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제임스 맥도널과 그의 동료는 편형동물인 플라나리아(ꂌ)로 신기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플라나리아에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러자 플라나리아는 전기충격을 줄이기 위해 몸 전체를 동그랗게 말았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하면, 플라나리아는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오그리게 된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같은 원리다.


신기한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갈아서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였더니, 다른 플라나리아 역시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고 한다.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 사실이다. 학습된 내용이 플라나리아의 분쇄된 몸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학습된 플라나리아와 다른 플라나리아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전기충격과 관련된 정보 교환이 사전에 이루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이 실험은 기억과 교감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를 이끈다. 물론 사람과 플라나리아를 일대일로 비교해서 설명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와 비약을 내포하겠지만.


몸은 기억한다. 기억은 머리만의 활동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충격적 사건/상황/사람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이미 몸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한 출현이 눈으로 들어와 정신에 의해 감지되기 전에, 몸은 서서히 눈치 챈다. 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의 출현이 정신 속에서 언어화되기 이전에, 몸은 어느새 말없는 말을 정신에게 건넨다.


기억은 몸에 각인된다. 기억은 뇌에서만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뇌와 몸이 더불어 수행하는 활동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정신보다 먼저 상황을 직감하고 파악한다. 그리고 정신보다 먼저 반응한다. 피부와 세포 속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은 정신이 주는 울림 못지않은 울림을 던져 준다. 때로 그 이상의 울림을 던져 주기도 한다.


정신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나름의 윤색을 거친다면, 몸에 남겨진 기억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유지한다. 그만큼 몸의 기억은 솔직하다. 몸은 경험하지 못한 느낌을 소유할 수 없다. 정신은 상상의 활동을 통해 과거를 변형시킨다. 그럼으로써 없던 사실까지도 존재한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몸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만을 오롯이 기억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몸은 진실하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억들 역시 몸에 새겨진다. 사랑의 기억이 다분히 시각적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기억이 많은 부분 촉각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일 터. 얼핏 보면, 사랑의 기억은 시각적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혼의 밑바닥에 끈덕지게 남아 있는 것들은 다분히 촉각적으로 응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내 몸 속에 자리 잡고 내 몸의 일부를 이룬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사랑하던 사람의 몸은 나의 몸에 화상의 흔적을 남긴다. 그의 몸은 불잉걸이다. 내 몸을 서서히 태우고, 그 자신은 하나의 숯덩이로 차갑게 식어 바스라진다.


이곳저곳이 간질거리고 화끈거려 살펴보니,

데인 자리가 여태

벌겋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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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혼자 광화문에 갔다. 가는 길은 조금 쓸쓸했던 듯하다. 가녀린 촛불 하나 들고 혼자 서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친구 녀석들은 심드렁하거나, 데이트로 정신없거나, 과외하기에 바빴다. 다들 제 생활의 빠듯함을 핑계 댈 뿐, 촛불집회는 관심 밖이었다. 문득 중국에 가 있는 한 친구가 그리워졌다. 그 녀석이라면 함께했을 텐데. 두말 않고 따라나섰을 텐데. 아니, 같이 가자고 날 이끌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리움이 한결 더해졌다.


사람과 촛불, 시청 앞 도로는 그 두 가지로 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의 숨결과 촛불의 물결이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팽팽하게 무리지어 있었다. 몸과 몸이 밀착되면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온기가 내 몸에 전해졌다. 약간의 허전함이 나뒹굴던 내 마음 바닥이 아랫목처럼 따스하게 데워지는 듯했다. 그 온기를 건네받으며 사람들 틈에 끼여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로 이용되는 길이 그나마 한적해 보여, 통행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4시간 동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붙박여 집회에 참여했지만, 다리는 그다지 뻐근하지 않았다. 흥분과 만족 때문이었을까. 잠깐 신기해했다.


그날의 소회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회를 내서 그곳에 가보는 것뿐이다. 사람들의 온기가 당신의 몸을 훈훈하게 데워 주고, 수많은 빛 무더기가 따스하게 당신의 눈길을 감싸 줄 것이다. 그날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내 눈에 박히며 내 안에서 명멸했다. 명멸하면서 점점이 아스라한 무늬를 만들었다. 돋을새김으로 도드라져 있진 않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그런 무늬였다. 그 무늬에 언어의 옷을 입히면, ‘순수’와 ‘열정’이라는 단어가 부족하게나마 어울릴 듯하다. 촛불의 빛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안에 깃든 순수와 열정을 밝히고 불러내고 있었다.


