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A>를 보고 조금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JSA>와 같은 대중영화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한국영화도 남북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데올로기는 욕망처럼 끈질기기에.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 그 속에서 북한은 대개 헐벗고 불안(정했다. 그 불안정이 또한 우리를 불안하게)했다. 그도 아니면, 기껏해야 이야기 소재이거나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데올로기적 강박에 매여 있었다. 아닌 게 있었나, 도대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쉬리>만 해도 그러했다. 그 영화의 시선은 참으로 뻔뻔하다. 그 영화는 얼핏 가치중립적임을 가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 관객의 시선을 ‘유중원’(한석규분)에게 비끄러맨다. 아주 단단히.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중원의 일상을 따라갈 뿐이다. 그 결과는? 관객은 자연스레 그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선악을 가름하게 된다. 유중원의 시각을 넘어서서 영화를 본다? 아마 보통의 관객(쉽사리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마는)에겐 불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이방희’(김윤진분)와의 철저한 ‘거리 두기’를 관람의 한 요소로 끌어들인다. 관객에게 이방희는 철저히 소외된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소외와 반비례해서, 유중원과의 동일시는 그 밀도를 더해간다. 영화의 시선은 관객을 유중원에게 깊이 몰입하도록 이끈다. 영화는 두 인물에 대한 이 같은 입장 차이를 기반으로 북한과 남한 사이의 체제 경쟁을, 은밀하게 반복한다.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소박한 방식으로 설파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쉬리>는 일정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주1) 하지만, <쉬리> 역시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뿐이다. 인물에 대한 입장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말이다. <쉬리>는 관객의 무의식 속에서 체제 우월심을 부추긴다. 그게 그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였다.(주2)


<JSA> 또한 분단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전쟁이 빚은 남북 분단, 영화는 거대한 역사적, 정치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분단을 이야기하되, 거대하게 꾸미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장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담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서 휩쓸리고 짓눌리는 개인을 비장하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비장미 넘치는 거대 서사 대신, 개인의 자잘한 이야기가 펼쳐질 뿐이다. 개인의 자잘한 이야기 속에 시대가, 역사가, 사회가 점점이 박혀 있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야기는 지극히 내밀한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비무장 지대 북한 초소라는 그 사적 공간은 이중적이다. 그곳은 일차적으로 ‘사적 공간’임에 틀림없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함께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개인적, 인간적, 사적, 내적 공간이다. 거기에서 젊은이들은 닭싸움을 하고 사랑을 추억하며 꿈을 이야기한다. 개인들 사이의 친밀감으로 충만한 사적 공간으로서의 초소는 더불어서 다른 의미(와 기능)도 지니고 있다.

그 공간은 앞서 이야기한, 분단이라는 특정한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깊숙이 관계된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초소’는 단순히 사적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규율과 질서로 포섭된 ‘제도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그 공간에는 적용되는 규율과 법규가 있다. 즉, 그곳은 역사적, 정치적, 구조적, 제도적, 공적 공간이다. 남북 대치라는 정치적 문제가 가시화된 곳, 그곳이 바로 비무장지대다. 그곳은 남북 대치의 최정점을 구체화하고 있는 곳이다. 거기엔 수많은 금기와 규율이 존재하고 있다. 한 개인이 함부로 그 금기와 규율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북한 초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남한의) 체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혹은 적에게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어쨌든, 남북의 젊은이들이 어울렸던 ‘초소’는 남북 대치의 정점에 놓인 대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우애와 친밀이 넘실거린 접점의 공간이다. 정점의 공간, 접점의 공간.

이 영화의 원작은 박상연의 소설 <DMZ>(민음사)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광장>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였다. ‘이명준’(주인공)이 선택한 제3세계라는 가능성이 물거품 같이 터져 버린,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 제3세계라는 가능성은 이분법의 세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망명국으로 선택한 제3세계라는 가능성이 결국 자살로 무화되기에. 그 세계의 이분법은 그토록 끈질겼다. 그것은 두 개의 체제 말고는 어떤 다른 선택도, 고려도 불가능한, 철저히 이분법적인 세계였다. 전시대가 극단적 이분법의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는 이분법을 넘어선, 혹은 넘어서는 시대다. 그러므로, 이분법의 공간이 아니라, 혼재의 공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광장과 밀실의 엄격한 분리가 아닌, 광장이면서 동시에 밀실이기도 한, 그런 공간이 솟아오른다. 동시에 그것은 공적 영역이면서 사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점이지대와도 같다. ‘초소’는 바로 그런 점이지대로서 제시되었다. 우리 시대 남북의 모습, 극단적 대립이 아닌 대립과 공존이 뒤엉킨 모습을, 영화는 그 초소에 집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립과 공존이 뒤엉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혼재된 초소. 하지만, 혼재는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성으로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압도하는 순간, 혼재의 공간은 붕괴되고 만다.

