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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요즘의 화두는 '결핍'.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아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성격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는 결핍과 관련된 주제들. 많은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왜 뜬금없이 '결핍'에 집중하게 됐느냐. 그 이유는 가진 것 없는 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이나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 따위가 아니고, 부끄럽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뼈저리게 다가와서, 다. 무언가가 없어보니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새삼 몸으로 직접 경험해 봤다고 할까. 미리 좀 이타적인 면모를 보여 타인의 결핍에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공허함을 토닥토닥 두들겨 메워줬으면 내가 직접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됐을까? 간접적으로는 타인에게 공감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 나의 이기심 때문에 신이 나에게 결핍에 관한 직접 체험 기회를 주신 걸까. 그런 거였다면 진작에 무엇인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에 미리 관심을 좀 둘걸 그랬다. 결핍을 몸소 체험하는 건 꽤나 서러운 일이니 말이다.
필요한 것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람을 하염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들고 서럽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것이 무엇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직업이든,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건강이든, 애정이든, 사랑이든, 집이든.
내 경우를 직접 예를 들어보자면, 권력과 명예와 그럴 듯한 간판. 이것이 요즘 나를 괴롭히는 결핍이다. 그 동안은 그래, 아둥바둥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큰 집을 사고,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무언가 그럴듯한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 허덕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는 성공과, 내가 바라보는 성공은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 내가 만든 나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미련을 버리고 나만의 비전을 세워 차근차근 나만의 성공을 향해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던 거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단순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물욕적인 욕망에 휩싸였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야 했나보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이 나를 자기 밥으로 안다. 그래서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나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편의대로, 자기들 필요에 맞게 나를 써먹었다 버렸다 뒤집어 씌웠다가 밟았다가 그러고 논다. 아, 세상의 이치가 이러해서, 약자를 마음껏 짓누르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유유자적 욕심을 버리고 산다해도,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으니, 적어도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져야 하는구나, 라는 슬픈 생각. 요즘에서야 깨닫는다.
'결핍'이란 이리도 모욕적인 것이로구나. 내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지킬 수도 없고, 당당히 내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 낸다 한들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치욕적인 상황. 단순히 힘들고 고달프고 서럽다라는 감정을 넘어 입술이라도 꽉 깨물고 싶을 만큼의 모욕. 적어도 누군가가 나를 가지고 놀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길러야 겠다는 생각들.
절름발이 주인공은 얼마나 더 입술을 꽉 깨물었을까. 절름발이, 라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는 것을 안다. 부러 이 단어를 사용했다. 절름발이, 절름발이, 라고 놀려대는 사람들 틈에서 주인공은 얼마나 화가 났으며, 상처를 받았고, 분개하는 동시에, 건강한 다리를 얼마나 바랬을지. 나중에서야 주인공이 단단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성숙해져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그 과정은 어찌나 험난했던지. 가만보면 우리는 타인에게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하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