용감하고 생각 있는 몇몇 연예인들이 우리와 함께했다. 권해효, 홍석천, 신해철, 오지혜, 권진원, 안치환, 정태춘 등등. 진중권은 며칠 전 온당하지도 사려 깊지도 못한 한 글에서, “시위에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냐”며 촛불 집회를 폄하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는 여전히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넘실거려야만 한다고 믿는 것일까. 날 것 그대로의 분노와 과격함이 전시대의 운동 방식이었다면, 절제된 분노와 부드러움은 우리 시대의 운동 방식일 것이다. 스타들의 집회 참여는 변화된 시대의 반영일 뿐이다. 나는 스타들의 집회 참여가 부적절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은 신해철을 보기 위해, 안치환을 듣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엄연한 사실이다.


잠깐 그 스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자. 권해효,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를 이야기하는 남자. 그때부터 그가 그저그런 연예인이 아님을 짐작했다. 그가 확인시켜준 사실, 하나. 세상의 변화란, 변화되지 않는 세상에서 터무니없게 누리는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이들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 홍석천, 그는 커밍 아웃을 감행한 유일한 연예인이다. 그의 행동은 대단히 용기 있는 것이었지만, 방송은 그 용기에 대한 대가로 그를 3년간 왕따시켰다. 누구의 표현처럼, 그는 “자기를 찾고 배우를 잃었”던 것이다. 그가 확인시켜준 사실, 둘. 세상의 변화란, 변화되지 않는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절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이들 말고도, 일반 시민들이 연단에 나와 연설도 하고 하소연도 했다. 아, 김정란. 그녀도 있었다! 침묵이 미덕으로 자리 잡은 문학판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시를 읊었다. 그녀가 거기 있어서 더없이 뿌듯했다. 솔직히 시는 조금 별로였지만, 그 공간이 시에 울림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시나 그림은 때로 그 자체로서가 아닌, 그것이 놓인 공간이 빚어내는, 혹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러내는 감동의 울림으로 덧입혀지기도 한다. 그날 그녀의 시가 그랬다. 

 

올 때와는 달리 갈 때의 나는 무척 뿌듯해했다. 평소 같으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 긴장한 채 뻣뻣했을 나인데, 나의 몸은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온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나의 몸과 정신은 뜨겁게 전율하며 살아나고 있었다. 비록 아주 작은 힘에 불과하지만, 나의 몸이 세상을 밀어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마음속 냉소와 무관심의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저 부드러운 촛불이 얼음 같은 세상을 녹이고 있었다. 낡고 녹슨 것들이 작은 불길 속에서 거듭 타들어갔다. 낡고 녹슨 것들이 타면서 남긴 재가 우리의 노래 속에서 점점이 흩날렸다. 우리는 <나란히 가지 않아도>를 함께 불렀다.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내 눈시울에 뜨거움이 일렁였다.




“누군가, 누군가 보지 않아도 / 나는 이 길을 걸어가지요. // 혼자, 혼자라고 느껴질 땐 / 앞선 발자욱 보며 걷지요. //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쉬어가도 / 서로 마주보며 웃음 질 수 있다면 // 나란히, 나란히 가지 않아도 / 우리는 함께 가는 거지요. // 마음의, 마음의 총을 내려요 / 그 자리에 꽃씨를 심어보아요 // 손 내밀어 어깨를 보듬어 봐요 / 우리는 한 하늘 아래 살지요. // 얼굴 빛 다르고 하는 말 달라도 / 서로 마주보며 웃음질 수 있다면 // 나란히, 나란히 가지 않아도 / 우리는 함께 가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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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아픈 후회 . . . . . . .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영화배우 오지혜의 홈페이지에 갔다가 마주친 시.


출근 준비를 하다 언뜻 TV에서 방영 중이던 자연다큐멘터리를 봤다.

새끼 해오라기 네 마리가 둥지에 들어앉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먹이 경쟁을 하던 해오라기들의 몸은 서로에 대한 적의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치열한 먹이 경쟁의 정점에서,

급기야 몸집이 큰 놈이 작은 놈을 물어뜯어 한입에 삼켜먹었다.

큰 놈의 목으로 작은 놈의 몸이 꺽꺽, 넘어갔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이라고는 하나, 그 처연한 끔찍함 앞에서

멍하니 선 채 몸이 굳어갔다.


저 시를 보고 있자니, 나의 심사가

아침나절에 마주친 그 끔찍한 장면에 다시 이른다. 

부리만 없을 따름이지,

우리도 한 마리 새끼 해오라기가 되어,

서로의 몸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한입에 삼킬 기회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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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진행될수록 오해의 벽이 높아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이야기할 때는,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관념의 구도, 선입관의 구도에 따라 상대를 이리저리 재단하고 여기저기 끼워 맞춘다.


