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부터 오늘까지 경찰서 출입한지 스무날째다.
흉칙한 사건들을 연일 접하고 있다. 인구 18만이 채 안되는 이 지방 소도시에도, 하루 평균 교통사고는 3건이상 일어나고, 단순 폭력사건도 두 세건 남짓. 최근엔 부부싸움 도중 공기총 연발로 아내를 살해한 사건과 흉기를 휘둘러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 등... 무서운 일들을 접하게 된다. 물론 나야 형사들에게 간접적으로 듣는 일이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엔 강력계 모 형사에게 어제 구속영장 신청에 들어간 강제 추행사건 결과를 묻다가 시체 부검사진을 엿보게 됐다.
'아 이거 무슨 사건이지? 국과수에서 보내온 공문인데, 무슨 사건인지 알아볼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까발려진 배와 뇌, 인체의 신비 전시회를 관람하는 듯한... 시뻘건 생체내부가 드러난 사진들이 수십장이다.
'뭔가 큰 거 같은데....'
"어제 성추행 사건 기각됐다구요? 피의자 풀려났겠네요?' 질문은 연발...
내가 엿보는 걸 알아채곤, 모 형사 서류를 은근슬쩍 서랍속으로 집어넣어 버린다.
'C발... ' 이런 식이다. 별것 아닌 것도 안갈켜주기 일쑤다. 근데 이건 낌새가 이상하다.
최근에 취재한 살인사건의 부검 결과이겠지... 추측만 할 뿐이다.
형사에게 뭔가를 알아내야 하는 것, 이게 경찰출입 기자의 능력이다.
적당히 둘러치기도 해야하고, 상대 취재원의 머릿속을 꾀뚫어보기도 해야하고.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난 그런 치밀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인간이다.
그래서 괴롭다. 어디서 유유자적하며 살고싶은데...
지난번엔 보도팀으로 항의까지 받았다.
한 고등학생이 한밤중 침입한 강도에게 흉기로 얻어맞아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에 따르면 20대로 추정되는 강도는 달아났고, 고딩은 아쉽게도 강도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사실, 같은 출입기자 선배에게서 듣고, 자세한 걸 경찰에 확인도 못한채 보도가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기사를 쓴 것이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다음날 오전 경찰서 상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고딩의 어머니가 담당형사에게 왜 방송에 나갔는지 항의전화를 수차례 했단다. 그리고 누가 기사를 썼는지 그 기자에게 당장 전화해달라고 했다는 것. 담당형사에게 전화했다.
" 범인은 아직 못잡았나보죠?"
"네.. 모군 기사 기자님이 쓰셨습니까? 어떻게 알고 쓰셨죠?"
"그야 수사일지 보고 썼죠." 흠... 수사일지도 못봤는데, 거짓말로 대응.
"저한테 확인이라도 하고 쓰시죠." 참, 모군 부모한테서 항의 받았지요? 싫은 소리 하더라도 좀 참으세요"
허걱 이게 무슨 말... 담당형사 당당하게 선수를 친다. 범인 잡았냐는 내말에는 대답도 않은 채...
가슴이 뜨끔하다. 이렇게 허를 찔리다니.
"저야 제 할일 한것 뿐입니다. 범죄 재발방지 차원에서 기사는 써야지요."
임기응변으로 뻔뻔스럽게 넘어갔지만 머릿속은 복잡하다.
그리고 오후에 역시나 모군의 어머니 전화. 말안해도 뻔할 뻔자. 나한테 사과하란다.
"당신 때문에 우리 애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허걱... 내가 범인이라도 되는 것 같다.
상대방이 격분해 있을 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선 그 사건은 경찰에 접수된 사건이고, 그 사건을 안 이상 보도를 안할 수는 없습니다. 재발방지차원에서로도 우린 보도해야 하고요. 그리고 그 사건기사의 경우 사생활 보호을 위해 최소한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주변 분들이 알고 계시다면 그건 방송때문이 아니라 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미 담당형사에게 나의 헛점을 들은 모군의 어머니.
"뭘 잘했다고 큰 소리에요? 당신, 그래도 적어도 피해자인 우리한테 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당장 사과하세요. "
허거덕.. 맞는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 기사를 쓸때, 피해자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고 썼던 것이다. 후회막급.
요며칠 경찰서 출입을 하면서, 사는 게 회의적이었다. 처음엔 보도팀 선배에게 듣는 잔소리와 소닭 쳐다보는 듯한 형사들의 반응에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건지, 깜깜했고,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도무지 싫었던 것이다. 또 몸은 몸대로 힘들고... 다음날 아침의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었다. 뭐 여전히 그렇지만.
오늘 점심, 짬뽕을 시켰는데... 아침엔 멀쩡했던 속이 니글거려온다. 벌건 부검사진이 떠오른다.
내일 아침, 사건사고는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