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을 봤다. 본 지 꽤 됐는데, 이제야 몇 자 적게 되었다. 시간이 좀 필요했던 듯하다.
솔직히, 내 눈에 익숙지 않은 거친 화면이 조금은 낯설었다. 내 눈은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깔끔한 화면과 무게감 있는 내레이션으로 화장한 다큐멘터리에 익숙하다. 그러니, 송환의 흔들리는 화면과 여과되지 않은 음향에 나는 다소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그 거북스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내 거친 화면 속의, 오랜 시간을 인내한 노인들의 주름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았다. 고단한 세월이 남겨놓은 주름 앞에서 아름다움과 매끄러움을 이야기하는 건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당연했다.
만약 99년 이전에, 그러니까 비전향 장기수들이 완전히 석방되기 이전에,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나오기 힘들었겠지만, 설사 나왔다 하더라도 저 끔찍한 시간의 기록을 과연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이 온몸에 갈무리한 세월이, 그 도저한 인내가. 그리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 철저한 무관심이.
송환이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를 생각하면 자칫 관객들을 쉽사리 감상에 젖게 만들 수도 있으련만,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사실적 기록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담담한 내레이션과 모나지 않은 편집, 간간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웃음이 있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그 오랜 시간의 기록을 (이미 송환이 이루어진) 현재의 시점에서 구성했고, 관객 또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추체험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관객은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막막함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송환은, 끔찍한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허나, 영화는 그 끔찍한 시간을 결코 과장하지 않는다. 0.7평짜리 독방도, 그 안의 부자유도 눈을 찌르는 화면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유폐의 흔적과 고통은 노인들의 육성 속에서 하나둘 되살아날 뿐이다. 그렇게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감히, 따라가 볼 따름이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이 안으로, 안으로 한없이 삼켰을 그리움이, 한 장기수의 구부러진 어깨에서 뚝뚝, 떨어졌다. 자식을 그리며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린 늙은 노모 앞에서, 그는 한없이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자식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모는 눈을 감았다. 오로지 자식을 만나기 위해, 질기디질긴 생의 끈을 쥐고 있었다는 듯이.
표현상에서 느껴지는 거북스러움이 사그라진 자리에,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시대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그리곤 좀 전에 느꼈던 거북스러움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그것은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양심의 투쟁에 대한 경외 때문이리라. 자괴감은 지금까지 난 무얼 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물음에서 번져왔다. 적극적 가해자는 아닐지언정, 엄연히 그 시대의 방관자이지 않았던가.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무지했건 무관심했건 무력했건 간에 그 악에 저항하지도, 최소한 분노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 또한 하나의 죄악인 것이다. 부끄러웠고 죄스러웠다. 이미 저지른 악에 부끄러웠고, 또 앞으로 저지르게 될 악에 미리부터 죄스러워졌다.
영화 속에서 서준식 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 오랜 짐승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념과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 오기였을 것이다. 이념과 사상은 이성이 숨쉴 수 있는 낮의 시간에나 가능할 뿐이다. 밤의 시간, 오직 폭력과 고문이 횡행하는 그 야만의 시간에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에게 다 내어줄 수 없다는) 인간의 밑바닥만이 고스란히 남아 버틸 수 있게 한다. 그들이 그 비인간성이 들끓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내리누르는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오기를 얼핏 엿보게 되는 관객이라면, 안락한 의자에 깊숙이 제 몸을 묻은 채 그들을 마주 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그랬다.
대체 저들이 저러고 있을 동안, 난 무얼 했는가. 김규항의 글을 읽고서야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게 2001년 어느 시점이니, 그전까지 그들은 나와 무관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도대체 내가 모르는 불의와 억압은 또 얼마나 될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 철폐 시위, 농민들의 FTA 반대 시위,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등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시끄러운데, 나만 홀로 평온했다. 이제, 조금은 불편해져야겠다. 그래야 내 자신이 지금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겠다.
당신은 어떤가? 평온한가,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