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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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생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하긴, 일생동안 자신이 헤아리지도 못할 무게를 견뎌야 하는데 어찌 단순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리진. 지나치리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녀의 삶을 대신 살기는커녕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먹먹했고 한 줄 한 줄이 머물 수 없는 나그네처럼 고달팠다.


리진.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자. 반듯한 이마와 날아갈 듯한 춤사위, 그리고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 했던 그 눈동자. 누구인들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어쩐 일인지 모두 온전치 않아 마치 이 빠진 접시처럼 이지러진 것이었다.


유리인형을 다루듯 리진을 소중히 다루었던 콜랭. 그 유리인형을 계속 안고 있지도, 그렇다고 깨뜨려 버리지도 않는 콜랭의 엉거주춤한 태도는 사랑에 대한 회의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사랑은, 그리고 여자는, 가지고 싶을 때 가지고 버리고 싶을 때 버릴 수 있는 유리인형이 아니라는 점을 많은 남성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아프다.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고 믿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치고 깨어질 맹세를 반복해가며 생을 탕진하는 남자들.'


반면 강연, 강연의 사랑은... 완전한 그녀의 편이요, 또 하나의 그녀인 듯한 그 지고지순함.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고독과 한숨은 더 큰 아픔으로 그들의 삶을 짓눌렀다.


‘다른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좁아서 너를 대신할 것이 없어.’


홍종우의 미성숙한 사랑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황후와의 사랑은 원망과 경계, 설움과 애정 등 복잡한 감정이 뒤범벅돼 서로를 아프게만 했다.


여러 종류의 이지러진 감정들... 나 역시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사람들과 이지러진 감정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왠지 모를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요한 새벽, 새하얀 벚꽃이 달빛으로 환하게 빛나는데 나 홀로 그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있는 그런 서글픔...


그것이 사랑이요, 선(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은 또 다른 불완전한 인간에게 생채기를 입힌다. 상대방은 내가 아니요, 나는 완벽한 상대방이 아니기에 인간은 이지러진 감정들 속에서 비틀거리고 넘어진다. 결국엔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고...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들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내가 아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어미새를 잃은 아기새처럼 서럽고 시린 일이다.


리진이 끝내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 타인의 지옥을 감당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자신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래도 리진을 이해했던 사람들, 특히 강연과 황후. 그들을 잃자 리진은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연의 아픔으로 인해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되씹어 보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를 타인이 아닌 ‘우리’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지러진 감정들로 인한 상처를 딛게 해주는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그녀는 본질적인 힘을 잃고 지옥을 견딜 의지마저 상실했다.


그녀가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절망감이 가슴 속 깊이 느껴진다. 아마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이 조선인인지, 프랑스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테지...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녀는 여전히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겠지...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이제 조선, 프랑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리진. 조선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었던 쓸쓸한 여인. ‘지음(知音)’을 잃고 한 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인. 나도 리진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뼈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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