제 때문에 공평무사한 비판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와는 달리 언론학자 양문석은 철저히 개별 정책만으로 정권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구분하는 부류이다. 즉 양문석의 당파성은 언론개혁이라는 정책이다. 언론개혁을 제대로 하면 지지를 하는 것이고 제대로 못하면 비판을 한다. 그는 <브레이크뉴스>에 '노무현 정권의 언론개혁정책? 그런 것 없었다!'(2004. 2. 25)>라는 글에서 단순명쾌하게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을 비판한다.

아예 결론부터 먼저 밝히고 평가를 해 보자. "노무현정권 1년의 언론개혁정책은 없었다. 역대정권과 다를 바 거의 다를 바 없다"가 결론이다. 그리고 '수구언론과 비타협적 투쟁'→'언론과 건강한 긴장관계'→'더 이상 투쟁과 긴장은 없다'로 변절만 거듭한 노정권의 언론관만 남았을 뿐이다.

그는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관계 등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냈다하더라도, 지금의 기준이라면 언론정책 하나만 갖고도 사정없이 노무현 정권을 비판했을 것이다. 덧붙여, 보다 노무현에게 기대를 갖고 기다리자는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믿어 달라, 기다려 달라, 의존하지 말라'는 황당무계한 주장들이 노당선자를 돕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김대중정권이 그랬듯이, 생각 없이 아부정신만 풍성한 인간들이 결국 사고를 쳤다. 세무조사와 언론고시의 주역인 당시 청와대 대변인과 국세청장이 부패사건에 연루되어 자리에서 쫓겨났다. 국민을 위한다고 시작한 '언론개혁'이 일부 추진주체들의 부도덕성으로 인해서 개혁대상들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했던 것이다.

 …노당선자를 옹호한답시고 '믿어달라, 기다려 달라, 기대지 말라'고 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중해야 한다. 꼭 이런 자들이 사고치는 것을 보아온 경험이 '역사의 교훈'으로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선자만 믿어달라'며 인수위 시절 언론개혁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결과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양문석의 비판은 고전적인 현실참여지식의 유형과 유사하다. 논객이 정권의 안위나, 정권의 인기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공평무사하게 잘한 것은 잘했다 하고 못한 것은 사정없이 내려치면 그만이다. 똑같이 정책으로 인물을 지지하는 강준만이나 장신기와도 분명히 다른 입장이다. 양문석이 내세우는 당파성은 오직 정책인 것이다.

인물에 올인, 유시민의 노무현 추종

유시민은 논객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그래서 논객의 당파성을 따지는 글에서 그를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인터넷 논객들 중 사실 상 정치인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유시민의 논리를 따라간다. 유시민이 정치인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친노 당파성 논리를 선도하기 때문에 다른 친노 논객보다 유시민을 다루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가 2003년 3월 20일, 그의 홈페이지에다 민주노동당 송태경 정책국장의 비판에 답한 글을 보자. 소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 관한 것이었다.
 
저는 가치기준에 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믿습니다. 그저 믿는 게 아니라 굳게 믿습니다. 유권자로서, 또는 이제 막 정치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제가 밀었고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굳게 믿는 것이 잘못일까요? 송태경 국장은 노무현을 철석같이 믿는 저 같은 사람을 두고 "노무현 광신도"라고 비웃겠지만 저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 굳은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송태경 국장은 자랑스럽고 행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유시민은 시종일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노무현이 그 어떤 정책적 실수가 있더라도 노무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책으로 노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논리로 접근한다. 그는 한겨레신문에서 기획한 참여연대의 김기식 사무차장과의 대담에서 논쟁 전체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유시민 - 오늘의 결론, 노무현 대통령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마세요.
김기식 - 국민은 어느 대통령이든 새로 된 대통령한테 기대를 가져야 돼고, 그래야 편안하죠.
유시민 - 원래 발랄한 리버벌인데 대통령이 되고 나면 보수화하거든요. 그런 정도로 보세요.

유시민이 갖고 있는 노무현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논리로 유지된다. 
 
첫째, 노무현에 대한 기대를 갖지 마라.
둘째, 자연인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다르다.

이 두 가지 논리만 갖추고 있으면 그 어떤 노무현에 대한 비판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이라크파병 결정에 대해서 비판하면 "개인 노무현은 파병반대하고 싶었지만 미국 때문에 대통령 노무현은 파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로 막아내고, 경제실정을 비판하면 "노무현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마라"고 달랜다. 도무지 비판으로 바꿔낼 수 있는 그 어떤 사안도 무마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시민의 노무현 지지논리는 주로 추측으로 일관될 수밖에 없다. 그는 노대통령이 이라크파병을 결정했을 때도 "노무현은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갖고 있을 겁니다"라는 추측논리로 그를 변호했다. 그는 이러한 것들조차 당연하다고 말한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의 인터뷰를 보자.

그니깐 노사모는 노빠니깐 하자면 하자는대로 하는 거야. 그러니깐 노사모지. 그러니깐 나한테 대해서도 욕하지 말라고. 나는 한겨레 논설우원이 아니잖아. 저, 누구 장정일 소설인가요?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런 소설 제목 있죠? 내가 누군질 알아야 돼. 나는 논설위원이 아니잖아요. 옛날에는 컬럼리스트였지만...

