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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이 만져봤으면 좋겠어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내다니... 시인이란, 모든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사람.
한 장의 그대 사진과 라일락나무와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했으면 좋겟어
사랑이 이와 같다면. 약혼과 결혼, 누군가와 발 맞추는 것이 라일락 향기와 같이
은은하고 달콤하고 조용하다면.
생에 그리고 사랑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흰 치아 몇 톨이 보인다
질투와 연민으로 가슴이 에인다
5살배기 조카를 보고 나도 부러운 마음이 들고, 한 편으로는 나처럼 아픈 일을
당하지 않고 지금 모습 이대로 티없이 맑았으면, 생각했는데.
나도 저렇게 써 볼걸.
그래도, 시인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으니 내 감수성도 아예 무디진 않은 것으로
혼자 만족!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와, 이런 표현들이란!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이런 때가 있다, 나도.
다행이다 많이 슬프거나 외로울 때에는
바닷물 아무리 덮쳐와도 물 속 물고기처럼
다시 또 아무 일 없는 아늑함으로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내가 뽑은 최고의 구절.
세상 일들 무얼 믿고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언제나
오직 불행이란 풀언덕을 믿고서였다.
그래서, 삶은 조금 슬프다.
배반의 총보다 권태의 장미가 더 불길해
얼굴을 뜯어고치고 싶어 치욕이 더는 못 알아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