친구 녀석이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차이를 묻길래 몇 마디 해줬더니, “건전하건 건전하지 않건 조선일보는 그 나름의 보수신문이다. 한계레는 진보적인 신문이고. 이러한 구도를 유지하는 게 아주 바람직한 듯하다고 생각”한다나. 그리고 한 마디 더, “그런데 너무 한쪽을 몰아붙이는 듯한 요즘 젊은 사람들의 태도가 좀 맘에 안”든다나. 아마 나를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문제가, 간단히 설득될 수 없는 사회. 그게 바로 한국 사회다. 그 간단한 문제가 대단히 복잡하게 논의될 수밖에 없고, 그런 복잡한 논의를 통해서도 이토록 쉽사리 납득될 수 없게끔 뿌리 깊은 편견과 선입관이 만연돼 있는 것이다.


다음 글은 그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다. 문장만 약간 바꿔 옮겨놓는다. 다시 읽어보니, 요령부득의 말들이다. 차분하게 쓴 글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고 말리라는 생각 하나로. 지금 보니, 좀더 차분하게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먼 듯하다. 




내가 보수신문 '자체'를 부정하려는 걸까? 극단적 좌파(극좌)를 제외하면, 그 어떤 정치집단도 보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도대체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개혁/진보만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보수와 개혁, 우익(翼)과 좌익(翼)은 새의 좌우 날개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원론적인 문제 자체를 건드린다면, 논쟁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겠지. 난 이 문제를 건드린 게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난 보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건강한 보수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보수신문도 마찬가지. 문제는 보수의 질과 수준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보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하기로 하고, 간단히 정리하자면(꼭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면, 오해가 발생하곤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간단히 정리하자.), 요는 조선일보가 건강한 보수, 건전한 우파/우익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럼 뭔가? 극우(‘극단적’ 우익)다. 왜 그런가?


그들은 사회의 전통 가치와 기존 신념을 양심과 소신에 기초해서 지켜내려는 보수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부추기고, 북한을 고립시키려 하고, 재벌과 대기업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며(: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재벌과 대기업을 옹호할 수 있다. 이게 보수의 한 가치라면, 그런 보수를 부정하진 않겠다. 문제는 그것이 상식에 기초하는 옹호여야 하는데, 그들의 태도는 대개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의 윤리와도. 그들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편파적이다. 아마도 그들 수입의 많은 부분이 광고에 의존하고 있고, 그 광고를 재벌과 대기업이 채워주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그들이 일개 사설 단체나 단순 이익 집단이 아니라,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를 선동해왔다.


조선일보와 한겨레, 니 말대로 양쪽이 다 극단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겨레는 극좌가 아니지만. 완전히 왼쪽으로 치우친 신문은 아니란 말이다. 그럼 조선일보는? 두 말하면 잔소리. 극우! 어쨌든, 문제는 극단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극단을 얼마나 양심과 소신에 입각해 지속해내느냐가 아닐까? 한겨레가 아무리 진보적 진영의 목소리를 강조하고 싶어한다 해도, 조선일보처럼 유치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유치한 짓거리들의 실상은 이따가 하나하나 짚어보자.


