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원 산책 -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오경아 지음, 임종기 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런 책도 읽는다, 이제. 최근 들어 책 취향이 많이 바뀌었는데, 그 순서는 이렇다.

한동안은 소설에 마음껏 빠져있었다. '마음껏'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 읽기를 의식적으로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보다는 무언가 생산적인 독서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성장과 생산, 경쟁과 효율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교육받은 대한민국 공교육이 피해자답게! 경제적으로 혹은 지식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에만 몰입했었다. 이야기 나부랭이를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으로. 그러다가 나 좋아하는 일 마음껏 해보자, 라는 생각을 갑자기 어찌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계기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무언가에 쫓기지도 않았고, 당장 준비해야 할 시험도 없었고, 놀 권리가 보장됐던 어린 시절처럼, 원하는 소설을 실컷 읽기 시작했다.

다음은 에세이로 넘어갔다. 에세이라니!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 고 피천득 님의 교과서적인 수필도 아니고, 신영복 선생의 심오한 수기도 아니고, 그냥 누군가가 술 마시고 끄쩍거려 놓은 에세이라니. 오늘 밤 바람은 어쩌고, 문득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 향은 어쩌고, 혼자 떠난 기차 여행에서 느끼는 서러움이 어쩌고, 이런 글을 읽기 시작했다니. 내 참!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도, 그 책을 사보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가더만 요즘엔 내가 덥썩 에세이를 집어 든다. 그저 그런 사진만 잔뜩 있고 한 페이지에 몇 글자 있지도 않은 '가벼운' 책들을. 책을 편 채로 멍, 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 요즘.

그러다가 이제는 급기야, 사진집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사진만 잔뜩 찍어 놓은 책. 어려운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 있어야 책 읽은 의미가 있다고 여겼던 내가 사진집이라니. 30페이지 읽으면 진빠지던 법서 정도는 돼야 책인데 사진집이라니! 갑자기 법서에서 사진집으로 건너 뛴 것은 아니고 에세이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집에도 눈길이 갔는데, 더 큰 이유는. 여러 곳을, 여러 사물을,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 직접 보지 못하니 이렇게 사진으로라도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 사진집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내가 닿아보지 못한 장소, 앉아보지 못한 벤치,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공기들. 사진으로나마 그 곳에 한적히 앉아보고 싶어서.

그러다 내 손이 집어든 책이 영국정원에 관한 책이다. 조용하고 한적한 산책길들, 고풍스러운 건물들, 아기자기한 나무들, 잘 정리된 잔디밭, 군데군데 보이는 색색의 키 낮은 꽃나무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 적당히 살랑거리는 바람결,  녹음이 주는 향긋한 풀내음. 요즘 내가 욕심 내는 것들이다. 신선한 녹지공간이 필요한 건지, 조용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 혹은 소란스러운 일상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평화로운 충전이 필요한 건지. 삭막한 서울 한복판에서 싱그러운 나무 내음이 그리워, 한 장 한 장 내 발걸음이 닿을 수 없는 공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해 질 무렵, 조용한 영국의 한 공원을 홀로 산책하는 나를 상상하며.

바람은 부드럽게 내 볼을 간질이고, 적당한 온도의 공기는 포근하다. 해가 기울어 가는 순간의 알 수 없는 긴장감. 무언가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은 두려움과 떨림의 시간들. 그 공기의 짜릿함을 나는 사랑한다. 시끄러운 벨소리나 신경질적인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적함. 드문 드문 저녁 무렵의 공원 공기를 마시려는 나와 같은 사람들. 사그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나 잔잔하게 흔들리는 호수. 달콤하기도 하고 싱싱하기도 하고, 약간은 허기를 느끼게 하는 풀냄새. 내 상상속의 공원들.

감각이 되살아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