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을 봤다. 본 지 꽤 됐는데, 이제야 몇 자 적게 되었다. 시간이 좀 필요했던 듯하다.


솔직히, 내 눈에 익숙지 않은 거친 화면이 조금은 낯설었다. 내 눈은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깔끔한 화면과 무게감 있는 내레이션으로 화장한 다큐멘터리에 익숙하다. 그러니, 송환의 흔들리는 화면과 여과되지 않은 음향에 나는 다소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그 거북스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내 거친 화면 속의, 오랜 시간을 인내한 노인들의 주름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았다. 고단한 세월이 남겨놓은 주름 앞에서 아름다움과 매끄러움을 이야기하는 건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당연했다.


만약 99년 이전에, 그러니까 비전향 장기수들이 완전히 석방되기 이전에,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나오기 힘들었겠지만, 설사 나왔다 하더라도 저 끔찍한 시간의 기록을 과연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이 온몸에 갈무리한 세월이, 그 도저한 인내가. 그리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 철저한 무관심이.


송환이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를 생각하면 자칫 관객들을 쉽사리 감상에 젖게 만들 수도 있으련만,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사실적 기록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담담한 내레이션과 모나지 않은 편집, 간간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웃음이 있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그 오랜 시간의 기록을 (이미 송환이 이루어진) 현재의 시점에서 구성했고, 관객 또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추체험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관객은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막막함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송환은, 끔찍한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허나, 영화는 그 끔찍한 시간을 결코 과장하지 않는다. 0.7평짜리 독방도, 그 안의 부자유도 눈을 찌르는 화면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유폐의 흔적과 고통은 노인들의 육성 속에서 하나둘 되살아날 뿐이다. 그렇게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감히, 따라가 볼 따름이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이 안으로, 안으로 한없이 삼켰을 그리움이, 한 장기수의 구부러진 어깨에서 뚝뚝, 떨어졌다. 자식을 그리며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린 늙은 노모 앞에서, 그는 한없이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자식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모는 눈을 감았다. 오로지 자식을 만나기 위해, 질기디질긴 생의 끈을 쥐고 있었다는 듯이.


표현상에서 느껴지는 거북스러움이 사그라진 자리에,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시대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그리곤 좀 전에 느꼈던 거북스러움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그것은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양심의 투쟁에 대한 경외 때문이리라. 자괴감은 지금까지 난 무얼 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물음에서 번져왔다. 적극적 가해자는 아닐지언정, 엄연히 그 시대의 방관자이지 않았던가.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무지했건 무관심했건 무력했건 간에 그 악에 저항하지도, 최소한 분노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 또한 하나의 죄악인 것이다. 부끄러웠고 죄스러웠다. 이미 저지른 악에 부끄러웠고, 또 앞으로 저지르게 될 악에 미리부터 죄스러워졌다.


영화 속에서 서준식 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 오랜 짐승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념과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 오기였을 것이다. 이념과 사상은 이성이 숨쉴 수 있는 낮의 시간에나 가능할 뿐이다. 밤의 시간, 오직 폭력과 고문이 횡행하는 그 야만의 시간에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에게 다 내어줄 수 없다는) 인간의 밑바닥만이 고스란히 남아 버틸 수 있게 한다. 그들이 그 비인간성이 들끓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내리누르는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오기를 얼핏 엿보게 되는 관객이라면, 안락한 의자에 깊숙이 제 몸을 묻은 채 그들을 마주 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그랬다.


대체 저들이 저러고 있을 동안, 난 무얼 했는가. 김규항의 글을 읽고서야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게 2001년 어느 시점이니, 그전까지 그들은 나와 무관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도대체 내가 모르는 불의와 억압은 또 얼마나 될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 철폐 시위, 농민들의 FTA 반대 시위,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등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시끄러운데, 나만 홀로 평온했다. 이제, 조금은 불편해져야겠다. 그래야 내 자신이 지금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겠다.


당신은 어떤가? 평온한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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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전공조(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민노당 지지와 관련해서, 선거 기간 동안 언론은 이 사건을 연일 시끄럽게 보도했다. 오늘 뉴스를 보니,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구속됐다고 한다. 사건의 핵심은 공무원의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다. 시대가 변했는데, 법은 여전히 시대의 등 뒤에서 헐떡대고만 있다. 시대를 따라올 생각은 않은 채. 지난 16대 총선에서 시민단체의 낙선, 낙천 운동이 일정 부분 제한받은 것도 변화된 시대에 눈감은 법 때문이었다. 얼마 전 촛불집회도 그랬다.