신문 기사를 놓고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1년 6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난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신문을 좀더 꼼꼼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다. 이 신문이 우리 한국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지. 그것은 물론 대단히 부정적인 위치다. 상식과 양심이 짓밟히고, 기본이 무시되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지난 3월 16일자 조선일보에는 촛불집회와 관련된 짤막한 기사 하나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대강 이랬던 것 같다. “촛불시위 참가자 1/10로 줄어.” 이 기사가 가리키는 내용은 3월 15일 월요일 집회 참가자가 대폭 감소했다는 점이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그 기사가 1/10로만 줄었다는 그 ‘사실’만 얘기함으로써, 촛불시위에 대한 국민적 열의와 참여도가 갑자기 사그라든 것처럼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월요일 집회는, 반전 평화 촛불집회나 미선.효순 촛불시위 때도 그런 양상을 보였다고 한다. 즉, 주말에는 많은 직장인들, 일반인들이 참여하므로 집회가 굉장히 큰 규모로 진행되지만, 월요일과 같은 평일 집회에는 집회 참가자의 인원이 급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1/10’로 줄었다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 조선일보의 전형적인 보도 태도다.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싶거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사안에 대해서는, ‘오로지 사실’만 얘기할 것.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확대하거나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온갖 전문가와 여러 단체를 적극 인용해’ 보도할 것. 어쨌든, 이런 기사를 본 일반 시민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 촛불 시위가 이젠 좀 잠잠해지려나 보군. 탄핵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많이 사그라들었군.’ 이게 조선일보가 원하는 바다. 내가 한겨레 신문을 그다지 잘 읽지 않기에, 단정 지어서 얘기할 순 없겠지만, 한겨레는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세계 어느 신문-물론 타블로이드판이나 황색신문을 제외하고. 그래도 양식이 있고 정도를 지키는-도 이런 식의 편파적, 정치적, 의도적 왜곡/수정/가감/첨삭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언론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선동적 보도 행태는 제외하자. 그들은 그때 다들 미쳐 있었으니.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 태도를 얘기하면, 정말 밤새 할 수 있을 정도다. 왜? 그들은 매일 이런 일을 저지른다. 헌데 사람들은 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까? 아까, 그 기사를 다시 보자. 어디에도 ‘눈에 띄는’ ‘의도적 왜곡’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사실대로’ 보도했다. ‘1/10’이라는 엄연한 사실. 솔직히 이 1/10도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런 쪼잔한 행위가 노무현 1/10 발언과 관련해서 그들이 이리저리 헤집어 비아냥대던 그들의 태도와 닮은 듯해, 애써 참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 보도 자체가 일정한 가치(왜 사람들이 그렇게 줄었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사람들이 이젠 촛불집회에 무관심해졌다는 판단을 유도하는)를 포함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게 바로 기술이다. 조선일보는 바보가 아니다. 거기에 있는 기자들 역시 그렇다. 저런 잔머리에 매일매일 속고 있는 게 조선일보의 독자들이다. 250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250만이 매일 주위 사람들에게, 노무현 어쩌고, 미국 어쩌고, 촛불시위 어쩌고, 정치 어쩌고, 북한 어쩌고, 김대중 어쩌고, 전라도 어쩌고, 하면서 조선일보가 던져준 말들을 뇌까린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그 기사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는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난 20일 집회에는 광화문에 20만, 전국적으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가장 큰 규모였다. 집회의 규모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신문들의 힘. 조선, 중앙, 동아가 각각 200만부 이상씩 발행한다는 걸 감안하면, 세 신문사 모두를 합하면 800만부 정도는 될 것이다. 대단한 힘이다. 헌데, 사람들은 이 부수 자체만 놓고, 이 신문들이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아직 대단한 공신력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부수를 가진 신문이라고 해서, 그것의 공신력과 언론의 공평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내가 알기론 세계적으로 유수한 어떤 신문도 이처럼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있진 못하다. 르몽드만 해도 40만부 정도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타임스 역시 100만부 안팎의 발행 부수를 갖고 있다. 그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인구 비율로만 따져도, 우리의 발행부수는 해도 너무한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자체를 놓고 국민의 선택, 그 언론들의 공신력 운운하기에 앞서, 이런 잘못된 시장질서, 경쟁체제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얘기 하나 해보자.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자국의 영화 점유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그 이유가 뭘까?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크린 쿼터제’다. 다들 동의할 것이다. 만약 이게 없었다면, 우리 영화가 이만큼의 폭발적 인기를 누리긴 힘들었을 것이다. 즉, 시장에서 최소한의 유통망을 확보하는 것, 이게 관건이다. 소비자에게 선택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 보장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판매/선택 조건이다. 우리가 독립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를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상영관이나 환경 자체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다시, 신문의 문제로 돌아가서. 신문의 구독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뭘까? 국민의 시각? 국민의 선택? 국민의 이념적 성향? 신문의 질? 할 말을 하는 신문을 알아채는 국민의 안목? NO! NO! NO!


그럼 무엇일까? 바로 신문 유통망이다. 신문을 배급하는 배급소의 전국적 분포, 이게 관건이다. 그런데, 한겨레를 비롯한 소수 신문들은 이런 전국적 유통망을 확보, 유지할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동네 구멍가게 E마트와 같은 유통 체인을 전국에 확보한다? 참, 웃기는 얘기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언론에 대한 국민의 다양한 접근과 소수 언론의 균형 있는 육성을 위해, 공동 유통망과 관련된 정책, 즉 ‘공동보급제’를 시행하려 하지만, 누군가가 정부의 발목을 꽉 잡고 있다. 누가? 뻔하지, 조중동이다. 어떤 이유를 내세웠을까? 시장주의다. 시장에 내버려 두란다. 물론, 원론적으로 시장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헌데, 시장주의가 중요하다 해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하는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공공재(전파, 전기, 수도, 도로 등등)의 경우는 일정 부분, 혹은 전부분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회의 여론과 가치를 주도하고 이끄는 언론의 경우도 당연히 시장에만 맡겨둘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자칫하면, 언론의 이름으로 자사의 이익과 입장(만)을 대변할 수 있으니까. 누구처럼? 조중동처럼. 근데, 이게 한겨레처럼 마이너라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메이저, 그것도 전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메이저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참고로, 문화일보의 기사(2003년 4월 18일) 하나. “신문 공동 배달시스템은 낯선 시도가 아니라 선진국인 일본과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 이미 정착된 제도다. 특히 프랑스의 공동배달제는 이미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98년에 설립된 메사주리 아세트(Messageries Hachett)는 1차대 전 당시 이미 프랑스와 식민지 알제리에 8만여개의 판매소를 갖고 거의 모든 신문을 독점, 공급했다” 조중동이 계속 부수를 늘려갈 수 있는 건, 그 신문의 월등히 우월한 질 때문이 아니라, 단지 막대한 자본력과그로 인한 엄청난 공급력, 그리고 그 공급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보급망 때문이다.


