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 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고종석의 <서얼단상>에서 두 개의 문장을 뽑는다. 앞서의 글은 김규항의 문장이고, 뒤에 놓인 글은 고종석이 인용한 문장이다.

김규항의 글에 대해 달리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저 나직이 소리 내어 읽을 따름이다. 슬그머니 손을 놓은 채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는 그 청년을 만나본 지가 오래되었다. 아니, 내가 정녕 그 청년을 만나본 적은 있었던가. 그 청년을 만나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지만, 정작 그를 만나게 되면 난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지난 세기 64년에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이에 대한) 장 리카르두의 반박 : “문학은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드문 행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다양한 고등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은 문학에 의해서다. 그러면 <구토>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과 다른 위대한 작품들)은,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한 어린아이의 아사(餓死)가 추문이 되는 공간을 규정한다. 이 책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 도살장에서의 어떤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고종석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옳다. 그리고 리카르두도 옳다. 내 생각에도 둘 다 옳은 것 같다. 두 사람의 얘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 역시 리카르두의 반박에 담긴 생각을 자신의 입장 밑에 깔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단정 짓고 있다. 문학에 대해. 문학의 무력함에 대해. 아니, 사르트르의 단정이 정작 향하고 있는 곳은 문학이 아니라 아이일 것이다.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굶어죽는 어린아이에 대해. 절박함 때문이리라. 문학(과 그 모든 고귀한 예술)을 통해 “한 어린아이의 아사가 추문이 되는 공간”이 그나마 확보될 수 있겠지만, (그를 전율케 한) 현실은 기다림을 모르기에, 그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가 내린 단정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 저편에 굶어죽는 아이들을 둔 채 문학책만 끼적대거나 뒤적거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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