유시민은 평소에 자칭 측근 5인방 중 하나임을 내세운다. 물론 그가 실세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측근이라면 노무현을 위해 몸을 바쳐서 옹호를 하라는 논리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이를 직접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 완전히 반대 논리를 펴기도 했었다. 그가 2000년 4월 <인물과사상> 단행본 '김대중 정권 몰락'에 기고한 글 중 일부이다.

나는 언제든 대통령의 노인증세에 대한 가설을 흔쾌히 파기해 버릴 용의가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서도 그런 적절한 설명을 만나지 못했다.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참모들은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어른'을 잘 모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아직까지도 어째서 4년 전의 논리가 뒤바뀌었는지 해명하지 않고 있다. 측근이라면 비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측근이라면 맹목적으로 옹호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지 그 간극이 너무나 크다. 이는 바로 유시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이 아닌 한 인간에 대한 당파성의 폐단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노무현 지지활동을 하는 조건으로 후일 노무현 회고록 집필을 맡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 만큼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이다. 그러한 애정 때문에 논객으로서 당연히 갖춰야할 논리적 일관성까지 포기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이를 확장시킨 당파성을 올바른 의미에서의 당파성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단 한번도 파병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다가, 본회의 표결에 숨어서 반대표를 던진 유시민, 그 유시민이 과연 80년대 항소이유소를 쓴 유시민인지 의아할 뿐이다.

당파성은 시장논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지난 1월 28일 민언련 주최로 열린 <인터넷매체 선거보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서프라이즈의 서영석 대표와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국장은 당파성에 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서영석 대표는 '기계적 중립은 소유지배구조에 있어서 내재적 모순을 안고 있는 기존 종이언론들이 자신들의 편파성을 가장하거나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기계적 중립에 대한 고정관념을 떨치고 선거의 판세분석이나 방향을 보도할 때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것이 더 솔직한 것이란 게 서 대표의 입장이다.

정운현 국장도 서 대표의 주장에 일정부분 동의하는 견해를 내놓았다. 정국장은 '친노나 반노라는 특정 정치세력에 올인하는 매체는 시장에서 냉엄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며 문제삼지 않으면서'그런 우려와 지적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강한 주장도 할 수 있는 것이 인터넷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당파성 문제가 시장논리로 극복된다는 정운현 국장의 발상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릇된 당파성이 가장 극대화된 매체는 조선일보이다. 그런 조선일보가 벌써 10년 이상 시장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안티조선은 물론 안티조중동까지 주장한 정운현 국장이 이런 시장논리 맹신자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히려 당파성에 대한 폐단은 서프라이즈의 서영석 대표가 제대로 지적했다. 그는 토론회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 지지하는 것은 문제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대 권력지지하는 한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라는 발언을 하여 방청자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그 혼란은 뒤로 하고, 서영석 대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정운현 국장의 시장논리는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매체 역시 산업이라면 산업을 위하여 힘있는 정권과 여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먹고 살기 위해서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인데 어떻게 시장논리로 이를 극복한단 말인가?

당파성은 근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강준만 교수는 김대중의 정책으로, 장신기는 노무현의 정책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비판했다. 하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과 논리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시장과 대립한다. 시장이 대중과 자본의 흐름을 대변하는 반면 당파성은 그것들이 놓치는 이성적 판단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의미에서의 당파성이라면 한 인간이나 한 권력에 대한 올인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유시민의 권력에 대한 올인은 반당파성이라는 말이다. 이성과 논리가 없는 당파성은 광신과 권력에 대한 아부일 뿐이다.

고로 이제부터는 올바른 당파성의 확립을 위해 논점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권력이 좌로 가면 좌로 가고, 권력이 우로 가면 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정책 방향을 잡고 그 기준으로 지지와 비판을 결정하는 당파성을 확립시켜야 한다. 이러한 당파성만이 시장논리를 극복하여 논객과 매체 본연의 비판기능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 본문은 <브레이크뉴스> 창간 5주년 기념으로 2월 27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   '인터넷논객과 당파성,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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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뉴스2004/02/26 [07:27] 작성

인터넷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 읽기

 

사이버공간을 통해 표출되는 논쟁과 열정,시시비비와 이전투구의 사회학

 

 

1. 한국사회는 논쟁중? 사이버공론장과 정치웹진 그리고 논객 사이트들의 출현

인터넷이 한국사회에서 상용화되면서 인터넷 공간은 사회적으로 긴요한 이슈들에 관한 담론들과 변화를 모색하려는 '열정들'이 넘쳐나는 새로운 정치적인 실험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에 기반을 둔 온라인 신문과 정치웹진들은 여론과 정보유통과정의 순환을 촉진시키고,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고 신축성있고, 쌍방향적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와 집단들이 비교적 수월하게 참여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사이버 공론장의 매개체로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인터넷을 경유한 여론형성의 과정은 인터넷 토론문화의 특성인 개방성, 익명성, 속도성, 접근성, 그리고 쌍방향성에 힘입어 직접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이 아고라적인(e-agora)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특정사안과 아젠다에 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거나, 직접 기사를 작성하거나, 공적인 문제들에 관한 정보와 의견을 게시하고, 회람시키는 행위가 늘어남에 따라 사이버 공간에 심도있는 해석과 감성적 표현을 강조하는 새로운 유형의 '표출적인 저널리즘'(expressive journalism)이 뿌리를 내리게 시작한 것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19일의 대통령선거는, 인터넷을 통한 네트웍킹을 토대로 자발적인 정치인 후원모임 혹은 팬모임을 활성화시킨 '노사모'와 인터넷 신문의 힘을 과시한 <오마이뉴스>의 약진에서 보듯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정치적인 담론들이 폭발적으로 개진되고 유포되던 하나의 사건이자, 대안적인 의미의 공론장으로서 사이버공간을 급격히 성장시킨 기폭제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햇빛정책, 특검문제, 파병문제, 부안사태, 네이스, 새만금, 정치개혁, 언론개혁등과 같이 첨예한 정치사회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특정 정치사안, 지역주의, 교육개혁, 노동, 환경, 문화, 여성과 소수자의 문제에서 세계화와 같은 탈지역적인 이슈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웹진과 인터넷 매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출현하고, 동시에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2. 논객사이트, 논객과 개입적 글쓰기