조중동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너무도 많다. 지역감정, 반김대중 정서, 친일의 업적, 독재자의 찬양(이승만, 전두환, 박정희 등등), 안보상업주의(그들은 우리의 안보를 자기들 신문을 팔아먹는 데 써먹는다. 이 대목에서는 정말 욕이 안 나올 수 없다. 에이, 우라질 놈들!!), 미국에 대한 일방적 편향, 족벌 경영(소유와 편집의 분리, 편집의 엄격한 독립과 간섭 차단), 광고의 엄청난 지면 점유율(그 신문들을 보라. 온통 광고다. 뉴욕타임즈나 르몽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내 예상으론 세계 어떤 정론지도 이렇게 광고를 많이 싣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아무리 뜯어봐도 신문이 아니다. 광고지다, 정말, 진짜.), 광고와 기사의 기묘한 상호 보완 관계(이 문제는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다. 조선일보 1주일치만 있으면, 이 내용과 관련해서는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설득시킬 수 있다. 조선일보는 참 웃기는 짓들을 하곤 하는데, 이게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문제는 내가 이 신문을 애독하면서, 보기 민망하긴 하지만 기어코 찾아내서 확인하는 부분인데.. 내용인즉슨, 특정 제품이나 특정 회사의 광고-특히, 전면 광고나 비중이 큰 광고의 경우-가 실리면, 그 광고 옆에 혹은 앞에, 또는 뒤에 그 제품, 회사와 관련된 기사를 어김없이 올려준다는 것이다. 이 낯 뜨거운 짓거리를 그들은 대놓고 한다. 물론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다. 이런 일이 조선일보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뭐냐?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신문업도 장사 아닌가.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는 신문이라면 대놓고 ‘정론지’ 운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할 말을 하는' '정론지'가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말하는' '상업지'다. 그게 핵심이다.), 한나라당과의 밀월 관계(특정 언론이 특정 정당/정파를 지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언론이 그러면 쓰겄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근데 중요한 건 뭘까?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개적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언론의 상식을 지키는가 하는 문제다. 만약 특정 정당/정파를 지지한다면 그런 사실을 밝히고, 정당하게 지지하면 된다. 그리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철저하게 중립적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근데 얘들(조중동)은 어떤가? 진보적 매체에서 그런 얘기-까놓고 누구 지지하는지 밝히자-를 꺼내면, 그건 언론사가 해선 안 될 천하의 파렴치한 행위라고 매도한다. 그리곤 그들이 그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겉으론 그렇게-언론사가 공개적으로 어떤 정치인, 정당을 지지해선 안 될 일이지- 말하고, 실질은 그들이 편파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그랬고, 총선 때 그랬다. 이회창에 대한 그 낯뜨거운 구애와 한나라당에 대한 그 낯뜨거운 지원 사격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밀월 관계를 증명하는 사례 한 가지 더. 일례로,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인 최병렬. 아까처럼, 네이버에서 이 양반을 쳐보자. 다음과 같이 나온다. “1959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있다가 1963년 조선일보로 옮겨, 1974년 정치부장이 되었으며, 1979년 사회부장·편집부국장을 거쳐 1980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83년 조선일보 이사로” 있었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변인으로 있는 전여옥 역시 조선일보의 기자는 아니었지만, 최근까지 “한 시민의 입장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조선일보에서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날렸다.), 따옴표 보도(인용 부호인 따옴표를 사용해, 출처가 불분명한 제보자의 언급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언론의 공정성에 심각한 결점을 드러낸다. 물론 제보자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다. 제보자 보호 차원이라나. 그런 기사라면, 기자 아니라 동네 꼬마라도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대로, 가령 그 문제와 관련된 모씨가 이렇게 얘기했다더라는 식으로, 마음대로 사실을 왜곡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권력화(언론사 세무 조사가 한창 진행될 즈음, 그들은 IPI(국제언론인협회)라는 단체가 우리 정부에 보낸 문서를 제시하면서 정부의 언론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의 언론 상황이 “언론인들이 폭력의 위협에 처해지지는 않지만 논란이 있는 주제가 있을 경우 언론인과 언론기관에 특정한 견해와 시각을 채택하라는 압력이 상당히 가해진다”고. 또한, “한국에 언론자유가 존재한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며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라는 언론인의 권리가 방해받고 있다”고. 이 단체에 대해서 좀 짚고 넘어가자. 길게 설명하지 않게 않겠다. 네이버에서 조선일보 방사훈 사장을 쳐보자. 그럼 다음과 같은 약력이 뜰 것이다. “1983년 IPI 한국위원회 이사, 1993-1999년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 1994년 IPI 이사, 1995년 IPI 부회장.” 실상은 이렇다. 헌데 조선일보는 한국 정부의 언론관을 비판할 때, IPI가 발표한 내용을 가감 없이 인용한다. 자기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단체의 입장인 것처럼. 정말 웃기는 짓인데, 이런 일이 한국의 신문지상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치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여론 몰이에 앞장섰다. 여기서 끝내고 싶지만, 아쉬워서 하나만 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글 중 일부다. “조선일보의 방일영 고문(전 조선일보 회장)을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이 말은 1992년 11월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스포츠조선 신동호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라고 말한 것을 조선일보 사보가 보도한 것을 <기자협회보>가 다시 보도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조선일보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이는 신동호의 조어가 아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실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자신들의 수장을 공개석상에서 ‘밤의 대통령’ 운운할 정도로, 그들은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엄청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등등.


