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즐겨보는 TV 프로는 <신강균의 사실은...>이다.
요즘 들어 부쩍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관심은 예전부터 많았다.
그런데, 요사이 그 관심을 공개적,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상당히 정치적인 나에게
<사실은>은 매력적인 프로다.
이 프로가 다른 시사보도 프로와 구별되는 것은,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되, 그것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더불어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이 바로 이 프로가 가진 특장이자 매력이다. 즉, 현실을 살피는 데 있어 현실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을 함께 점검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되, 그것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망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이 프로가 주목하는 사안들은 지극히 시사적인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 프로는 시사성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와 연결된 지난 과거를 불러내서 역사적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쉽게 망각하곤 하는 우리의 의식에 망치질을 한다.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라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사실은>은 이처럼 (매체) 비판과 (역사적) 기억을 아우르면서 현실을 이야기한다. 때론, 지나치게 당파적이고 몰상식한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끌어들인 역사적 기억이 오히려 그들의 당파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의 당파성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상식성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당파성을 옹호하고 싶다. 그것이 그들이 의도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들의 본의와 무관하게, 그들의 당파성은 우리 사회를 좀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언론의 당파성은 한시적으로 유효하고 의미 있는 것이리라 본다. 물론, 그때의 당파성도 언론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을 전제해야 하지만.
스타일 상에서도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사회자인 신강균 씨의 시원시원한 말투도 좋고, 신랄한 비판 뒤에 나오는 엔딩 크레딧은 단연 일품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 뒤에 흘러나오는 존 레논의 이메진은 다분히 환각적이다. 혹은 선동적이다. 당파성과 마찬가지로, 환각성도 때론 의미 있을 수 있다. 환각이 때론 삶의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당파성과 환각성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현실을 비트는 당파와 환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틀어진 현실을 돌려놓는 힘을 발휘하는 당파와 환각이라면 말이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다.
우선, 이 소설집의 다양함이 맘에 든다.
소설집은 연작 소설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단편 소설들을 묶어 내놓기 마련이다. 그러니,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년 가까이 쓴 단편 소설들을 하나로 아우르게 된다. 그 긴 시간 동안 비슷비슷한 소설들만 줄곧 써내는 이들이 있다. 당연히 그런 소설들로 엮인 소설집은 한번의 독서 후에는 좀체 내 손길을 타지 못한다. 물론, 여러 소설들의 밑바닥에 유유히 흐르는 작가적 개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 고유의 문체나 문제 의식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형식적 고민 없이 엇비슷하게 변주되는 단편 소설들은 식상하고, 그 소설들이 기거하는 소설‘집’은 영 재미없다.
소재부터 기법까지 이 소설집은 다채로운 맛으로 가득하다. 물론, 소설집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밑자리에는 어떤 강물이 흐른다. 위선의 일상, 혹은 속물스러움의 속살에 대한. 소설들은 대부분 일상의 켜켜에 빼곡히 들어찬, 이물스런 위선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위선적이다. 그들은 위악을 모른다. 그들은 내내 위선적이다. 과장되게 악한 척하지 않고, 은근하게 선한 척하면서 분주하게 제 실속을 계산할 뿐이다. 그들의 일상은 늙은 창녀의 얼굴처럼 짙게 화장되어 있다. 위선이라는 분을 덕지덕지 바른 채. 작가는 주인공들을 동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서술 전략은 오롯이 그 위선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위선의 진창에 몸 담게 하고 일상의 알몸을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떠오른 부스러기 하나. :
예전에 여자친구가 <문학과 사회>에 실린 이 소설집의 표제작을 읽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었다. 왜 그녀는 그 소설을 폄하했을까?
우리는 보통 다른 이들의 통속적 사랑(과 그것이 빚어내는 위선)에 대해 냉소를 보낸다. <낭만적 사회>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런데, 비아냥거리고 있는 자신 역시 그 통속적 사랑의 회로에서 맴돈다. 그러면서 이건 통속이 아니라고,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강변한다. 혹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통속의 정도도 아니고, 통속의 유무도 아니다. 나의 통속이냐, 너의 통속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통속은, 신파는, 위선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삶 속에도 있고, 내 삶 속에도 엄연히 있다. 버젓이 있기도 하고, 은연히 있기도 하다. 그걸 우리(‘나’와 ‘나의 연인’)가 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들(‘그’와 ‘그녀’)이 하고 있느냐,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그녀도 이 소설이 겉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 통속성에 대해 발끈했던 것일까? 그런 정도의 비아냥거림이었을까? 모르겠다. 이제,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 가장 심각하게 본 영화는 <송환>이다.
내 눈에 익숙지 않은 거친 화면이 조금은 낯설었다. 송환의 흔들리는 화면과 여과되지 않은 음향은 나를 다소 거북스럽게 했다. 하지만, 거북스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그것은 거친 화면 속의, 오랜 시간을 인내한 노인들의 주름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았다.
<송환>은 끔찍한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그 길고 끔찍했던 시간을 과장하지 않는다. 0.7평짜리 독방도, 그 안의 부자유도 눈을 찌르는 화면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유폐의 흔적과 고통은 노인들의 육성 속에서 하나둘 되살아날 뿐이다. 그렇게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감히, 짐작해본다. 그들이 온몸에 갈무리한 고난의 시간을, 도저한 인내를.
표현상에서 느껴지는 거북스러움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스멀스멀 일어났고 시대에 대한 분노가 설설 타올랐다. 이때쯤 되면, 관객은 좀 전에 느꼈던 거북스러움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와 상관없이, 양심의 투쟁에 대한 지극한 경외 때문이다. 자괴감은 지금까지 난 무얼 했나, 하는 물음에서 온다. 적극적 가해자는 아닐지언정, 엄연히 그 시대의 방관자이지 않았던가.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무지했건 게을렀건 무력했건 간에 그 악에 저항하지, 최소한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죄악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서준식 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념과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 오기였을 것이다. 물론 이념과 사상도 나름의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것들은 대개 이성이 숨쉴 수 있는 낮에나 기능할 뿐이다. 밤의 시간, 폭력과 고문이 횡행하는 그 야만의 시간에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에게 다 내어줄 수 없다는) 인간의 밑바닥만이 남게 된다. 그들이 그 신산과 질곡의 세월을,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내리누르는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인간적 오기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할 즈음에, 일상의 삶 속에서 수많은 비인강성을 경험하고, 또한 제 스스로 저지르는 자신을 돌아보며, 관객은 안락한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제 몸을 끄집어내 허리를 곧추 세우게 된다. 안온한 일상에 스르르 매몰된 제 자신을 냉큼 바로 세우려는 듯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