이러한 정보화테크놀로지와 정보인프라의 급속한 발전 속에, 인터넷상의 정치웹진 그리고 정치칼럼사이트 혹은 논객사이트를 중심으로 '논객'이라는 인터넷을 매개로 한 여론형성과 정치담론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새로운 담론생산자 집단들이 부상한 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단순화시켜서, '인터넷 논객'이란 정치웹진이나 언론과 관련된 인터넷 언론/칼럼사이트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성이 도드라진 이슈들과 그 이슈들이 제기되는 특정 국면에 대한 분석, 해석,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담론들의 생산자로서 인터넷 논객의 역할은 거칠게는 주류언론에서 논설을 작성하는 논설위원이나 심층해설을 쓰는 정치평론가 - 논객으로서의 주필과 논설위원 - 그리고 섭외된 글을 기고하는 외부필진, 명망가, 혹은 기타의 전문가집단이나 지식인 집단과 일정부분 겹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담론생산의 수준에서의 이러한 글쓰기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논객의 글쓰기는 오프라인 매체에서의 글쓰기와 비교할 때 자신의 정치적인 경향성과 '당파성'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드러낸다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정치웹진에 글을 기고하는 일정 정도의 지명도를 지닌 논객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이들은 대부분이 남성이며, 'PC통신세대' 출신이 많으며, 연령별로는 20대에서 30대를 거쳐 40대 초반인 386세대까지를 포함하지만, 후자가 주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경험을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현 단계 한국사회에서 사회정치적인 측면의 개혁성과 개혁의 방향성과 권위주의의 청산을 두고 온라인상에서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정치담론을 생성하고 유통시키는 매개자이자 해석자이며, 때로는 '싸움꾼' 혹은 훈수꾼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정치웹진 사이트를 모니터링하다 보면 논객들의 의해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개념과 정치투쟁과 헤게모니를 둘러싼 싸움에 참여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즉 상당수의 논객들은 자신들이 과점언론이 주도하는 여론과 정치담론 영역에 있어서의 '지적ㆍ도덕적' 지도력(leadership)과 '동의'(consensus)의 생성구조에 - 헤게모니 작용 - 대항해서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이라는 '참호'에서 반-헤게모니적인 개입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음을 상당히 자각하고 있다. 즉 기존의 기득권을 누려온 주류사회의 '정당화의 전문가'들이 만들어 내는 담론에 대한 분석과 반담론(counter-discourse)을 통한 시시비비 가리기 그리고 주류보수담론에 대한 대응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가 온라인 상의 정치웹진에서 다수의 논객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들은 매체영향력과 물적인 기반이 훨씬 더 큰 주류내지는 보수언론매체를 상대로 치고 빠지는 일종의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람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사람 스스로에 대하여 철학자이며 여성들도 또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기적인 지식인은 반드시 전문가나 학자집단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터넷 논객들 역시 다양한 사회적 그리고 직업적인 배경을 갖고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언론인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나 오피니언 리더들과 비교할 때,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터넷 논객들의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자신들의 지적인 작업을 평가하거나, 추인하는 제도적인 통과의례나 '라이센스'를 - 이를테면 학위나 제도적인 소속성과 같은 - 필요로 하고 있지 않거나 획득하지 않고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논객으로 데뷔하는 진입장벽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이들은 그 자신이 인터넷 논객인 정희주의 말을 빌리면 '학벌이나 나이나 실명여부에 크게 구애받음이 없이 (속칭 계급장 떼고) 자신의 글 솜씨를 가지고 논지를 펼치는' 이들이다. 즉 누가 논객으로서의 지위 혹은 논객성 혹은 논객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아직은 많은 이들이 동의하거나 납득할만한 평가를 내려줄 공인된 기관이나 사회적인 정체성으로서 그들의 논객성과 전문성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으로 공인할만한 지표나 척도를 설정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논객들 중에는 스스로를 논객으로 칭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논객이라는 명칭과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비교적 합의가능한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웹진을 읽는 독자들의 인용하기 그리고 클릭수와 댓글달기의 형태로 표현되는 지지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매체를 통해 논객성을 확보한 이들 중에는 진중권이나 변희재, 서영석과 같이 상당히 높은 지명도와 유명세를 확보해서, 오프라인에서도 인터넷상의 명망도와 능력을 인정받아 출판과 언론매체나 방송계 그리고 학계로 진출하는 논객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대중문화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이버공간에서도 명망가 논객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스타시스템'이 확립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들이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인터넷상의 글쓰기를 통해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는 아직 어렵다. 하지만 상징적인 권력의 면에서는 논객들이 상당한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다. 아직 이런 식의 범사회적인 지명도를 확보한 논객은 소수이지만, 최소한 이들의 작업에 대한 평가가 언론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담론들이 다양한 독자들에 의해 '퍼가기'의 형태로, 또한 일상생활 속의 대화나 토론을 통해서 재인용되고, 계속해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논객들의 인터넷상에서의 글쓰기는 생계를 영위하기 위한 '전업적 글쓰기'가 아니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논객사이트에서 논객들은 자신들이 쓰는 글에 원고료라든지 다른 종류의 물질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의 웹진들이 고료를 지불하고 있지만, 아직 운영면에서 고전하고 있고 제대로 된 수익모델을 찾지 못한, 운영모델이라는 측면에서 과도기에 처해있는, 대다수의 인터넷 논객사이트들은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 이보다는 다수의 독자층에 의해 주어지는 '상징적인 권위'와 중요한 의제와 논쟁에 자신의 의견을 타인들이 보는 공공적인 성격의 플랫폼에 올리고, 회람시키는데서 오는 현실개혁에의 참여라는 열망과 힘돋구기(self-empowering)가 일종의 보상체계적인 역할을 한다.

