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토요일로 기억한다. KBS는 교육 대토론회를 3시간에 걸쳐 방송했다. 패널로 나온 정유성 교수(교육학)가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한번도 그의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가끔 친구들에게서 그의 얘기를 전해 들었고, 딱 한번, 그의 강의를 1시간 정도 청강하기도 했다. 1시간을  들었을 뿐인데도, 부드럽지만 열정적인 강의였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솔직하고 정감어린 강의였던 듯하다. 학부 시절에 그의 수업을 제대로 수강하지 않았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고, 다시 확인해본 그의 얘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예전에 산업 사회의 교육은,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 라는 말에서처럼 방법을 일러주는 교육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을 일러준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물고기만 먹고,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습니다. 사회가 바뀌었으므로, 교육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쌩떽쥐베리가 수십 년 전에 한 얘기인데요. 배를 필요로 한다, 바다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배를 만들어주거나 배를 만들 방법을 일러주지 않아도 된다. 단지, 사람들이 미치게 바다를 그.리.워.하.게. 하자.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고 미역을 따기도 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아이들이 바다를 그리워하게 하자. 그렇게 하려면, 우선 우리가 바다를 그리워해야 한다. 선생님이 바다를 그리워해야 하고, 부모가 바다를 그리워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바다를 그리워하게끔 도울 수 있다.



나는 바다가 그립다. 여전히 그립다.

이 자갈길을 따박따박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리고

길섶에 웃자란 풀들에 정강이가 베이기도 하면서,

바다를 잊기도 하고, 바다로 가는 길을 잃기도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그립다.

고통스럽게 그립다.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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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설은 한바탕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농담이란, 단지 진지함의 거부가 아니라 진지하게 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이며, 진지함을 가장한 논리의 폭력에 대한 빈정거림이다. 이 서늘한 농담의 공간에서 삶의 어떤 실재도 신비도 발가벗겨진다. 농담의 형식은 혼돈의 세계에서 모순된 진실을 물어야 하는 현대(근대)의 문법이다. 소설의 탈주는 소설이 자신의 존재 근거와 주류 문법에 대해 보내는 또 하나의 지독한 농담이다. 그러나 그 탈주의 꿈은 농담의 형식이 그러한 것처럼 치유될 수 없는 자기 모멸을 견뎌야 한다. 소설의 저 냄새나는 세속성은 이런 가시 돋친 역설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 이 책의 글들은 농담에 관한 농담, 혹은 탈주에 관한 탈주의 중얼거림이다.

                                                                                        - 이광호, <소설은 탈주를 꿈꾼다>

 

 

오랜만에 비평집을 꺼내 본다. 예전에 한번 읽은 글인데, 다시 읽는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실상 그때는 많은 작품을 읽지 못했다. 나의 관심은 문학에 가닿지 않았다. 항상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느라 바빴고, 다른 일로 분주했다. 처음에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한다고 난리를 쳤다. 사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국문과가 아니라 신방과였다. 내가 다닌 대학은 복수 전공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신방을 복수 전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안했다. 그쪽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없었고, 알량한 복수 전공의 혜택이 은근히 내 자존심을 건드렸던 듯하다. 늦게나마 정신 차린 뒤에 인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때는 멋도 모르고 철학을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다. 철학, 종교학의 주변을 맴돌았고 미학의 언저리를 서성였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돼간다. 난 지금에서야 문학의 재미에 빠져 있다. 그때는 왜 몰랐는지. 그때는 조바심에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다. 부족한 지성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오로지 이론서나 비평집에 매달렸다. 작품은 하나를 읽어도 그와 관계된 비평은 서너 편을 읽을 정도였다. 대개 그런 식이었다. 작품을 통해 구체적인 심미안을 기르지 않고, 다른 비평가들의 시각에 기대어 비평적 안목을 확보하려 했다. 물론, 그나마도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나의 감성이 많이 메말라 있음을, 나의 심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에둘러왔지만. 그저 딱딱하고 거칠고 성글었다. 내 문장도, 내 생각도, 내 영혼도.


