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작년 9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 이제 꼭 반 년째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즐거움은 단연 먹는 즐거움이다. 전에 여자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고작 그런 것밖에 생각 못하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부터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나에게 음식으로 다가온다.


기실 나에게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아기에게도 엄마는 일차적으로 음식과 관계된다. 엄마가 아이와 음식을 매개로 관계한다는 것은, 엄마가 아기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엄마는 단순한 제공자의 역할을 넘어서 그 자체로 아기에게 하나의 음식이다. 엄마의 젖꼭지는 아기의 입과 접촉한다. 아니, 그것은 접촉 이상이다. 젖꼭지와 입의 맞물림은 엄마와 아기의 뒤섞임이다. 엄마의 몸에 고여 있던 모유는 아기의 입을 거쳐 아기의 몸으로 흘러든다. 엄마는 아기에게 음식으로 넘실넘실 흘러온다.


어머니는 내게 음식으로 추억될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면 난 음식으로 그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얼굴, 그의 주름, 그의 말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게 해준 수많은 음식들의 맛과 향 속에 점점이 박혀 내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되리라.


며칠 전에 어머니가 해 주신 닭죽을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먹을 때는 정신없이 먹느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 먹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닭죽을 다 먹고 얼핏 어머니의 부재를 상상했다. 불온한 상상이었다. 불온이라 말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상상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죽음 앞자리에 음식을 놓고 이야기해서다. 죽음이 반드시 우리가 통과해야 할 문턱인 것은 사실이겠으나, 어머니의 죽음을 음식에 잇대어 상상한다는 것은, 별로 온당치 못하게 비칠 것이다. 충분히 인정하지만, 엄염한 사실임을 어쩌랴. 어머니는 평생을 바지런하게 부엌 문턱을 넘나드셨다. 제 몸밖에는 모르는 아들의 배와 입을 위해서.


어머니의 자식으로, 아들로 태어나 참 많이도 얻어먹었다. 그러고도 어머니의 부재를 상상하며 오로지 음식 타령을 하고 있으니, 내 정신은 아직도 어머니의 발치에 머물러 있다. 육체 또한 어머니의 양육에 의존하고 있으니, 내 육체도 어머니의 품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나이는 서른을 바라보고 있건만, 내 정신과 육체는 여전히 유년이다. 결혼을  해도, 나는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려 할 것이다. 설혹, 그런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그녀에게 어머니의 그림자를 드리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어머니 없이 살아가야 한다. 그 시간이 내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은 급해진다. 하지만, 내 정신의 성장은 더디 온다. 지금까지 늘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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