이 모든 얘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물증을 첨부해서 다 할 순 없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야겠구나. 왜?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 차이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네 착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착각이다. 그 착각의 틀을 누가 부여했냐? 바로 조선일보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건전한) 보수로 부득부득 우기기. 왜? 그래야만,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가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결코, 결단코, 절대로, 정말, 진짜로, 보수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보수신문이라고? 택도 없는, 정말 기가 찬 소리다. 한국일보 정도가 보수신문이라면, 인정하겠다. 조선일보는 보수가 아니라 극우다. 극우 신문이다. 그들이 자꾸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의, 촛불집회의 ‘선동' 운운하지만, 그 신문의 특기가 바로 ‘선동’이다. 항상 ‘말 없는 다수’를 내세우며, (자신을 보수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식과 양심을 벗어던졌다.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보수와 개혁의 싸움이 아니다. 결단코 그렇다. 그 싸움의 전위에 서 있었던, 서 있는 강준만은 진보가 아니(었)다. 그 자신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그 정도 되는 사람은 (건강한) 보수라 규정할 수 있다. 진짜 보수들은, 조선일보와 무관하게, 그저 따로 있는 것이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보수라 보고, 그 논조에 동조하고들 있다. 왜? 조선일보가 자꾸 보수라 우기니까. 지가 보수라는데, 어떤 놈이 뜯어말리겠는가. 하지만, 이젠 우리가 뜯어말려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보수와 진보는 싸울 수 있지만, 대화/논쟁할 수도 있다. 왜? 그들은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극우, 극좌와 대화/논쟁할 수 없다. 왜? 극좌/극우는 상식과 양심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극우다. 극단적 반공주의와 인종주의(조선일보의 인종주의?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까지, '팍스 몽골리카’ 운운하며 인종주의를 부추겼다.), 그리고 반민족주의(조선일보는 지금도 ‘민족주의’를 박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문제는 한국정치사의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어왔고, 친일의 역사를 덮기 위해 언제나 ‘반일민족주의’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 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어떻게? 은밀하고 교묘하게.)는 그 신문의 얼굴이다. 물론, 대놓고 반공을 얘기하지도, 대놓고 인종주의를 얘기하지도, 대놓고 반민족주의를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 신문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문의 잔머리는 어지간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싸움은 보수와 개혁의 싸움도, 좌파와 우파의 싸움도 아니다. 분명코 그렇다.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다. 거듭 강조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건전한 보수가 필요하다. 난 건전한 보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솔직히,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이 안에 포함될 듯하고.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적절한 조화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된다. 헌데, 조선일보와 같은 우익 세력들은 자신들이 보수인 양 가장하면서, 이 싸움을 보수와 개혁의 싸움으로 몰아간다.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촛불시위만 하더라도, 친노와 반노의 싸움이 아니었다. 아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 중 대다수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방송이 편파적으로 그렇게 조작했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인터뷰한 방송들을 보면, 이들이 대체로 ‘노무현에 대한 지지와 무관하게’ 집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데, 그들의 전형적 수법은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친노와 반노로 몰아가기. 친노-반노로 도배질하기.


좀 다른 얘기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이 요령부득의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자. 지난 19일인가, 20일인가 탄핵 찬성 집회가 열렸다. TV에서 봤는데, 연단에 올라온 시민(물론, 그는 일반 시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외모는 분명 반공단체나 예비군단체 소속처럼 보였는데, 어쨌든 이건 내 추측이고..)이 한 얘기.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빨갱이다!! 그들은 빨갱이다!!!’ 정말 끔찍한 발언이다. 저 끈질긴 빨갱이 올가미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예전에는 전라도가 빨갱이였다. 헌데 지금은 광화문에 모인 그 평화로운 시민들이 빨갱이가 되었다. 누가 광화문의 사람들을 빨갱이로 보게끔 만들고 있는가? ‘반전-반미-자주-개혁-진보-촛불-상식-양심-탈권위-노조-전교조’가 한순간에 빨갱이로 둔갑하는 이 연상의 법칙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 바로 그 거지 같은 신문들이 온갖 편집 기술과 잔머리로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정말 거지 같은 생각이다. 우린 그 거지 같은 신문들에 둘러싸여 매일 거지 같은 생각의 부수러기들을 머리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을 참 거지 같게 주워섬기고 있다. 참 거지 같은 일이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조선일보 1주일치 기사 가지고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수없이 뱉어내는 것보다는 그 신문을 직접 보면서 비판하는 게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걸까? 왜냐면, 조선일보의 문제는 일개 신문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빨갱이 운운한 사람은 좀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 비상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상식이 엄존하는 이상, 우리 사회는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길게 주절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식을 회복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촛불집회는 그 상식의 문제와 깊이 있게 관계된다. 민주주의 역시도 그 상식 위에 기반한다.


