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제임스 맥도널과 그의 동료는 편형동물인 플라나리아(ꂌ)로 신기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플라나리아에게 불빛을 비춘 후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러자 플라나리아는 전기충격을 줄이기 위해 몸 전체를 동그랗게 말았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하면, 플라나리아는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오그리게 된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같은 원리다.
신기한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학습된 플라나리아를 갈아서 다른 플라나리아에게 먹였더니, 다른 플라나리아 역시 불빛만 비춰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고 한다.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 사실이다. 학습된 내용이 플라나리아의 분쇄된 몸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학습된 플라나리아와 다른 플라나리아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전기충격과 관련된 정보 교환이 사전에 이루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이 실험은 기억과 교감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를 이끈다. 물론 사람과 플라나리아를 일대일로 비교해서 설명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와 비약을 내포하겠지만.
몸은 기억한다. 기억은 머리만의 활동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충격적 사건/상황/사람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이미 몸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한 출현이 눈으로 들어와 정신에 의해 감지되기 전에, 몸은 서서히 눈치 챈다. 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의 출현이 정신 속에서 언어화되기 이전에, 몸은 어느새 말없는 말을 정신에게 건넨다.
기억은 몸에 각인된다. 기억은 뇌에서만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뇌와 몸이 더불어 수행하는 활동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정신보다 먼저 상황을 직감하고 파악한다. 그리고 정신보다 먼저 반응한다. 피부와 세포 속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은 정신이 주는 울림 못지않은 울림을 던져 준다. 때로 그 이상의 울림을 던져 주기도 한다.
정신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나름의 윤색을 거친다면, 몸에 남겨진 기억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유지한다. 그만큼 몸의 기억은 솔직하다. 몸은 경험하지 못한 느낌을 소유할 수 없다. 정신은 상상의 활동을 통해 과거를 변형시킨다. 그럼으로써 없던 사실까지도 존재한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몸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만을 오롯이 기억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몸은 진실하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억들 역시 몸에 새겨진다. 사랑의 기억이 다분히 시각적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기억이 많은 부분 촉각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일 터. 얼핏 보면, 사랑의 기억은 시각적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혼의 밑바닥에 끈덕지게 남아 있는 것들은 다분히 촉각적으로 응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내 몸 속에 자리 잡고 내 몸의 일부를 이룬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사랑하던 사람의 몸은 나의 몸에 화상의 흔적을 남긴다. 그의 몸은 불잉걸이다. 내 몸을 서서히 태우고, 그 자신은 하나의 숯덩이로 차갑게 식어 바스라진다.
이곳저곳이 간질거리고 화끈거려 살펴보니,
데인 자리가 여태
벌겋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