3. 웹진식 글쓰기, 토론문화 그리고 댓글문화

모니터링과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다수의 인터넷 논객들이 자주 거론하거나 참조하는 글쓰기는 강준만, 진중권, 홍세화, 박노자, 손석춘등 오프라인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전투적인 지식인'들의 글쓰기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인물과 사상> 시리즈로 유명한 강준만의 경우 '1인 저널리즘'과 '실명비판'을 주창하면서 다양한 캠프의 한국사회의 지도적인 학자 그리고 지식인들과 논쟁을 벌여왔다. 그는 자신의 전방위적인 현실개입적인 비평과 비판을 '삶과 밀착된 구체적 현실과 관련된 행태에 관한 비판'이라고 정의한다. '호남소외와 영남의 패권주의'라는 지역주의의 문제에서 문화권력,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지지에서 안티조선 문제에 이르기까지 강준만은 꼼꼼한 자료수집과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역'을 두지 않는 비판적이고 개입적인 글쓰기의 전범을 제공해왔다. '주례사비평'이나 '이빨 빠진'(toothless) 교과서적인 의미의 일반론이나 훈계조의 양비론이 주류인 정치와 언론담론의 영역에서 강준만은 자신의 정치색과 포지션을 드러내는 글을 써왔다. 하지만 그의 글이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소명의식만으로 예단된 것은 아니다. 그는 '논쟁의 룰'을 공정하게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동시에 그의 글쓰기는 현학적이고 과잉지식화된 학문적인 스타일을 채택하는 대신에, 상대적으로 대중적이고 평이한 어법을 구사하되, 구체적인 사안을 잡아 치밀하게 비판하고, 토론대상과 관련된 세세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공략하는 방식을 취한다.

역시 논객들에 의해 자주 거론되는 글쓰기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 오프와 온라인을 오가면서 왕성한 개입적인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는 진중권이다. 진중권은 사이버공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동시에 가장 '악명'을 떨치는 논객이라고 할 수 있다. 우파적인 글쓰기를 공박한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유명한 진중권은 비꼼, 조롱, 패로디를 통해 날카로우면서도 해학적인 글쓰기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스타일의 글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론이 있지만, 진중권식의 '텍스트 비평'은 그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텍스트의 논리구조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상대방의 언어를 해체하며, 재조립해서 되돌려준다.

그의 비평적 글쓰기의 전달방식은, 그 자신이 인터넷 논객이자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지적했듯이, 감정이 실린 비어와 분석적인 철학적인 용어를 섞어 쓴다는 점에서 혼성적이며 반권위적이며, 문체는 속도감있고, 경쾌하다. 진중권은 정력적으로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일련의 사이트들을 - 한겨레에서 조선일보 독자마당까지 그리고 오마이뉴스에서 진보누리까지 - 방문해서 댓글달기나 실시간 토론을 통해 다수의 네티즌 독자들과 소통하거나 논쟁한다. 동시에 그는 글쓰기의 분석대상에서 극우뿐만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서는 넓은 의미의 '개혁세력'이나 민족주의 계열에도 비판의 날을 갖다댄다.

온라인 공론의 장에 나서지 않고 오프라인에서의 작업을 고집하는 강준만에 비해, 진중권은 다수의 정치웹진에 글을 기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채팅방에 들어가거나 댓글달기를 통해 네티즌 독자들과 줄기차게 토론해왔다. 냉소가 아닌 패로디와 '쇼크효과' 그리고 상대방 텍스트의 논리적인 허점이나 '논점일탈'을 지적하는 진중권의 글쓰기는 수많은 논쟁꺼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터넷식 글쓰기의 대표적인 전형이 되고 있다.