한 북한 병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혼재의 공간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병사가 출현하기 직전까지 그 공간은 지극히 내밀한 사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병사가 출현하면서, 그 공간은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그 병사의 등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적 영역의 느닷없는 침범을 상징한다. 개인적 욕망과 관계로 한없이 충만되어 있던 초소는, 갑작스런 병사의 출현과 더불어 돌연 공적 공간으로 변하고, 그 공적 공간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제도적) 이름을 호명받는다. 오경필 ‘중사’, 이수혁 ‘병장’이라는. 그 공적, 제도적 공간 속에서, 오경필 중사나 이수혁 병장은 인간 오경필, 인간 이수혁을 내버린다. 그들은 오로지 ‘중사’ 오경필, ‘병장’ 이수혁으로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갈 뿐이다. 원래 있던 자리로,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자리로, 제도가 그들을 부리는 자리로. 사적 개인에서 한순간 사회적 개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끔찍하게도. 왜? 그들은 공식적으로 적군이니까, 그들은 제도적으로 ‘주적(主敵)’으로 규정되어 있으니까. 결국 그들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해댔다.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았다.

이수혁 병장(이병헌분)의 자살은, 도덕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사적 공간을 향한 극단적인 퇴행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제도적, 사회적, 공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도 없이 자기들끼리 총질한 그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로 말이다. 그는 결국 그 세계로 떠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오로지 사적 공간으로서만 충만한 세계다. 그는 떠났다. 육군 ‘병장’ 이수혁, 대한민국 ‘국민’ 이수혁이 아닌, 인간 이수혁으로, 오경필을 형이라 부르던 이수혁으로.

소피 소령(이영애분) 주재 하에 조사를 받던 도중, 오경필 중사(송강호분)가 걸걸한 목청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만세! 만세!”를 외쳤던 것은 공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내면에서 그렇게 외쳤던 게 아니다. 그 장면의 갑작스러움에 관객들은 다소 당황했으리라. 그 장면은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이 결코 아니다. 그 장면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충돌을 잘 보여 준다. 오경필 중사는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사적 영역으로서 초소에서 벌어졌던 모든 얘기들은 침묵 속에 묻혔다. 단지, 공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중사’ 오경필만이 남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찬양할 뿐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자아,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적 자아의 목소리였다. 제발 날 못살게 굴지 말라고, 제발 날 우리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땅에 무사히 보내달라는 사회적 자아의 호소였다. 그 때 그의 모습은 지극히 공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사적 영역’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초소에서 어울렸던 남북의 젊은이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단지, 체제와 규범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도 아닌 체제와 규범이 그들의 ‘내면’과 ‘진심’을, 그리고 ‘진실’을 파괴하고 짓밟았다. 강력한 공적 영역의 갑작스런 침범 속에서, 개인의 내면은 붕괴하고 내밀한 관계는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공적 영역(과 그것이 한 개인에게 부과한 임무/자리/이름)은 아무런 내적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부여받은 것이기에 강제적이나, 나 개인에게 있어 필연적이지는 않다. 언어처럼. 나는 모국어를 택하지 않았다. 단지, 모국어가 나를 택해 자신의 사용자로 삼았을 뿐이다. 언어의 질서는 사회적 질서와 닮았고 또 가깝다. 언어가 나를 부리듯이, 사회적 규범, 제도, 질서, 법률, 규제, 규칙, 규율, 윤리가 나를 규정하고 나에게 지시한다. 그것은 모국어처럼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지극히 가변적이고, 또한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언제고 그것(공적 영역과 그것이 부과한 임무/자리/이름)은 잊혀지고 부정될 수 있다. 북한 초소에서, 자신의 임무를 잊은 남북의 젊은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적 영역이 온전히 사적 영역으로 남을 수 있으려면, 공적 영역이 함부로 사적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람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왕복 운동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하나의 공간은 두 영역의 겹침으로 존재한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보다 훨씬 도드라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 사이에는 무수한 변이 공간들이 놓여 있다. 우리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혼재된 양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한 혼재 자체가 아니다. 공적 영역이 개인의 사적 욕망, 사적 관계를 왜곡하거나 억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완벽한 무정부주의는 사적 영역으로만 충만한 세상을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공적 영역에 의해 함부로, 과도하게 침범, 왜곡, 훼손되는 '사적 영역'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사적 영역만 존재하는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 영역이 온전히 이해받고 존중받는 세계를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영화에서처럼 공적 영역의 느닷없는 출현, 그로 인한 ‘사적 영역’의 붕괴는 비극적이다. 만약, 공적 영역이 조금만 더 느슨했더라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과 그것이 부과한 적대 의식)은, 한 병사의 돌연한 출현에 초소에 모여 있던 병사들을 한순간 적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끔찍했던 것이다.

