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후회 . . . . . . .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영화배우 오지혜의 홈페이지에 갔다가 마주친 시.
출근 준비를 하다 언뜻 TV에서 방영 중이던 자연다큐멘터리를 봤다.
새끼 해오라기 네 마리가 둥지에 들어앉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먹이 경쟁을 하던 해오라기들의 몸은 서로에 대한 적의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치열한 먹이 경쟁의 정점에서,
급기야 몸집이 큰 놈이 작은 놈을 물어뜯어 한입에 삼켜먹었다.
큰 놈의 목으로 작은 놈의 몸이 꺽꺽, 넘어갔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이라고는 하나, 그 처연한 끔찍함 앞에서
멍하니 선 채 몸이 굳어갔다.
저 시를 보고 있자니, 나의 심사가
아침나절에 마주친 그 끔찍한 장면에 다시 이른다.
부리만 없을 따름이지,
우리도 한 마리 새끼 해오라기가 되어,
서로의 몸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한입에 삼킬 기회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