엄격한 실정법의 적용과 시대 변화에 따른 관용, 우리의 시각은 이 둘 사이에서 흔들린다. 실정법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분명 이 사건은 처벌 대상이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 2항은 “공무원은 선거에 있어서 특정정당 또는 특정인의 지지나 반대를 하기 위하여 다음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또한, 교원의노동조합설립및운영등에관한법률 제3조는 “교원의 노동조합은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법률에 근거해, 공무원과 교원의 정치적 행위는 엄격히 규제된다.


이런 법률들의 기본 취지는 무엇인가? 정치권의 외압으로부터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는 상위법인 헌법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즉,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보호하여 공무원의 직무 행위가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간섭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정치적 외압에 의해서, 공무원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바꾸거나 선거에 직간접으로 동원될 수 있는 위험성을 막는 게 이 법의 근본 취지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법률들은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를 일체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공무원이 직무상의 권한을 남용해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나 필요했을 법들이, 지금에 와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 표현 자체를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법들이 잘 적용되기나 했던가. 온갖 관권 선거에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직간접으로 동원되었던 게 우리의 과거다. 정작 권위주의 시대에는 제대로 적용되지도 못한 법률이, 탈권위주의 시대에 ‘축자적으로’ 해석되어 현실을 재단하는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해놓은 법률들은 크게 두 가지의 기능과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기능/측면은 공무원이 직무상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선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기능/측면은 정치적 외압에 맞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 번째 기능이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막는 ‘규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면, 두 번째 조항은 공무원의 정치적 입장을 권력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번 사건은 공무원들이 자발적 의지에서 정치적 의사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두 번째 기능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 번째 기능/측면이다.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 과연 공무원이 직무를 이용해 선거에 개입한 것이냐, 하는 문제. 정치적 입장 표현은 분명코 직무상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한 선거 개입이 아니다. 그 둘의 경계는 분명하다. 물론, 정치적 의사 표명이 직무상의 선거 개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억압적이다. 그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우에는 엄격히 처벌하면 된다. 공무원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정치적 신념은 신념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직무는 직무대로 수행하면 된다. 상식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아무런 정치적 입장을 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무원의 직무를 중립적으로 수행하라는 뜻일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검찰의 엄격한 선거법 적용이 형평성에 어긋났다는 지적이 있다. 민노당은 지난 선거 기간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인 이군현 교총회장과 김영숙 교장은 비례대표후보로 확정된 뒤에야 사표를 냈다고 주장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공무원법 제65조 1항 "공무원은 정당 기타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라는 조항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 공무원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당에 가입한 것은 엄연한 실정법 위반이다. 이들은 지금 당선자 신분이 되었다. 검찰이 엄격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자 한다면, 한나라당에도 엄격한 법의 잣대를 갖다대야 한다.

 

물론, 이게 핵심은 아니다. 한나라당을 꼭 걸고 넘어가야겠단 물귀신 심정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엄격한 법 적용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치 행위의 보장이다.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법률들이 만들어질 당시의 취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변화된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전교조와 전공조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얼토당토 않다. 지금 그들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법대로’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치적 활동의 적극적 보장이다. 정치적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공무원이 편파적으로 선거 업무에 개입하는 경우는 그 경우대로 처벌하자. 그러면 된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공무원이니까, 정치적 행위는 절대 해선 안 된다’는 닫힌 생각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공무원의 직위상의 중립성을 지키면 된다’는 열린 생각으로 시대의 눈길이 옮겨가고 있다. 공무원이 노동자이고 교사도 노동자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하지만, 일부 신문들은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부득부득 우겼을 때처럼, 그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해선 안 된다고 부득부득 우기고 있다. 참 딱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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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즐겨보는 TV 프로는 <신강균의 사실은...>이다.

요즘 들어 부쩍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관심은 예전부터 많았다.

그런데, 요사이 그 관심을 공개적,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상당히 정치적인 나에게

<사실은>은 매력적인 프로다.

이 프로가 다른 시사보도 프로와 구별되는 것은,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되, 그것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더불어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이 바로 이 프로가 가진 특장이자 매력이다. 즉, 현실을 살피는 데 있어 현실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을 함께 점검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되, 그것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망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이 프로가 주목하는 사안들은 지극히 시사적인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 프로는 시사성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와 연결된 지난 과거를 불러내서 역사적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쉽게 망각하곤 하는 우리의 의식에 망치질을 한다.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라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사실은>은 이처럼 (매체) 비판과 (역사적) 기억을 아우르면서 현실을 이야기한다. 때론, 지나치게 당파적이고 몰상식한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끌어들인 역사적 기억이 오히려 그들의 당파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의 당파성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상식성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당파성을 옹호하고 싶다. 그것이 그들이 의도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들의 본의와 무관하게, 그들의 당파성은 우리 사회를 좀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언론의 당파성은 한시적으로 유효하고 의미 있는 것이리라 본다. 물론, 그때의 당파성도 언론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을 전제해야 하지만. 