사적 영역의 복권을 노린다는 점에서, 영화는 공적 영역, 국가나 정부(로 대변되는 질서, 제도, 규범)를 ‘간접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공적 영역을 거부하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읽어내긴 힘들다. 이수혁의 자살을 공적 영역의 거부로 읽어낼 수 있지만, 제 목숨을 희생하면서 얻는 사적 영역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JSA>가 확보한 사적 공간은 얼마간 부족함을 남길 수밖에 없다. 사적 영역이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JSA>의 세계는 다소 비극적이다. 죽음으로써 공적 영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공적 영역 속에서 사적 영역을 일궈야 한다. 무정부주의는 거기에 이르러야 한다. 죽음으로 확보된 사적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제 몸으로 향유할 사적 영역에 이르러야 한다. <올드 보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한 무정주의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는 철저한 반체제성, 반사회성을 경유해야 하는 것이다.

<JSA>의 끝은 허무했다. 혼재된 공간은 얼마간 위태로움을 내장한다. 그 위태로움이 비극으로 종결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아직도 막막할진대, 영화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남과 북은 아직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주1 : 가령, 유흥가 전화부스에서 박무영(최민식분)이 유중원(한석규분)과 통화한 내용을 통해 볼 때, 영화가 남한 체제의 모순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삽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중립적으로 남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기 위한. 그러나, 영화는 철저히 남한의 편에 서 있다. 북한은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불안정한 사회일 뿐이고, 북한의 특수 부대 훈련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잔혹 그 자체일 뿐이다. 또한, 그곳은 ‘제 어미가 죽은 자식의 살로 연명하는’(박무영이 한 말), 끔찍한 생지옥이다. 그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그에 비해, 남한은 나름대로 모순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불안하지도, 잔혹하지도, 끔찍하지도 않다.

주2 : 이런 한계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가족애, 형제애를 다루고 있지만, 심층에서는 어김없이 ‘체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강제규의 시각은 언제나 이데올로기 안쪽에 머문다. 그가 재능 있는 상업영화 감독인건 분명하나, 그는 작가주의 감독은 절대 아니다. 영화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 무의식의 논리를 깨지 못한다면, 아마 그의 영화는 영원히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은 다음으로 미룬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힘이 남으면, 그 때 정리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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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필로 2004-06-2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아마 5회로 연재될 것이다. 지금 구상은 그렇다. 이번 글을 시작으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를 분석할 계획이다. 분석은 개별 작품별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박찬욱의 영화들을 일관된 주제 하에서 하나로 엮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좀 천천히 쓸까 한다. 급하게 써서 그런지, 문장이 거친 듯도 하다.
 

성욕.

누군가의 말을 조금 흉내내 말한다면, 사랑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철새가 그러하듯 와도 되는 곳에만 온다. 황폐해진 곳, 외로움에 지친 곳에 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줄 감정이다.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성욕만이다.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사랑과 성욕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편지.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비아에게. 제가 변형시킬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주옵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위해서는 그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주옵시고, 또한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려주시옵소서.(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아직 그 편지는 보내지 않은 상태다. 어쩌면, 그 편지의 수취인은 그녀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다.



