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서평을 쓰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이번 책은 반도 채 읽지 못했다.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 혀를 빼고 매달린 주검들,  팔이 잘려나가고 눈이 뒤집히고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잔인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이 책은. 수잔 손택이 무언가 좋은 말들을 잔뜩 써 놓은 것 같아 꾸역꾸역 밑줄까지 쳐 가면서 읽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포기했다. 밑줄조차도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어 놓은 구절들을 다시 캐내지도 못했다. 다시 책을 펼쳐들기가 무서워서. 조금이라도 피가 나오는 영화도 못 보는 나에게 타인의 고통을 이리도 적나라하게 직시하라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유난히도 나만의 문제에만 함몰돼 있는 것이. 그래도 20 대에는 신문도 많이 읽고 100분 토론도 보고 괜히 열을 내면서 사람들과 논쟁을 하기도 하고 사회과학 서적도 많이 읽고 우리 사회와 인류 발전과 세계 평화와 같은 공허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곤 했었는데. 요즘엔 먹고 자고 회사 나가고 소설 읽고 또 먹고 자고 회사 나가고 집에 와서 소설을 읽는, 먹고 사는 일과 약간의 취미에만 몰입한, 이성이라고는 없는 개, 돼지의 모습을 완벽히 재연한,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삶을 실현하고 있다. 경멸해 마지 않던 삶이었는데. 이래서 남 욕 할 거 하나 없나 보다.

20대와 30대의 열정이 다르고 먹고 사는 일이 퍽퍽해서 그럴 수 있다지만 내 자신이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 누구에게 눈길을 주느냐에 따라 나의 삶과 생활방식과 가치간과 인격과 집중이 달라지므로.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열정과 에너지와 마음이 응축된다. 눈을 감아버리거나 얼굴을 돌려버리면 아무리 큰 문제도 금세 기억에서 사라진다.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 인생은. 눈을 감아버리면 외면할 수 있으니.

지금 내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일까. 나의 목숨부지, 나의 밥줄, 나의 안락함, 나만의 행복, 나의 불안한 미래, 나만의 꿈, 나만의 소망, 나만의 욕심. 예전에는 사랑과 애정과 온기와 나눔과 관심에 집중하고 싶었었던 것 같았었었는데. 그랬었던 것 같았었었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내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무언가 의미있는 일, 무언가 가치 있는 일, 무언가 남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들. 내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곳을 서성이고 자꾸만 이리 저리 두리번 거리는 이유. 계속해서 직업을 바꾸고,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이유. 이곳에서 철저히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이유.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내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이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