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사회는 진보하고 있는 것인가. 과학과 기술은 발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과 우리 사회 구조는 과연 진보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50년 전 에리히 프롬이 제기했던 모든 사회 문제들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른 채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예로 들어보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체계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경제 체계의 성장에 유리한 것은 인간의 행복도 촉진시키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세워서 그 첨예한 모순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랜드 사태나 KTX 여승무원 사태들은 이 세상이 소유적 실존양식에 머무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고 체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교육이 아닌 단순한 암기식, 주입식 교육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은 마구 파괴되고 있다. 약 50년 전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과연 사회는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거창하게 사회를 운운할 것도 없다. 나 자신은 소유적 실존양식을 따르고 있는가, 존재적 실존양식을 따르고 있는가. 책을 조금만 읽어봐도 나 자신은 전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서를 함에도 줄거리를 알기에 바쁘고, 작가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가기 바쁜 나. 수업 시간에 필기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 내용을 그대로 머리에 주입시키는 일에 급급했던 나는 바로 에리히 프롬이 그렇게 비판했던 ‘소유에 얽매인 삶을 사는 자’였다.


그에 따르면 소유적 실존양식을 따르는 자는 가진 것을 잃을 때 자신의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는 그의 말대로 ‘나 자신을 잃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소유에 집착하고 있음 때문인가? 그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텅 비워야 진정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현실이 뒷받침되지 않은 존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진정한 자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입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유와 관계없이 존재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점은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가진 것에 의존하는 태도에서 두려움이 나온다. 자신이 가진 것을 뒤로 하고 불확실한 세계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기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을 이긴 자는 곧 ‘영웅’이 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가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일까. 일이 잘 안 풀려 봤자 지금 이 상황의 지속 아닌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일까? 나는 그 동안 나는 나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가 나를 나이의 틀에 가두어 나의 가능성을 차단할까봐 근심했다. 하지만 결국 나도 나이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나의 이 두려움과 무기력함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일까.


에리히 프롬은 또 ‘산만한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그 성격의 변화가 요구되는 사람의 경우에는 지향하는 성격변화에 상응하는 실천적 생활습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항구적인 치유는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변화하고 싶다. 당당한 사람으로, 자신감 넘치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탈바꿈 하고 싶다. 더 이상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 아닌, 남들이 뭐라 하든 확고한 나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다. 이제 조금이나마 그를 따라잡고 싶다. 나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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