물론 논객사이트의 필진이나 논객들이 모두 위에서 언급한 강준만이나 진중권 수준의 글을 써내거나, 자료수집과 자신의 지향점이 충분히 녹아든 글을 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논객들의 글이 기계적인 중도주의나 논전의 한가운데가 아닌 사이드라인에서 도덕적인 권위만을 강조하는 양시론 그리고 훈계주의의 입장을 벗어나서 자신의 정치적인 가치나 판단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명비판을 통해, 두루뭉수리한 일반론의 그늘아래 안주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인터넷 논객들의 글쓰기에 반영되고 있는 강준만식 그리고 진중권식 글쓰기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다. 한국사회 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과 '근본주의적인 폭력들'에 대한 진중권의 지속적인 개입적인 글쓰기는 사이버 공간상에서 논객들에 의해 꾸준히 모방되고,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인터넷 논객들의 글쓰기는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일종의 '현실개입적'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외견상 가치중립적이기 보다는 '가치개입적인' 글,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동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 기존의 보수적인 상징가치들을 패로디하거나 전복시키는 글, 그리고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그리고 이슈를 지지하는 글을 쓴다. 인터넷 논객들은 '객관적인 저널리즘'의 잣대나 '초연한 관망주의'라는 오프라인 미디어의 잣대나 스탠스를 지키기보다는,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와 대상에 관해 정파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된'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터넷 웹진이나 정치칼럼사이트에 기고하는 대부분의 논객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그리고 넓은 의미의 진보적이거나 '개혁세력'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고, 웹진에 찾아오는 독자들 역시 비슷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웹진에 기고하는 논객들은 주류언론매체에 - 흔히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고 대립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진보계열의 논객들은 주류언론, 즉 조중동을 자신들의 상업적인 이익을 우선하거나 공적인 담론을 선점하면서 과도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상징권력을 축적한 '보수,' '극우' 내지는 '수구 그리고 '기득권세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과점적인 언론권력 그리고 문화권력으로서의 조중동에 관한 정치웹진에 실리는 글의 논조와 필진들의 의견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은 인터넷 논객들은 주류언론에 일정한 대립각을 세우고 보수-수구적인 언론에 복무하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정치적인 '기회주의'와 '안보상업주의,' 그리고 '현실추수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반면에 보수적 지식인들은 진보적인 논객들이 지나친 편향성 혹은 '당파성'을 앞세우며 일부 정당이나 정치인의 지지자내지는 '치어리더' 심지어는 '깃발부대'나 '홍위병'의 역할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또한 이들의 글쓰기는 과도한 이념적인 투하와 공격적인 언어로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보수진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들 진보계열의 논객들은  '좌파적 포퓰리스트 정권'의 출현에 힘입어 '완장을 차고' 정치담론의 장에 뛰어든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인'들 내지는 '균형감각을 상실한' 선동적인 이데올로그 정도로 규정된다.

현재 인터넷공간은 '보수:진보'라는 가치와 이데올로기적인 노선을 따라 지지세력이 세분화된 가운데, 보수적 그리고 상업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확립된(established) 주류미디어에 맞서서, 인터넷 중심의 신생 미디어들은 넓은 의미의 '진보'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여론형성의 장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사이버 공론장에서는 범진보계열의 담론들이 범보수권의 담론을 일단 양적인 면에서 압도해왔다는 점이다. 동시에 숫자나 지명도, 그리고 사이버 공론장에서의 활동면에서 보았을 때, 진보나 중도우파계열의 논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보수나 극우계열의 논객들은 소수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계열의 경우 온라인에서의 논객들의 역량은 아직까지는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자체 담론생산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독립신문> 이나 <시스템클럽>과 같은 온라인 보수사이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담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보다는 오프라인의 보수적인 논객들의 글에 주로 의존한다. 이것은 주류언론이 보수적인 기득권 수호와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이미 강력한 지위와 힘을 행사하고 있는 담론의 생산자이자 전파자이기 때문이고, 이런 환경 속에 온라인상의 보수사이트들의 의제나 담론을 통한 설정능력은 아직 수동적이고 제한적이다.

인터넷 정치웹진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추상적인 일반론에 머물거나, 지나치게 '계몽적이거나' '엄숙주의적인'글 그리고 '양비론적'인 글은 정치웹진에서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독자들에 의해 혹독하게 비판받는다. 이것은 정치웹진에 찾아오는 독자들이 이미 상당할 정도의 '정파적인' 집단이자, 주류언론이 잘 제공하지 않는 '주장적' 혹은 논쟁적인 글쓰기와 긴급한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한 발빠르고, 심도있는 해석과 해설, 시시비비와 대의명분을 따지는 글, 그리고 특정 웹진에 찾아오는 네티즌 상호간의 일정하게 공유되는 기대와 '공감'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조금 다른 앵글에서 보았을 때, 정치웹진과 종이신문을 차별화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댓글달기와 논객과 독자 사이에 벌어지는 활발한 - 때에 따라서는 치열하지만 공격적인 - 논쟁과 토론의 상호작용과 상승작용이다. 즉 독자가 '리플'로 주어진 기사와 주장 혹은 해석에 관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정치웹진이 지닌 강력한 상방향적인 의사소통의 한 예이다. 댓글은 일반적으로 1차적 텍스트, 즉 논객의 글에 '기생하는' 보충적인 텍스트이지만, 때로는 다른 글이나 기사의 퍼오기를 통해서 댓글 자체가 물리적으로 메인에 있는 논객의 글보다 더 분량이 많아지거나, 논리면에서 더 치열하고, 첨예한 내용들을 담고 있을 때도 있다. 메인 텍스트와 댓글 그리고 이러한 글들이 다른 논객사이트에 퍼올려져서 다시 독자들의 반응을 재견인함으로써, 주어진 주제나 논조를 중심으로 한 토론이 점화되면서 표출된 의견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상승효과내지는 에스칼레이션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이버공간 상에서 시공간적인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댓글달기와 퍼오기, 그리고 서로간의 논쟁의 형태를 통해서 그때그때 토론과정에 참여하거나 강하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네티즌 독자들의 경우, 주어진 기사에 대한 상당히 논리적인 대응을 추구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서적인 지지를 표현하거나 감정적인 표현을 - 일방적인 지지, 공감과 찬사, 욕설이나 야유, 그리고 패로디를 포함한 - 결코 자제하지 않는다. 논객사이트와 정치웹진이 형성하는 소규모의 공론장들은 기존언론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와 주장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적인 정보와 해석을 구하며, 동시에 네티즌 독자들 혹은 다중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구체화된 경험과 거기서 체득한 정보나 지식을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나 사이트를 중심으로 교환하고, 비교하는 장이다.