안부.

잘 살고 있니? 너의 흔적을 몹시도 찾았다. 싸이에서 네 홈피(의 껍데기)를 찾았고, 알라딘에서 서평 하나를 발견했다. 그 조각들을 발견하고 잠시 기뻐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 그랬을 뿐이다. 그것들은 너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그저 너의 부재만을 새삼 확인시켜 줄 뿐이지.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 번 널 만나게 된다. 내 머릿속에서.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은 좀 그랬다.



고해.

거리에서 널 만났다.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누군가의 어깨에서, 누군가의 미소에서 널 발견했더랬지. 언젠가 한번은, 버스에서 널 보기도 했다. 정말 너였다. 앞자리에 앉은 그 여자의 뒷머리나 목덜미가 너를 꼭 빼닮았지. 그녀의 신발이나 가방까지도. 한없는 슬픔이 밀려 왔다. 그때 그 버스는 내게 아주 연극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울고 있었다. 울부짖었다. 모르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내 마음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왜 우리가 그래야만 했지?’ 그 여자는 짐짓 사제처럼, 내 고해를 조용히 제 등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뼈아픈 후회와 자책에, 나는 내 가슴을 부서져라 치고 있었다.



오열.

오늘 TV에서 어떤 가족이 오열을 토하고 있더라.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평소 같으면 쉽사리 감정이입할 나인데도. 한 달 전에 저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나와 당신은, 우리는 TV 앞에서 무사하다. TV 속 세상은 전투기가 날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무사하다. 그리고 멀쩡한 낯빛을 하고, TV 속 세상을, 이라크의 먼지 바람을, 팔루자의 화염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TV 속 팔루자를 관람한다. 맙소사,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택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살까지도, 죽음을 향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고통 없는 삶에 대한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을진대.” 그리고 오늘 팔루자에서 한 명의 한국인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나 우리는 무사하다. TV 앞에서 여전히 무사하다. 나의 일상도 무사하다. 결코 상처받지 않고 위협받지 않는다. 나의 사랑처럼.



상처.

사랑이란,. 사랑은 결코 천국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과 더불어 온다. 사랑은 결국 제 안의 지옥과 폐허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난 그 지옥을 긍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를 떠나보냈는지도 모른다. 후회는 끝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련과 후회의 마음은 다시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이성은 불가능하다고 가로막는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할까. 때로는 생각하지 않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상처를 넘어서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아직 생각 중이다.



눈물.

널 기억하면 눈물이 떠오른다. 같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던 우리의 모습도. 널 만나고, 새삼 알았다. 내가 울보란 것을. 내가 수없이 눈물지었다 해도, 네 눈물만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네 몸에 그어놓은 칼자국에서 검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나는 한 자루 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단 한번, 울었다.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그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 눈물 이전에, 또한 그 이후로 아들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물 이후에 아들은 직장을 잡았고, 돈을 벌었다. 어머니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가끔 제 속물근성의 이유를 어머니라 생각한다. 가족은 안식이면서, 영원히 외상이다. 나도 너에게 그랬을까. 안식이면서 외상이었을까. 아마, 끝모를 눈물로도 씻겨낼 수 없는 상흔일 것이다.



눈망울.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제 2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내 방에서 날 기다리던 너, 니가 내게 던진 눈빛. 내가 어떻게 그 눈빛을 잊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눈빛은 평생 날 따라다닐 거다. 한 마리 어린 새였다. 그 눈에는 한 마리 어린 새가 담겨 있었다. 너무 작고 너무 여려, 감히 손댈 수 없는. 그 눈빛은 날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모든 분노와 모든 증오를 일순 무너뜨리는 힘이었다. 세상에 저 홀로 버려진 그 모든 보잘것없는 것들에 내가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눈빛의 기억 때문이리라.



다시, 고해.

