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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따뜻한 사람이다. 20대 비주얼 좋은 남녀 배우들의 로맨스 드라마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요즘 시대에 그녀는 뚱딴지처럼 동성애자를 이야기한다. 아직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녀는 동성애자들의 소외감과 아픔을 논한다.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쿨하게 과거 따위는 잊는 요즘 세태에, 그녀는 계속해서 예전에 스친 사람을 생각한다. 그때 내뱉었던 말들이 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이었는지를 곱씹고 곱씹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그를 만나면 생기있는 얼굴로 악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만이 옳다고 생각될 때, 그 때는 나이 먹은 거라며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더 옳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점점 어려지는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힘든 시기도 있었다. 새파란 청춘 시절, 비릿내 나는 청춘을 어이할 줄 몰라,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자신을 쓰레기라 여기며 길바닥을 서성이던 적도 있었단다. 바람 피는 아비에게 대들기도 하고 아비를 무시하기도 하고 그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참, 태어나자마자 차디찬 윗목에 며칠 동안 놓여 그저 죽어주기를 바랬던, 그런 어미도 있었다. 축복받지 못한 삶이었다. 고비고비 마다 얼마나 아팠을 것이며, 그 상처들은 또 얼마나 깊이 그녀의 여린 가슴에 박혔을까. 세상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싶을 것이고,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하거나, 울고 싶을 것이다. 가끔은 아무데나 대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도 있을 테다.
이런 그녀의 고민이, 세상에 할 말이 있는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는가... 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함부로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시리고 눈에 밟히고 그저 사라지기만 하는 것들이 안타깝고 낯설 텐데. 평범하기 그지 없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에 반응하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거슬릴 그녀다. 세상이 쓰레기로만 보여 답답해 하는 청춘들에게, 나도 그랬다...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다 못해 세상에 대한 한탄과 원망, 욕지거리라도 내뱉을 수 있는 그녀다. 그런 그녀가 할 말이 없다니.
그럼 나는... 나는 할 말이 있는지. 하고 싶은 말, 해야겠다는 말이 꼭 있는지. 뭘까.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며 나만의 쳇바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나는, 세상에 해야 할 말이 있을까. 잠시 했던 기자질이 피곤했던 것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에 간섭하는 게, 아는 체 하는 게, 그리 기웃거리는 게 힘들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 개인주의자, 나와 얽힌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해관계자, 철저한 군중 속 개인. 나 아닌 타인의 일에, 타인을 넘어선 세상일에 기웃거리기엔 난 너무 게으르고 오지랖이 좁다. 나불거리기 좋아하고 지껄이기 좋아하는 내가 요즘 들어 침묵하는 이유는 바로 나의 좁은 오지랖에 있다. 나에게 세상은 너무나 넓다.
작가란, 오지랖 넓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꾸만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고, 내 일이 아니어도 막 나서서 중재해 줘야 하고, 지나가다 누가 잘못하면 지적질도 해 줘야 하고, 그러다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가서 토닥거려 주기도 해야 한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 저기 가서 나불거릴 만큼 가벼운 입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약한 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알아야 한다. 지금껏 나쁘게만 사용했던 '오지랖도 넓다.'는 말이 새삼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