그러다 언제부턴가 소설책에 제대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발견하는 기쁨을 느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고 싶어도 국문과라는 제도 속에 갇혀 있음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꼭 국문과라서가 아니었다. 난 그때 문학과 무관했다. 국문과에 4년을 머무르는 동안, 내게는 비평만 있었다. 문학은 쏙 빠져버린 비평만. 그것은 영혼 없는 육체마냥 무의미했고 끔찍했다. 정말 그랬다. 이제야 뒤늦게 시인하는 것이지만. 다시 집어든, 생동감 있는 글쓰기들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내 머리를 쿵쿵, 두들겨댔다. 다시, 문학을 전공하는 느낌이다. 아니, 이젠 전공이 아니라 전유다. 진정 내 것으로서 내 안에 스며들 수 있게끔. 전보다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무거우면서 가볍게, 그렇게, 문학의 오솔길을 밟는다. 예전에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가까스로 표현해내는 그들의 솜씨를 흠모하며 살고 싶다. 내 몸을 푹 담가보고 싶다. 그렇게 할 것이다. 아직은, 글이, 문학이 내 삶을 뿌리부터 후벼팔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 '아직은'이 아니다. 영원히,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 '부정성'을 힘껏 껴안고 뒹굴 수만 있다면.

비록 삶의 대부분의 시간이 돈을 버는 데 쓰일지라도.

 

그나마 학원에 있어서, 내 시간이 많은 편이다. 그 시간에 나는 돈을 벌면서 동시에 책을 읽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딱히 내 일이라 생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볼 수 있어 좋고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이 일을 할 것 같다. 어쩌면, 난 너무 쉽게 돈을 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겹고 짜증스런 업무에 매달리지도 않아도 되고, 잔소리하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휴일에 불려가 잔무에 주말을 고스란히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난 오늘도 학원에 앉아 책을 펼쳐든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다시 읽었다. 세 개의 문장을 고른다. 하나는 그 소설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소설의 주제 의식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마지막은 오정희 소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그 소설집(<유년의 뜰>)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달은 줄곧 머리 위에서 둥글었고 네 살짜리 동생은 어눌한 말씨로 씨팔눔아아, 왜 자꾸 따라오는 거여어, 소리치며 달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수채에 쭈그리고 앉아 으윽으윽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임신의 징후였다. 이제 제발 동생을 그만 낳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했다. 어머니의 구역질은 비통하고 처절했다.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


“내용은 잊혀진 채 분위기만 남은 꿈과도 같은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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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 . . . .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즐겨보는 TV 프로가 몇 개 있다. <낭독의 발견>, <신강균의 사실은>, <스승과 제자>, <100분 토론>.
드라마는 볼 시간도 없고, 잘 보지도 않는다. 그런 나에게 예외인 드라가 하나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워>.그 드라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드라마 작가, '노희경'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녀는 글을 쓸 줄 알고, 삶을 풀어낼 줄 안다.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함과 진정성을 고루 녹여 '벌집'을 만든다. 그 안에는 끈적끈적한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꿀처럼 흐른다. 그녀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서민들의 삶에 질감과 무게감을 부여한다. 삶의 곡절은 전혀 과장되지 않게 펼쳐진다. 다만, 여린 눈물과 자잘한 상처로 적셔져 있다.
고두심, 배종옥의 연기는 언제나 그렇듯 돋보였다. 재수역의 김흥수나 우식할머니역의 김영옥, 아버지역의 주연도 어지간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들은 누군가의 삶을 (연기로) 대신 산 게 아니라, 온전히 그 삶을 살았던 게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 드라마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어머니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별로 슬프지 않은 장면에서도 눈물이 고이곤 했다. 그리곤, 저게 바로 우리다, 우리 삶이다, 슬며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 자잘한 상처로 폐허가 된 우리가.
어제, <낭독의 발견>에 고두심이 나왔다. ‘어머니 팔베개’란 노래를 한 자락 부르고나서, <꽃보다 아름다워>의 대사를 읊었다. 그리고, 시를 한 편 읽었다. 생각보다 노래를 참 잘했다. 그녀가 읽은 그 시가 바로 <늙어가는 아내>다. 사랑에 대한 시고, 사랑의 말에 대한 시다. 사랑하며 늙어가는 세월에 대한 시다.
나도 사랑하며 늙어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쓴 글들을 쭉 훑어보니, 사랑에 대한 얘기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사랑은 아직도 나의 오아시스인가 보다. 어찌 나만 그러하랴. 그 시는 말한다.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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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당신은, 현실에 대해서, 현실의 진실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은 그 얘기를 할까 한다.