스타일 상에서도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사회자인 신강균 씨의 시원시원한 말투도 좋고, 신랄한 비판 뒤에 나오는 엔딩 크레딧은 단연 일품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 뒤에 흘러나오는 존 레논의 이메진은 다분히 환각적이다. 혹은 선동적이다. 당파성과 마찬가지로, 환각성도 때론 의미 있을 수 있다. 환각이 때론 삶의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당파성과 환각성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현실을 비트는 당파와 환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틀어진 현실을 돌려놓는 힘을 발휘하는 당파와 환각이라면 말이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다.

 

우선, 이 소설집의 다양함이 맘에 든다.

소설집은 연작 소설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단편 소설들을 묶어 내놓기 마련이다. 그러니,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년 가까이 쓴 단편 소설들을 하나로 아우르게 된다. 그 긴 시간 동안 비슷비슷한 소설들만 줄곧 써내는 이들이 있다. 당연히 그런 소설들로 엮인 소설집은 한번의 독서 후에는 좀체 내 손길을 타지 못한다. 물론, 여러 소설들의 밑바닥에 유유히 흐르는 작가적 개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 고유의 문체나 문제 의식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형식적 고민 없이 엇비슷하게 변주되는 단편 소설들은 식상하고, 그 소설들이 기거하는 소설‘집’은 영 재미없다.


소재부터 기법까지 이 소설집은 다채로운 맛으로 가득하다. 물론, 소설집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밑자리에는 어떤 강물이 흐른다. 위선의 일상, 혹은 속물스러움의 속살에 대한. 소설들은 대부분 일상의 켜켜에 빼곡히 들어찬, 이물스런 위선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위선적이다. 그들은 위악을 모른다. 그들은 내내 위선적이다. 과장되게 악한 척하지 않고, 은근하게 선한 척하면서 분주하게 제 실속을 계산할 뿐이다. 그들의 일상은 늙은 창녀의 얼굴처럼 짙게 화장되어 있다. 위선이라는 분을 덕지덕지 바른 채. 작가는 주인공들을 동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서술 전략은 오롯이 그 위선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위선의 진창에 몸 담게 하고 일상의 알몸을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떠오른 부스러기 하나. :

예전에 여자친구가 <문학과 사회>에 실린 이 소설집의 표제작을 읽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었다. 왜 그녀는 그 소설을 폄하했을까?

우리는 보통 다른 이들의 통속적 사랑(과 그것이 빚어내는 위선)에 대해 냉소를 보낸다. <낭만적 사회>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런데, 비아냥거리고 있는 자신 역시 그 통속적 사랑의 회로에서 맴돈다. 그러면서 이건 통속이 아니라고,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강변한다. 혹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통속의 정도도 아니고, 통속의 유무도 아니다. 나의 통속이냐, 너의 통속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통속은, 신파는, 위선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삶 속에도 있고, 내 삶 속에도 엄연히 있다. 버젓이 있기도 하고, 은연히 있기도 하다. 그걸 우리(‘나’와 ‘나의 연인’)가 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들(‘그’와 ‘그녀’)이 하고 있느냐,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그녀도 이 소설이 겉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 통속성에 대해 발끈했던 것일까? 그런 정도의 비아냥거림이었을까? 모르겠다. 이제,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 가장 심각하게 본 영화는 <송환>이다.


내 눈에 익숙지 않은 거친 화면이 조금은 낯설었다. 송환의 흔들리는 화면과 여과되지 않은 음향은 나를 다소 거북스럽게 했다. 하지만, 거북스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그것은 거친 화면 속의, 오랜 시간을 인내한 노인들의 주름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았다.


<송환>은 끔찍한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그 길고 끔찍했던 시간을 과장하지 않는다. 0.7평짜리 독방도, 그 안의 부자유도 눈을 찌르는 화면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유폐의 흔적과 고통은 노인들의 육성 속에서 하나둘 되살아날 뿐이다. 그렇게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감히, 짐작해본다. 그들이 온몸에 갈무리한 고난의 시간을, 도저한 인내를.


표현상에서 느껴지는 거북스러움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스멀스멀 일어났고 시대에 대한 분노가 설설 타올랐다. 이때쯤 되면, 관객은 좀 전에 느꼈던 거북스러움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와 상관없이, 양심의 투쟁에 대한 지극한 경외 때문이다. 자괴감은 지금까지 난 무얼 했나, 하는 물음에서 온다. 적극적 가해자는 아닐지언정, 엄연히 그 시대의 방관자이지 않았던가.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무지했건 게을렀건 무력했건 간에 그 악에 저항하지, 최소한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죄악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서준식 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념과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 오기였을 것이다. 물론 이념과 사상도 나름의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것들은 대개 이성이 숨쉴 수 있는 낮에나 기능할 뿐이다. 밤의 시간, 폭력과 고문이 횡행하는 그 야만의 시간에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에게 다 내어줄 수 없다는) 인간의 밑바닥만이 남게 된다. 그들이 그 신산과 질곡의 세월을,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내리누르는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인간적 오기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할 즈음에, 일상의 삶 속에서 수많은 비인강성을 경험하고, 또한 제 스스로 저지르는 자신을 돌아보며, 관객은 안락한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제 몸을 끄집어내 허리를 곧추 세우게 된다. 안온한 일상에 스르르 매몰된 제 자신을 냉큼 바로 세우려는 듯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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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작년 9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 이제 꼭 반 년째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즐거움은 단연 먹는 즐거움이다. 전에 여자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고작 그런 것밖에 생각 못하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부터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나에게 음식으로 다가온다.


