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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실존주의를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모두 이해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이 얇은 책도 완벽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가 말했던 실존주의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단 한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위의 문장이 아닐까. 결국 지금 너의 모습은 온전히 너의 책임이고 너의 몫이다, 라는 말인데. 곰곰히 되씹으면 매우 비정하고 섬뜩한 정의다. 결국 지금 니 꼬라지는 모두 너의 성품이 천박하고 저급해서 라는 뜻인데...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서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자기 행동이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므로 항상 깊이 고민한 후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삶과 인생, 나와 상대방, 그리고 우리에 관해 되씹어 보고 되짚어 생각하며 어려운 숙제 속에 살았을 터이다, 그는.
그런데 나는 그의 실존주의를 쬐끔 읽고 나니 왜 주변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지? 너는 맨날 그 따위로 하니까 그거 밖에 안 되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고 너가 없으면 분위기가 훨씬 낳고 사람들도 행복해 하고 너 성격 드러운 거 알면 제발 좀 고쳐야 되는 거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사니까 한심하다 소리 듣는 거고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해도 되는 건 아니고 말해주지 않아 모른다고 하는 니가 또다시 한심해지고 주변에서 아무도 잘못된 행동에 대해 조언해 주지 않는다니 그것 또한 경멸스럽고. 이런 심정이다, 대충.
조금 생뚱맞지만 어제 내 아내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 혼자서. 여주인공 연정인이 말하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무도 공감이 가서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하다가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두 번이나 봤다. 정확하게 기재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부분에 정인이가 이런 대사를 한다.
어차피 모두 힘겹게 이 세상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살아야지. 민폐 끼치지 않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거든.
각고의 노력. 온 우주 속 자신의 작은 위치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힘겹게 버티며 살아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굳이 또 쓰러뜨리지 않는 것. 그것은 단순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고 그것은 끊임 없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앙가주망이 절실히 필요한 일.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며 비웃을 필요는 없는데,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그릇이 작은 탓인지 냉소를 보내게 된다. 그랬더니 또 속도 시원하고 체증이 훅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꼬라고 힘들게 실존주의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 같은 독자가 있다는 걸 사르트르는 알기나 할까.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하는데 어떤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내 인격의 그릇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 부끄럽다는 식의 상투적인 말은 죽어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에라 모르겠다, 난 이러고 살련다며 끝내는 것도 무언지 찜찜하고... 그래서, 오늘은 고민중.
p.s. 이런 고민의 만분의 일도 아까운 자들이 있다, 분명.
* 앙가주망
인간이 자기 고유의 상황에 대면해서 자신의 전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그 상황을 변경하거나
유지 또는 고발하기 위하여 행동할 것을 결심하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