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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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 사랑에 속아 모든 것을 잃은 순진한 사람. 자신의 이기심으로 상대방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잔인한 사람.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혜안과 타인의 관심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담대함, 강건함. 과거의 상처나 어리석음 따위에는 눈물 짓지 않을, 질기고 꾸덕한 심장.

이런 뻔한 서평을 쓰면 너무 지루하겠지? 뻔한 사랑이야기에 뻔한 서평이라니.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려고 한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을 버리고 그저 잠깐의 놀이 상대로밖에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에게 속아 헌신적인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다니.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또 중얼거리다니. 서점에 넘치고 남쳐나는, 누구나 다 아는, 사랑에 속고 속이고 눈물짓고 죽어버리는, 진부한 이야기를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기술하다니! 이런. 이야기꾼이라 칭송받는 작가들이 많이 있지만 최고의 입담꾼은 서머싯 몸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여자의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한 줄 한 줄, 행간 행간, 여성이라면 모두 한 번쯤 느끼고 경험해 봤을 묘사들.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할 수 없었던,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장면, 장면들. 내 발등을 내 손으로 찍고 싶을 만큼 끔찍한 후회들.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으면 서술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단계별 여성의 심리를 마치 자신이 실제 겪은 일인 양 촘촘하게 엮어냈다. 게다가 수도원의 분위기나 죽어가는 중국인들, 바이러스와 밀림, 그 외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서머싯 몸의 글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아직도 못 다한 말이 더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의 활자들은 언제나 풍성하고 생생하다.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그저 그런 소설로 완벽히 완성시키듯, 나의 지난하고 지리한 시간들과 하루하루도... 언제나 완벽히 예상 가능한 나의 하루하루를 어제와 같은 뻔한 오늘로 만들지 않으려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만든다거나, 통통 튀거나 유쾌하거나 흡입력 있거나 특별한 무엇인가를 집어 넣거나 아니면 정신 못차릴 정도로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만들거나.

무언가 신나는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뭐 뻔하면 어때. 뻔하더라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의 뻔한 줄거리도 필요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이야기가 아닌, 내 입으로,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겪은 시간들, 경험들, 순간들. 뻔하든, 뻔하지 않든, 타인이 아닌 나의 몸으로 겪어내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내 목소리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지러운 잡념들.

다만 필요한 것은 판에 박히고 지극히 일상적인 나날 중에서도 얼마만큼, 나만의 이야기를 지어낼 것인지. 사소한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에 내 눈길을 줄 것인지. 이런, 이 소란한 산만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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