하나만 더 얘기하자. 왜 날이 갈수록 촛불 집회의 참가자가 늘어나는 걸까? 탄핵을 철회하지 않아서? 민주당과 한라당의 비이성과 몰상식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편파 방송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물론, 난 개인적으로 편파 방송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방송 시간 자체가 좀 길긴 했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자. 헌데, 방송사뿐만 아니라 유수의 신문사와 리서치 기관에서 한 여론 조사를 ‘조작’ 운운하던 그들의 모습에서는, 상식을 벗어던진 야만이 어려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거리로 더 쏟아질 수밖에. 정치인들의 이 터무니없는 행태를 조선일보는 따옴표에 담아 여과 없이 보도했다. 그 상식밖의 얘기들을 말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그런 꼬락서니는 정말 조선일보의 몰상식과 비이성, 비윤리를 닮은 꼬락서니였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을 상식을 가장해 뻔뻔하게 반복하는 것. 그들은 16대 총선에서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 운동을 ‘홍위병’ 운운하며 비판했고, 저명한 사회학자인 최창집(현 고려대) 교수를 김대중 정부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빨갱이로 몰아 마녀사냥했다. 얼마 전까지 한나랑당 공천위원이었던 소설가 이문열은 ‘홍위병’ 발언과 음모론의 전위에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는 촛불 집회를 노무현 숭배주의자들의 집단 광기로 비하했다. 이들은 분명코 상식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난 이들의 한 줌도 안 되는 지성과 지식을 가볍게 비웃을 수 있다. 동시에, 난 이들이 두렵기도 하다. 이 상식 밖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탄핵 가결처럼. 그러므로 우리 상식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자. 분노를 참지 말고 표현하자. 그래야만 저들이 두려워할 것이고, 저들이 움켜쥔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것이며, 우리 손에 함께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니가 말한 보수와 진보의 구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당연히 그렇게 유지되어야 하겠지. 헌데, 건전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네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중요하다. 그건 언론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에 보수 정당이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그 보수가 건전하지 않고, 비양식과 비이성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되겠냐? ‘보수=비건전’의 등식은 진보 진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보수를 가장한 극우(비이성적인 보수/수구)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진보 진영이 보수를 부정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들은 진보가 자꾸 보수를 싹쓸이하려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그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물론, ‘진보=과격’의 등식도 그들이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말한다. 노무현이 자꾸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나누고 있다고. 그런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작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선동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대통령의 자리는 모든 차이를 포용하는 자리라고. 터무니없는 소리! 그런 원론적 얘기는 하나마나한 소리다. A가 강도고 B가 피해자인데, 둘 모두를 포용해서 A를 무조건 용서하자. A를 터무니없이 매도할 필요는 없겠지만-가령, 그 놈은 더 이상 교화 안 될 짐승보다 못 한 놈이니 아예 사형시키자는 식으로-A는 자신이 행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응당히 비판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재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순서다. 포용과 관용도 마찬가지. 그들은 친일, 독재추종, 지역감정조장, 재벌옹호 등과 관련해서 분명한 사회적 비판과 역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포용할 수 있으면 포용하면 된다. 지금까지 숱한 불관용을 저질러온 게 누군데, 누구한테 함부로 ‘관용’과 ‘포용’을 운운하는 것인가? 정말 기가 찰 뿐이다. 덮어놓고, 다 포용하자. 그들의 논리다. 항상 뒤가 구리니까, 덮어놓고 끌어안자고 한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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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눈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의 육체는 내 눈을 파고들고, 이런저런 편집의 과정을 거쳐 관념의 형태로 저장된다.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면, 사랑이 얼마나 시각적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추억은 대개 풍경으로 남는다. 그리고 남아 있다. 


 

사랑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사랑은 냄새를 원한다.