기실 나에게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아기에게도 엄마는 일차적으로 음식과 관계된다. 엄마가 아이와 음식을 매개로 관계한다는 것은, 엄마가 아기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엄마는 단순한 제공자의 역할을 넘어서 그 자체로 아기에게 하나의 음식이다. 엄마의 젖꼭지는 아기의 입과 접촉한다. 아니, 그것은 접촉 이상이다. 젖꼭지와 입의 맞물림은 엄마와 아기의 뒤섞임이다. 엄마의 몸에 고여 있던 모유는 아기의 입을 거쳐 아기의 몸으로 흘러든다. 엄마는 아기에게 음식으로 넘실넘실 흘러온다.


어머니는 내게 음식으로 추억될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면 난 음식으로 그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얼굴, 그의 주름, 그의 말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게 해준 수많은 음식들의 맛과 향 속에 점점이 박혀 내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되리라.


며칠 전에 어머니가 해 주신 닭죽을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먹을 때는 정신없이 먹느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 먹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닭죽을 다 먹고 얼핏 어머니의 부재를 상상했다. 불온한 상상이었다. 불온이라 말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상상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죽음 앞자리에 음식을 놓고 이야기해서다. 죽음이 반드시 우리가 통과해야 할 문턱인 것은 사실이겠으나, 어머니의 죽음을 음식에 잇대어 상상한다는 것은, 별로 온당치 못하게 비칠 것이다. 충분히 인정하지만, 엄염한 사실임을 어쩌랴. 어머니는 평생을 바지런하게 부엌 문턱을 넘나드셨다. 제 몸밖에는 모르는 아들의 배와 입을 위해서.


어머니의 자식으로, 아들로 태어나 참 많이도 얻어먹었다. 그러고도 어머니의 부재를 상상하며 오로지 음식 타령을 하고 있으니, 내 정신은 아직도 어머니의 발치에 머물러 있다. 육체 또한 어머니의 양육에 의존하고 있으니, 내 육체도 어머니의 품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나이는 서른을 바라보고 있건만, 내 정신과 육체는 여전히 유년이다. 결혼을  해도, 나는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려 할 것이다. 설혹, 그런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그녀에게 어머니의 그림자를 드리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어머니 없이 살아가야 한다. 그 시간이 내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은 급해진다. 하지만, 내 정신의 성장은 더디 온다. 지금까지 늘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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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 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고종석의 <서얼단상>에서 두 개의 문장을 뽑는다. 앞서의 글은 김규항의 문장이고, 뒤에 놓인 글은 고종석이 인용한 문장이다.

김규항의 글에 대해 달리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저 나직이 소리 내어 읽을 따름이다. 슬그머니 손을 놓은 채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는 그 청년을 만나본 지가 오래되었다. 아니, 내가 정녕 그 청년을 만나본 적은 있었던가. 그 청년을 만나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지만, 정작 그를 만나게 되면 난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지난 세기 64년에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이에 대한) 장 리카르두의 반박 : “문학은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드문 행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다양한 고등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은 문학에 의해서다. 그러면 <구토>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과 다른 위대한 작품들)은,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한 어린아이의 아사(餓死)가 추문이 되는 공간을 규정한다. 이 책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 도살장에서의 어떤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고종석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옳다. 그리고 리카르두도 옳다. 내 생각에도 둘 다 옳은 것 같다. 두 사람의 얘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 역시 리카르두의 반박에 담긴 생각을 자신의 입장 밑에 깔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단정 짓고 있다. 문학에 대해. 문학의 무력함에 대해. 아니, 사르트르의 단정이 정작 향하고 있는 곳은 문학이 아니라 아이일 것이다.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굶어죽는 어린아이에 대해. 절박함 때문이리라. 문학(과 그 모든 고귀한 예술)을 통해 “한 어린아이의 아사가 추문이 되는 공간”이 그나마 확보될 수 있겠지만, (그를 전율케 한) 현실은 기다림을 모르기에, 그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가 내린 단정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 저편에 굶어죽는 아이들을 둔 채 문학책만 끼적대거나 뒤적거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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