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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이런 우스갯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부모 세대들이 부동산 가격을 부풀려 재테크를 한 덕에, 그들의 자녀 세대들은 도저히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집값 때문에 결혼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부모들의 욕심과 탐욕이 결국은 자식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꽤나 희극적이어서 한참을 웃은 기억이 난다.
비단 부동산 뿐만은 아닌가 보다. 영화, 언론, 네일아트 등 조금 특수해 보이는 분야 뿐만 아니라 일반 사기업에서도 젊은이들의 피를 빨아 수익을 내는 잔인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하니까, 요즘 취업이 어려운데 뽑아준 것만도 감사한 일이니까, 이런 식의 논리로 기성세대는 시퍼런 젊음을 악착같이 빨아들인다.
그냥 책에만 나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경력이나 좀 쌓아보자고 들어갔던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서 말 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 강도 높은 업무를 군말없이 소화해야 했다. 기자로 들어 갔지만 나는 취재는 물론, 대본도 쓰고 카메라 영상도 찍고, 편집도 하고, 섭외도 하고, 기자, PD, 카메라맨, 작가, 진행 등 혼자서 말도 안 될 만큼 많은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그래, 일 많은 거야 뭐 그냥 고생한다고 치는데, 기자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연봉에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은 참겠는데, 그런데 카메라 맨도 시키고 편집까지 하라니. 젊은 청춘들의 꿈을 이용해 기회를 주는 척, 하면서 그들은 나의 능력과 열정을 마음껏 착취했다. 돈은 돈대로 못 모으고 맘고생은 맘고생대로 했던 그 시절. 그러나 그러고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기자였고, 그 목표를 위한 중간 과정이었기 때문에 내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메이저 언론사에 시험도 간간이 보면서 버티다가 6개월 하고 때려쳤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빨리 메이저로 진출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에도 난 고작 6개월 하고 회사를 때려치는 참을성 없고 인내심 없는 의지 박약자라는 비난을 여기저기서 받아야 했다.
기자로서 대성공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사회에 끼치는 거물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졸업 후에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많은 직업 중 나는 기자를 선택한 것 뿐이다. 특이하다고 하면 특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뭐 하늘의 별따기를 할 정도로 희귀한 직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높은 진입 장벽, 극심한 취업난, 인건비를 줄여 수익을 높이려는 비인간적인 경영자 마인드, 이런 것들이 뒤엉켜 나의 언론고시 준비 기간은 하루하루가 눈물이었다.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청년들, 무언가를 꿈꾸는 청춘이라면 기성세대들의 쥐어짬을 적어도 한 번씩은 다 경험했을 것이다. 왜 수익은 인건비를 줄여서 내야 하는지, 정당한 인건비를 제외한 나머지가 수익이어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인건비를 주면서 수익이 높다고 기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열악한 대우로 인해 꿈꾸었던 청년들은 좌절을 맛보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보험 영업사원으로 현실에 내몰린다. 한창 20대에 꿈을 꾸었던 청년들은 30대에 만신창이가 돼 꿈을 잃고 희망을 잃고 혈기 없는 샐러리맨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이제, 이 땅에서 무언가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뼈저리 느끼면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이런 샐러리맨들이 만든 대한민국은 그래서 늘 칙칙한 회색빛이다. 꿈도 환상도 희망도 없는, 찬란한 무지개가 사라진 폐허.
개개인의 열정이 없어서,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 현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개인을 탓할 일은 아니다.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서 일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집값은 치솟고, 물가는 자꾸 오르는데, 언제까지 메이저 언론사만을 바라보고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우리들의 많은 인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스러지는 젊음들. 생기 없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우리들. 마음이 아프다.
* 신랄한 비판이 내 입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이 정도다. 뭐 어쩌겠냐... 는 체념이다. 현실은 요 모양 요 꼬라진데, 쉽게 바뀌지도 않을 거고, 바뀔 수도 없는데, 열 내서 뭐하냐는 생각이다. 내 앞 선배들처럼 나도 이제 좀 지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