연인들은 대개 그 사람만의 냄새를 알아채고, 냄새로 그 사람을 확인한다. 아주 감각적인 냄새들, 가령 애프터 쉐이브나 향수는 강하지만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런 것들 말고, 무취한 가운데 비어져 나오는 살비늘 냄새는 약하지만 속을 울렁이게 만든다. 그 울렁임은 비릿한 바다 내음 앞에서 느끼는 울렁임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입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 사람에게 던지는 나의 시선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선만으론 사랑을 매듭지을 수 없다. 사랑은 언어를 요구한다, 반드시. 또한, 끊임없이. 사랑의 언어는, 때때로 언어들의 사랑만을 남긴다. 말들만 요란하고 알맹이는 없는 사랑들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사랑의 말을 끊임없이 주절대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사랑에 대한 집착과 언어에 대한 집착은 가깝고, 닮았다.


 

혀나 입술이 귀에 닿으면, 몸엔 닭살이 돋는다.

귀는 얼굴에 달린 성기다. 그것은 몸의 안테나이고 성애의 피뢰침이다. 귀가 성기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예민함 때문이다. 예민한 것은 상처받기 쉽다. 그래서, 나의 거친 말은 예민한 귀를 통해 흘러들어가 연인의 가슴을 후벼 파고 도려낸다. 나의 이빨이 연인의 귀를 사정없이 물어뜯는 것처럼.


 

사랑을 하면, 혀가 얼마나 대단한 기관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애무할 나이가 되면, 혀의 움직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생전 처음 자유자재로 혀를 놀리는 자신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귀가 예민하고 조심스런 성기라면, 혀는 부드럽고 거침없는 성기다. 혀뿌리가 얼얼하게 키스를 하고 나면, 피로가 몰려온다. 혀뿌리를 뽑아버릴 듯 달려드는 연인에게서, 얼핏 욕망의 뿌리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때 삶은 더 노곤해진다.  


사랑은 관념의 체조가 아니다.

그것은 몸과 몸이 만나 섞이는 흐름이다.

그 흐름은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몸과 더불어, 관념과 정서가 흘러들고 흘러간다.

나의 육체와 정신은 그 사람의 육체와 정신에 붙박이고, 또한 그것들과 새끼 꼬듯 엮인다.

그 엮임이 사랑의 황홀이고, 사랑의 추억이다.

감각이 때때로 거짓이고, 몸이 때때로 허망하고, 욕망이 때때로 스산하며 사랑이 때때로 허무하다 해도, 몸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그 강렬하고 중독성 있는 것을. 


 

 

박민규, <지구영웅전설>의 후기 형식을 빌려다 몇 자 적어보았다. 그 후기의 일부를 여기 인용해본다. 그의 후기와 나의 글은 형식상의 유사성을 제외하곤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박민규의 단편을 읽어보고 싶다. 어디서 좀 구해봐야겠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은 마이크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던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를 지켜보면서였다. 문득 세계의 귀라도 물어뜯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몇 년 후, 나는 정말이지 소설이란 걸 쓰고 있었다. 그리고, 치과에 다니고 있었다.


앞으론 조심하세요. 의사가 말했지만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세계에 대해, 이빨에 대해, 하물며 '귀'에 대해서라니. 충치를 뽑고 돌아온 그날 밤의 뉴스에선, 등에서 사람의 '귀'가 자란 쥐가 토픽으로 소개되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걸. 맥주를 마시며 나는 중얼거렸다. 둘러보니 '귀'는 어디에나 있었다. 마치 치과처럼, 아니 더 많이.


그러던 어느 날 샤워를 마친 내 등에 하나의 '귀'가 자라나 있는 것을 아내가 발견했다. 긴장하고, 정말 열심히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제법 귀지를 파줘야 할 정도로, 어느날 문득 그것을 자라 있었다. 말 그대로의 '귀'.


말만 들었을 뿐, 나는 한 번도 그 '귀'를 본 적이 없다. 거울을 이용해 몇 번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먀치 달팽이의 눈처럼 '귀'는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있긴 있는 거야? 라고 물으면, 아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본 바를 일러주고는 했다. 차분한 아프리카 코끼리의 귀보다는 작고, 흥분한 인도 코끼리의 귀보다는 커. 아프리카와 인도, 그 사이의 인도양(印度洋)만큼이나 소설은 깊은 것이었고, 나는 과연 인도양 코끼리 정도가 될 만큼이나 굼뜨고 무거웠다. 인도양 코끼리 같은 건 어떤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당선 통보를 받은 것은, 내가 그 '귀'를 실을 카누인지 뗏목인지를 겨우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두 귀를 의심하는 대신, 나는 그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걸 싣고 갈 수 있을까? 갑자기 눈앞에 인도양이 펼쳐진 느낌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타이슨이 은퇴를 눈앞에 둔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발신자는 더, 아이언,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축하해, 바톤 터치야! 편지에는 짧게,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좋아, 기꺼이! 라는 짧은 답장을 쓰고 난 후에야,, 그가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은 진짜 이유를 나는 겨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의견을 나누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거란 생각이다.


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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