나와 당신이, 우리가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끔찍한 살육에 대해 침묵했다면, 적어도 그 점에 관해서는, 나와 당신이, 우리가 비인간적이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비인간성이 나와 당신의, 오로지 우리의, 우리만의 탓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나와 당신의, 우리의 무감각과 무신경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 비난을 나는, 거침없이 얻어들어야 한다. 당신도 마찬가지. 하지만, 더불어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조각난 진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각난 진실은 우리를 무지의 벼랑으로 이끌었고, 무능의 늪에 빠뜨렸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은, 온전한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의 일부였으며, 누군가의, 오로지 누군가의 진실에 불과했다. 뒤틀린 진실의 한 조각이 나와 당신의, 우리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고, 우리를 눈멀게 했다. 하여, 나와 당신은, 우리는 진실의 전체를 보지 못했고, 볼 수 없었다. 나와 당신의, 우리의 눈엔 여전히 사금파리가 박혀있다.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미디어가 던져 주는 정보, 생각, 감정, 경험, 욕망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미디어 너머의 세상에 대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혀 모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모르고 있다.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오로지 TV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TV 속에 존재하는 것만이 온전한 세상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는지? 그러니,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것들 뒤에서 엄연히 다른 세상이 꿈틀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그 세상을 알기 위해, 그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미디어 안으로, 미디어 사이로, 미디어 너머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디가 전해주는 반쪽짜리 세상밖에는 모르고, 반쪽짜리 삶밖에는 못 살 것이다.


도대체 나와 당신이,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진실의 한 자락이라도 움켜쥐고 있는가? 우리는 단지 조각난 현실을, 가공된 현실을 경험할 뿐, 아닌가?


이 전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전쟁이 시작되던 1년 전쯤으로 돌아가 보자. 신문과 방송은 연일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지원 가능성을 얘기했다. 또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폭압성과, 이라크 민중의 인권에 대해서도.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은, 저들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는 양 미친 듯이 떠들었다. 당연히, 이집트에서 벌어질 끔찍한 살육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했다. 그리고 전쟁 개시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는 어디에도 없고, 그것을 찾겠다는 명분을 내건 이 전쟁에서, 오히려 개 같은, 정말 개 같은 대량 살상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라크 민중의 인권은, 후세인 시절만큼 퇴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얼마 전 공개된 이라크 포로들의 학대 장면을 담은 사진들은 끔찍했다. 문득,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이 떠올랐다. 엽기적인 학대와 동물적인 광기가 그 사진 속에서 넘실거렸다. 저기가 바로,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목화밭이었던 것이다. 


대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아직도, 여전히,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는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왜? 여전히? 


이것은 전쟁인가? 아니, 나는 전쟁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한 침략이고, 침공이다. 명백한 학살이고, 살육이다. 헌데,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은, 저들은 ‘이라크와의 전쟁’(혹은 ‘이라크 전쟁’)이라고 떠들었고 떠들어댄다. 그 규정 속에서, 그 명명 속에서, 이라크는 세계 최강의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어떤 국가가 된다. 정말, 이라크‘와의’ 전쟁이란 말인가? 정말, 와의? 그렇게 말하면, 이 전쟁은, 한순간에, 지극히 쌍방적인 것으로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 전쟁은, 나와 당신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일방적이었다. 그것은, 이라크‘와의’ 전쟁이 아니라, 이라크(혹은 이라크의 민중)‘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이었고 학살이었다. 그게 미디어가 정해준, 이 전쟁의 알량한 이름, ‘이라크와의 전쟁’이라는 그 이름보다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미국인의 진실이 아니라, 이라크와 이라크  민중들의, 그들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담고 있을 것이다. 명명은 이렇듯 중요하다. 우리가 ‘이라크와의 전쟁’이라고 쉽게 말하는 그 순간, 이라크에서는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카타르의 위성 방송인 알자지라만이, 그나마 그 전쟁에서 이라크 민중이 고통 받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유일한 것 같다. 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잇다. 미국무부 대변인이라는 녀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자지라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확하고 거짓되고 잘못된 보도"를 하고 있고, "우리(미군)가 대형폭탄을 사용하지 않은 장소에서 사용했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공격하지도 않은 모스크(이슬람사원)를 공격했다고 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은 장소에서 죽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카타르 정부에 알자지라 방송에 대한 통제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프레시안 4월 28일자)