4.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의 의의와 한계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들은 아직은 그 역사가 일천한, 매체적인 정의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신생 미디어 양식'(emergent media form)이다. 작년 대선기간을 기점으로 사이버 공간상에 기존언론과 시각과 운용면에서 상당히 차별화되는 공론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사회의 제반문제들을 심도있게 숙의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출현은 분명히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사회적으로 첨예한 이슈들이나 정치개혁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기존 언론의 전문가나 학자가 아닌, 다양한 직업적 그리고 사회적인 배경을 지닌 시민들이 논객과 독자로 참여하고, 직접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담론들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담론들을 통해서 타인들과 소통을 시도했다는 점은 시민이 이제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공저널리즘의 한 모형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는 이제까지 언론산업과 국가가 주도해 온 커뮤니케이선 과정에 그동안 참여하지 못했거나, 반영되기 어려웠던 목소리와 의견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서, 탈권위주의,정보화와 다양성의 시대의 새로운 대화와 토론의 모델을 제공한다. 동시에 특정 논객사이트들은 비슷한 정치적인 견해나 관심을 공유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어서 진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특정사안들을 논하는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를 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작년 대선 기간동안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논객사이트 <서프라이즈>의 경우,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지지자와 '팬'들이 그들의 정치적인 견해와 노후보에 대한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표출해내고, 서로간의 결연을 공고이하는 공동체적인 네트웍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치냉소주의의 시대에 이 사실은 웹진과 논객사이트가 기존 제도권 언론과 정치가 간과하거나,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인 욕구와 필요, 그리고 변화에의 열망을 견인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서프라이즈>를 위시한 논객사이트들의 출현과 단시간 내의 급속한 성장은 몇 가지 문제점도 발생시켰다. 정치사안과 쟁점에 대한 열려진 숙의와 절차적인 정당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 설득 대신에, 특정 노선이나 정치경향성을 - 즉 '당파성' - 맹목적으로 추수하는 정치담론들이 과잉으로 생산되면서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들은 중요한 사회정치적인 의제와 사안에 대한 토론장에서 편가르기, 대립과 반목, 갈등과 이전투구의 난장으로 변화하는 부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서프라이즈> 내에서 햇빛정책을 둘러싼 특검과 신당문제, 이라크 파병과 같은 첨예한 이슈들을 두고 벌어진 분란과 갈등은 동프라이즈와 남프라이즈로의 분화를 끌어냈고, 상당수의 논객들과 독자들이 <서프라이즈>를 이탈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 와서는 청와대가 <서프라이즈>의 대표논객들과 접촉을 하고, 회동을 가짐으로써 논객들의 글쓰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외부로부터 보수세력에 의해 제기되는 비판과 정치웹진들 사이의 갈등과 더불어, 논객사이트들에서 논리적인 방식과 정론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는 사사건건 반목하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공세를 취하는 논객들과 특정노선을 추수하는 독자들이 생겨남으로써, 다른 정치적인 시각을 가진 타자들을 용인하고 그들의 견해를 숙고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 혹은 '본질주의화'한(essentialist) - 당파성과 노선주의, 편가르기에 따른 갈등과 파행, 그리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인해 논객사이트들이 사분오열되고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치열하게 진행중인 언론의 역할과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 상징적 권력을 둘러싼 - 싸움은 인터넷상의 정치담론의 공론장이 지나치게 좁게 정의된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파당성(partisanship)에 의해 혼탁해지거나 극단적인 언설과 비난을 만들어냄으로써 민주적인 공론장으로서의 정치웹진의 기능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도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러한 인터넷 논객사이트의 '과잉정치화'와 흑백논리에 의한 갈등은 새로운 표출적인 저널리즘과 열린 담론들의 정치가 개화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정작용과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첫째, 논객사이트 내에서 지나친 정치적인 편향이나 경향성에 의해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이 훼손되거나 비생산적인 측면으로 논쟁이 흐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조정하거나 정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씨스템이 필요하다. 이것은 당파성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친 당파성이나 특정 노선이나 정치집단에 대한 성찰성없는 추종이 더 문제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찰적인(reflexive) 씨스템의 구현은 각 논객사이트의 운영자들과 독자들이 얼마만큼 다양한 정치적인 시각과 가치를 관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즉 정치적인 스펙트럼과 지지방식에 있어서 다양성과 개방성이 답지되고 허용될 수 있는 분위기와 공정하고 균형있는 정치담론과 주장의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게임의 룰'이 제도적으로 확립되고 시행될 필요가 있다. 대화와 정치한 논리, 그리고 사실에 입각한 이슈파이팅과 논객과 독자간의 상대방을 배려하고, 열린 토론문화를 통해서 이러한 게임의 룰은 상당 부분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둘째, 논객사이트의 주 컨텐츠는 아직까지 지나치게 '정치중심적'이다. 논객사이트의 담론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그리고 정치행위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지지 그리고 집중도를 보여주기 보다는 좀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안들도 - 노동, 젠더, 환경, 문화, 국제정보, 소수자의 문제등 - 아우를 필요가 있다. 현 단계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복잡다단한 가치체계와 문화적 그리고 세대적인차이들을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프레임들이 긴요하게 요청된다고 수 있다. 즉 너무 좁게 정의된 의미의 정치영역과 담론의 한계내지는 특정한 '진영논리'를 벗어나서 외연이 확장되고, '뺄셈의 정치'가 아닌 '덧셈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탈권위주의 시대환경에 걸 맞는 넓은 의미의 '삶의 정치(life politics)'와 연계되는 다양한 주제와 이슈들이 좀 더 세분화되어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남성위주의 담론과 주제 그리고 남근주의적인 화법을 생산해내기도 하는 논객사이트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여성논객과 소수자논객들을 적극 발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논객사이트의 운영면에서 이들은 아직 안정적인 수익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논객사이트들이 외부에서 오는 압력에 저항하고, 전문성이 있고,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수준의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논객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취약한 수익모델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론 많은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들이 광고와 법인화를 통하거나 후원인제도를 통해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고자 현재 노력하고 있지만,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연구자들인 최영묵 그리고 윤태진이 지적하듯이,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특수한 정치국면을 제외하고는 논객사이트의 미래가 아직은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인터넷 정치컨텐츠만으로 재원을 확보하기는 그 가능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온라인상의 논객사이트와 정치웹진들은 유료독자의 확보와 오프라인의 매체들과의 전략적인 제휴나 연합을 통한 지면확보나 출판등의 형태를 통해 시너지효과의 창출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넷째, 정치웹진이 표피상의 객관주의나 양시론이 아닌 어느 정도의 당파성과 정치적인 경향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현실개입적인 글과 정치적인 언설들을 제공하는 것은 보수적이거나 상업화된 언론매체가 아직도 강세인 현재의 오프라인 미디어 지형을 고려할 때 강점이자 웹진들의 존재이유가 될 수 있다. 집요한 문제제기와 심층적인 해석 그리고 감정이 투하된 논객들의 글은 정치웹진의 강점일 수 있다. 하지만 시비와 편가르기가 주를 이루고 숙의(deliberation)가 결여된 웹진의 공간은, 언론학자인 이상길이 지적했듯이, '논쟁의 게토'로 전락할 수 있다. 동시에 글쓰기의 스타일과 내용면에서 현재 웹진들이 제공하는 담론들이 사회적 팩트와 주장 그리고 감성이 잘 어우러지거나 균형을 이루는 글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교육수준이 높은 독자들과 기존언론으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음에도 - 즉 수준높은 정치담론에 관한 수요가 있음에도 - 논객들의 글이 아직은 제한된 의제설정능력과 설득력을 행사한다는 측면과도 관계된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등의 인터넷 미디어가 이제는 주류미디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상당할 정도의 영향력과 인지도에서 급성장을 했다면, 정치웹진들은 아직은 의제설정과 정치담론의 생성면에서 그리고 운영면에서 과도기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온라인상에서 보다 균형적인 언론의 형성과 왜곡되지 않는 언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는 대안언론 그리고 '독립언론'으로서의 정치웹진과 논객사이트들 역시 현실정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차원의 사회적인 관심들을 견인하면서, 동시에 정당이나 특정 정치행위로 상징되는 현실정치와는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논리와 주장을 제공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 발제문은 한국언론재단 2003 연구보고서 <온라인 정치컨텐츠 연구>중에서 발췌된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보고서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지승호, 이상길, 최영묵, 윤태진, 이창현, 이창은, 변희재, 서영석, 안병영, 노혜경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필자 주


