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서울 중심가로 이사를 왔을 때 그녀는 부드러운 헤이즐넛 향 포푸리를 집 곳곳에 놓아 두었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헤이즐넛 향 때문이었는지 왠지 우리의 삶은 한 계단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었다. 평소에 아기자기하게 소품을 챙기는 편이 아닌 그녀는 그날따라 왠지 우아해 보였다. 아마 그 헤이즐넛 포푸리는 내가 유일하게 보았던 그녀의 데코레이션이었고, 아마 그녀도 그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인테리어였을 것이다. 냄새에 예민한 나는 인공적인 향이나 포푸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날 이후부터 헤이즐넛 향만큼은 나도 구입해서 방에 뿌릴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향기가 되었다.

옷 입는 센스가 나보다 훌륭하지만 집에서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는 여자.
한여름 이글거리는 땡볕에도 아무렇지 않게 장을 봐 올 수 있는 여자.
힘들다고 하면서도 꾸역꾸역 집안일이며, 손자 봐 주기를 억척스럽게 해내는 여자.
그러다가 이제는 툭하면 코피를 흘리는 여자.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걱정해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면서도 정작 몇 푼 안 되는 헬스클럽은 돈 아깝 다고 등록을 못하는 여자.
밖에 있다가도 누구 밥 차려줘야 한다며, 휑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
여행을 좋아해 교회에서 놀러갈 건수가 있으면 웬만하면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
그래서 이렇게 노는 걸 좋아했었나, 나를 당황시키는 여자.
한 때는 날씬하고 예뻐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여자.
이제는 근육이 흐물흐물해져 힘이 없는 여자.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자.
그래서 나도 그녀처럼 아기자기하지 않게 키운 여자.
사는 게 버겁고 힘들었던 여자.
그래서 나를 눈물 나게 하는 여자.
나로 하여금 유럽여행을 포기하고 조카를 보는데 내 황금 같은 휴가를 쓰게 하는 여자.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나를 움직이는 여자.
이 세상에서 나를 이기는 유일무이한 여자.
나의 아킬레스건, 나의 눈물, 나의 절대자.

늦지 않게, 후회 되지 않게, 마음껏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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