문득, 네 앞에서 오열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심한 부끄럼을 느낀다. 한번도, 단 한번도 난 네 앞에서 온전히 오열하지 못했다. 널 생각하면 고해 성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미처 그때는 다 쏟아내지 못한 내 상처와 죄의식을, 너에게 다 내어놓고 싶다. 물론, 다시 그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모든 건 예전 그대로일 테지만. 난 울기만 했지, 내 언어로 울지 못했다. 내 상처의 밑자리를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상처를 낱낱이 드러내기보다는 그 상처를 부여잡고 그저 나 아플 뿐이라고 항변하기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항변의 많은 부분이 과장이었지만. 미처 그때 다 쏟아내지 못한 내 상처와 죄의식을, 너에게 다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겠지.



그리고, 악몽.

꿈을 꾸었다. 갈가리 찢긴 네 몸. 나는 네 몸을 찢어발겼다. 난 오열을 토했다. 그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날처럼 넌 날 안아 주지 않았다. 찢어진 네 몸에 슬펐고, 너를 찢는 내 표정이 한없이 끔찍했다. 터져 나오는 오열을 네 입술이 덮었다. 아주 따뜻한 입술이었다. 하지만, 그 입술은 저주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무서웠다. 그 끝없는 저주에 내 몸이 투명하게 비워져갔다.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너도 그랬겠지? 한없이 투명해졌겠지? 나의 증오는 증오를 넘어 저주에 가까웠으니. 슬펐다. 잠깐 울었던 듯하다. 눈을 떠보니, 베개가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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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영하, 고종석, 김훈의 문장을 즐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매혹한다. 매혹할 뿐더러, 더러는 나를 이끌기도 한다. 글을 쓰고 싶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선망에서 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글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러한 욕망은 지극히 나약하다. 글을 쓰게 만드는 욕망은 선망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선망이 아니라, 내면이다. 내면에서 들끓는 무엇이 있을 때, 오직 그러할 때만 부족하나마 글이 나온다.



김영하의 문장은 대개 단문의 형태를 띤다. 단문 속에 담긴 그의 문장은 언제나 서늘하다. 그는 문장의 힘이 아니라, 서술의 힘으로 소설을 쓴다. 아니, 서술의 힘을 서늘한 문장에 담아, 그 둘을 맞부딪친다.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되바라진 계집애와 뒷골목 건달을 연기한다.


고종석의 문장은 단아하다. 그는 넘침을 모른다. 그의 문장은 넘칠 줄 모른 채 끝까지 견고함을 유지한다. 단아하고 정갈한 그의 문장엔 피 한 방울, 흙 한 줌 섞여 있지 않다. 그게 가끔은 못마땅하다. 그러다가도 나는 그의 문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겠는가. 나 역시 내 손에 흙 한 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고, 묻히지 못할 터인데.


김훈의 문장은 인공의 미로 너울거린다. 그의 문장은 말의 자연스런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애써 자르고, 애써 건너뛰고, 애써 돌아가고, 애써 잇댄다. 복잡한 사유의 경로를 통과한 그의 문장은 시가 주는 인공미로 가득하다. 내가 그의 사유를 바짝 뒤따를 때 그의 시는 자연적이나, 많은 경우에 그의 사유는 나를 앞지르기 일쑤고, 그럴 때 김훈의 문장은 시적인 차원에서 기계적이다.



그들의 문장은 서늘하다. 김영하는 대상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서늘하고, 고종석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까뒤집으면서 철저한 자기 성찰의 시선을 거두지 않기에 서늘함을 풍기고, 김훈은 대상을 복잡한(비일상적) 사유의 과정을 통해 해체하고는 지극히 낯선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던져놓으로써 서늘함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세 겹의 서늘함을 이룬다.


세 겹으로 서늘한 글을,

세 겹을 아우르는 글을,

세 겹을 하나의 결로

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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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눈이 벌게질 정도로 피곤함을 느낀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잠깐 소스라치게 놀란다.

흰자위에 가는 금으로 퍼진 실핏줄이 가득하다.

가뜩이나 희멀겋게 뜬 얼굴은 그 붉은 선들로

더욱 초췌해 보인다.

안과에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자꾸 밀어두기만 한다.

종종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알이 뻑뻑하고 쓰라릴 때도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안구가 건조해진 듯하다.

그럴 때면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한다.

쓰라린 눈물만 비어져 나올 뿐이다.

눈을 뜨려 해도 뜻대로 안 된다.