* 필자는 언론학 박사로 <언론재단> 연구위원입니다 

* 본문은 <브레이크뉴스> 창간 5주년 기념으로 2월 27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   '인터넷논객과 당파성,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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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총선 의미와 노동운동의 과제


노회찬(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선대본부장)

편집자 이재영

1. 2004년 총선의 의미와 민중운동

2004년 4월 15일에 치뤄지는 제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이라 말할 수 있다.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창당 직후에 치뤄진 제 16대 총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당을 확대 강화해 왔다. 그리하여 2002년의 지방선거에서 8.13%의 정당득표율을 얻고 일약 제 3당의 위치를 차지했으며, 제16대 대선에서 당의 정책과 이념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성공하였다. 국회의원 한 명 없는 원외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짧은 기간에 이같은 진전을 거둔 것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정치사의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첫째, 당내 민주주의와 진성당원제 등 조직운영과 재정에 있어서 진보정당 특유의 원칙을 처음부터 관철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둘째, 노동자, 농민 등 서민대중의 이해에 기반을 둔 차별화된 정책활동과 당의 주객관적 조건에 철저하게 조응한 선거전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셋째, 계급대중의 생존권투쟁에의 결합과 지역 주민을 파고드는 지속적인 일상활동을 병행한 결과였다.


창당 3달만에 지구당체제도 채 갖추지 못한 채 "한 석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2000년의 제 16대 총선과 달리 이제 민주노동당은 창당 3년 동안의 급속히 성장한 조직기반과 대중적 인지도 속에서 2004년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선거를 앞두고 전농의 조직적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그간 취약지역이었던 농촌에서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 위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총선은 민주노동당의 헌법투쟁 결과로 쟁취한 1인 2표 정당투표제가 최초로 실시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이루리라는 것은 이미 기성사실이 되고 있다.