우리는 오로지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의, 저들의 시각에서 이라크를, 중동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의 시각이 아닌, 저들의 시각에서. 또한, 그들의 시각이 아닌 저들의, 오로지 저들만의 시각에서. 저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들의 세상을, 더불어 우리들의 세상을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저들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상을 우리의 세상에 잇대어, 그 세상에서 우리와 그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세상이 아닌, 저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햄버거를 먹고, 유가와 세계 경제를 논하고,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이라크와 같은 현실은 잊은 채 환상만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고 있진 않는지? 우리가 발 디딘 이곳은, 저들의 세상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의 다소 복잡한 인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들 : 한국. 그들 : 미국. 저들 : 이라크. -> 우리들 : 패권국의 눈치만 살피는 중진국 나부랭이들. 그들 : 제1세계에 속하며, 자신들만이 오로지 정의를 점유하고 있다는 맹신에 빠져,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것들. 저들 : ‘그들’의 발밑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밟히는, 자국의 생사여탈권을 언제라도 강탈당할 수 있는 약소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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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와 당신은, 우리는 TV 앞에서 무사하다. TV 속 세상은 전투기가 날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무사하다. 그리고 멀쩡한 낯빛을 하고, TV 속 세상을, 이라크의 먼지 바람을, 팔루자의 화염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TV 속 팔루자를 관람한다. 맙소사,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택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살까지도, 죽음을 향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고통 없는 삶에 대한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을진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어제처럼 하릴없이 살아간다. TV 속 세상에서 전쟁이 벌어지건, 사람이 죽어나가건 상관할 바 없다는 듯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점심엔 뭘 먹을까를 고민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버스 유리창에 고단한 어깨를 기댄 채 퇴근한다. 그리곤 멍하니 TV 앞에 앉는다. 오늘도 이라크는 한바탕 시끄러웠군, 하며 소란스런 세상에 약간의 냉소를 보낼 수도 있고, 오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나 보군, 하며 약간의 연민을, 제 양심이 조금이나마 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슬쩍 던질 수도 있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런 황량한 살풍경 앞에서 으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TV 속 세상은 끔찍해도 TV 밖 나와 당신의, 우리의 일상은 꿈쩍 않는다. TV를 끈 나와 당신이, 우리가 잠깐, 아주 잠깐, 아까 본 이라크 어린이의 눈물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오래 생각하진 않는다. 생각해도 딱히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다, 머나먼 이라크 땅의 비극이 나에게 닥칠 것 같지도 않고, 괜히 감상에 젖는 자신의 나약함이 징그럽기에. 그새 나와 당신은,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생각을 슬그머니 접은 채, 피곤했던 하루 일과를 잠시 돌아보고, 내일 해야 일과 만날 사람들을 대강 점검한 뒤 잠자리에 든다. 내일을 살아야 하기에.


우리에겐 우리의 내일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엔, 그들의 내일이 들어설 자리가 하나도 없다.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그들은 없다. 그들은 그저, 그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나와 당신이, 우리가,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저 TV 밖에서, 앞에서, 위에서, 아래서 그들을 지켜볼 따름이다. 그들만이 TV 속 세상에서 울부짖고, 피 흘리며, 사지가 찢길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고, 또한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TV 밖 세상과 TV 속 세상이 뚜렷하게 나누어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나와 당신이, 우리가 그 밖에서, 그들과 다르게 무사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라 나와 당신은, 우리는 철석같이 믿고 있다. 우리는 TV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그들은 TV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그들은 TV 속에서 겨우 존재할 뿐이다. 과거의 한 자락으로만. TV 속 그들의 삶은 현재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조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현재가 되길, 나와 당신은,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형이라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불편해질 것이기에, 우리의 여유가 대단히 침해받을 것이기에, 우리의 머리가 몹시도 무거워질 것이기에, 우리의 안전이 상당히 위협받을 것이기에, 우리의 미래가 끔찍이 흔들릴 것이기에, 우리의 영혼이 뿌리째, 저 밑바박에서 흔들릴 것이기에. 만약에, 만의 하나라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들을 연민해야 하고, 그들을 치료해야 하며, 그들을 도와줘야 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과거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제 다 지나가 버린 일에 불과한 것으로, 그래서 나와 당신이, 우리가 지금까지 늘 그래온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신나게 구경만 해도, 안심하고 넘어갈 수 있게끔. 그들은 영원히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연, 이런 나와 당신, 우리란 존재는 무엇인가? 진정, 나와 당신이, 우리가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나와 당신이,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해서, 그들의 현재에 대해서,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있다면, 적어도 전쟁 반대 집회에 한번이라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위의 물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정, 나와 당신이, 우리가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 나는 대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어떤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로지 제 삶에 바빴고, 늘 그렇듯이 제 아픔만을 과장했다. 온몸이 가시넝쿨에 찔려 철철 피를 흘리며 사지를 떨고 있어도, 그것은 오직 그들만의 고통일 뿐이었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로지 제 새끼손가락에 박힌 가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만이 나와 당신에겐, 우리에겐 그나마, 끔찍해 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나와 당신은, 우리는 사람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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