2. 포스트 3김 시대의 개막과 2004년 총선

노동자, 농민 등 민중운동진영에게 2004년 총선이 진보정당의 원내교두보 확보라는 의의를 갖는 반면, 보수 기득권 세력에게 이 총선은 포스트 3김시대의 본격적인 세력재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987년이래 지난 15년간의 한국정치는 영남, 호남, 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3김씨의 지역패권정치로 일관되어 왔다. 정경유착과 금권선거 등의 부패정치, 망국적인 지역할거정치, 보스 중심의 붕당정치는 3김정치의 자화상이었다. 노무현정부는 김영삼, 김대중정부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과 신자유주의의 관철이라는 양대기조를 계승하고 있지만, 포스트 3김시대라는 새로운 정세의 첫 국면에 놓여 있기도 하다.


포스트 3김시대의 특징은 첫째, 지역패권 구도의 완만한 해체이다. 현실정치에서 3김이 사실상 퇴장함에 따라 광대 지역의 패권을 재생산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둘째, 3김시대 보스정치의 실질적 기반이 의회권력을 재생산하는 지역패권이었기 때문에 포스트 3김시대는 곧 보스정치체제의 와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여당을 수직적 통제하에 두던 시대는 과거가 되었으며,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의 대표가 비보스형, 비주류출신인 것처럼 더 이상 3김과 같은 강력한 보스에 의해 장기간 유지되는 정파는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셋째, 지역패권정치, 보스정치의 해체는 곧 정경유착과 금권정치에 의한 부패정치의 시스템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패정치의 청산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정치개혁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그간 금권정치의 수요와 공급을 지역패권정치와 보스정치가 담당해 왔다는 점에서 포스트 3김시대는 부패정치의 완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보수기득권 세력은 한편으론 구시대적 기득권인 지역주의에 최대한 의존하면서 동시에 시대적 요구인 정치개혁을 일정하게 수용해야 하는 모순된 조건에 놓여 있다. 또한 보수기득권 세력은 이라크 파병, 부안핵폐기장 설치, 자유무역협정 체결, 노동시장유연화 등의 문제에 있어서 대국민(민중) 전선을 형성하며 일치단결하는 한편 대선비자금, 선거법 협상 등에 있어서는 주도권 다툼을 위해 치열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국정치에 있어서 여소야대는 3김시대 이래의 일관된 현상이지만, 포스트 3김시대의 여소야대는 의회권력 장악을 통한 권력분점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의미하는 바, 제 17대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기 위한 보수기득권 세력 내부의 경쟁과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화될 전망이다.

3. 2004년 총선과 노동운동의 과제

노동운동에 있어서 2004년 총선의 목표는 신자유주의로부터 민중생존권을 수호하는 전선의 확대강화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을 고취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노태우정부 이래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김영삼정부에서 제도화되고 김대중정부에서 본격적으로 관철되기 시작하였으며 노무현정부 역시 이를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가 누적되면서 비정규직의 급속한 증가, 농업의 해체, 소득 및 재산의 양극화 현상 등 민중 생존권에 대한 위협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운동기반을 해체시키는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은 개별자본에 대한 투쟁에서 목숨을 건 극렬한 저항이 전개되었던 반면 총자본에 대한 전선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낳아 왔다. 정치세력화를 총자본에 대한 전선의 강화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막아내기 위한 전선의 확대 차원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적 공세 하에서 노동운동의 기반마저 위협받고 있는 지금 노동이 집중해야 할 실천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을 확대강화 시키는 일이다. 개별자본과의 전선에서 목숨을 건 사활적 투쟁을 벌이면서 총자본과의 투쟁에선 적전분열하는 모순된 상태를 급속히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간 의회주의니. 개량주의니 하면서 정치세력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치사상의 자유니, 배타적지지 철회니 하면서 진보정당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관념적 시비는 결국 총자본에 대항하는 전선을 약화시키고 노동자들을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영향하에 묶어두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할 시점이다.


정당운동과 조합운동은 운동방식과 원리가 다를 수밖에 없지만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아직 당건설기를 채 경과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운동이 진보정당운동의 발전을 위해 인적, 물적 지원을 담당하는 것은 당분간 지속되어야 할 의무이다. 이런 점에서 2004년 총선에 민주노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총선후보를 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총선을 위한 1회용 후보를 내는 것을 넘어서서 직업적인 당활동가를 만들어내는 데도 더 많은 의무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상급조직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당원모집에 나서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과 의지를 갖고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는 이익단체와 정당간의 관계와 다르다는 대전제를 재확인해야 한다.


또한 노동운동은 진보정당의 성장을 위한 제도개선투쟁의 주요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세계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운동이 노동시간단축투쟁에 쏟은 노력 이상으로 진보정당을 위한 제도개선투쟁을 담당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진보정당을 노동운동과 계급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와 경제, 정당과 노조라는 기계적 이분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정치제도개혁투쟁이 노동자대회의 주요 슬로건에도 들지 못하는 일은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 전경련이 정치관계법 개정을 위한 전경련의 요구를 명확히 공표하는 데 반해, 노동운동에선 이를 정당의 고유활동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개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조직의 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전략과 방침을 수립해가야 한다. 노동조합조직이 분립된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단결은 근본적인 취약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2004년 총선을 통해 한국의 노동운동은 국회 내에 투쟁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투쟁과 의회투쟁을 병용하는 운동의 새로운 발전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낡은 방식, 낡은 사고로는 운동의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밀려오는 새로운 정세를 대응하기 어렵다. 2004년 총선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을 획기적으로 확대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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