뜨고 싶어도 뜰 수 없는 상태,

맹인의 절망도 그게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건조해진 안구처럼,

내 삶은 다소 건조해 있다.

적당한 물기가

필요할 듯하다.


 

요즘에는 여자를 만나면

먼저 그 여자의 손을 본다.

뭉뚝한 손보다는 손가락이 가늘고 긴 손이 좋다.

손가락이 섬세한 사람은 마음도 섬세할 것 같다.

섬세함은 가끔 피곤하고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자상함과 사려 깊음으로 드러난다.

자상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만나고 싶은가 보다.


손에서

그런 섬세함만을 확인한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손은 내게 매우 성적인 기관으로 다가온다.

희고 가는 손을 보면

문득 안아 보고 싶다.

벗겨 보고도 싶다.

궁금하다.

그 속살이.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간 거창하게 느껴지는 일이고,

얼마간 민망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서른을 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꿈이란

분명 그렇다.

내게 남은 꿈이란 무엇일까.

꿈을 꿀 수 있을 때까지

꿈을 꾸고 싶다는 것?

꿈을 꾸다

깨어나고

다시

꾸고

다시

자고

....

이 삶을 확 까뒤집을 때까지

까뒤집는 그 꿈을,

계속 꾸고 싶다.

그게 내 꿈이다.

아, 삶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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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문부식, 삼인)를 다시 들췄다. 얼핏 그 속의 저 문장들이 나의 것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착각이다. 그 착각은 5월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문부식)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이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그 5월의 광주가 어김없이 또 돌아왔다. 망월동에 아름다운 묘지가 들어섰고, 피해자 보상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광주는 역사에 제 이름을 남겨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조국은 여전히 또 다른 누군가를 학살하려 한다. 2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광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내 나이 스물여덟. 96학번에 불과한 내가, 5월의 광주를 원죄처럼 느낀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뿌리부터 전라도 사람이란 증거이리라. 전라도 사람은, 결코 5월을 잊지 못한다. 죽어도 잊지 못한다. 내가 거기 없었다 해도,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이 서린 상처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스민다. 시간을 거슬러 스미고, 스며서 곪아 썩는다. 언제나 그렇다. 내 피에도 얼마간 그 한이 서려 있다. 나를 키운 건, 오 할은 그 피다. 피의 바람이다.  

 

80년, 저 홀로 섬처럼 고립된 광주에서, 사람들은 대동 세상을 이뤘다. 수많은 무기가 넘실거렸지만,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장의 아주머니들은 밥을 해 날랐고, 여공들은 도청에서 밥을 해 먹였다. 거리와 도청에 모인 사람들에게. 청년들은 무기를 들었다. 오로지 제 형제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내 어릴 적에도(90년 즈음) 데모가 있는 날이면 광주 대인 시장 사람들은 김밥을 해 날랐다고 한다. 그 때도 그들은 대동 세상의 기억을, 그 꿈 같은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했던 것일까. 촛불 집회는 대동 세상의 또 다른 꿈을 보여 주었다. 칼빈 소총 대신 우리 손에 들려진 촛불은, 광주라는 역사의 척후병을 향해 흔들렸다. 그 척후병의 숭고한 희생으로, 역사는 여기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조국이 그저 침묵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대동 세상에서 뜨겁게 조국을 기다렸다. 하지만, 조국은 끝내 침묵했다. 침묵은 그 어떤 무기보다 차갑게 끔찍했다. 광주에 고립된 그들은, 제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그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한은 보복을 원하지 않는다. 보복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 한은 달래줘야 한다. 그건 돈의 문제도, 보상의 문제도 아니다. 그건 진실의 문제다.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그 악에 오로지 침묵하기만 했던 광주 밖의 사람들이 달래줘야 한다. 광주에 대한 사과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광주에 더 이상 무슨 사과를 한단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당신의 침묵을 깨는 것, 오직 그것이 광주를 기억하고 광주를 기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홀로 버려진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숙연해하고 분노하는 것만이, 광주를 살리는 길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픈 광주를 치료하는 길이다. 이라크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버려진 것들이 모욕당하고 있다. 

 

 

  “‘우,리, 승,리,할, 수, 있,을,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 가슴이 먹먹해지고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와 앞에 선 동지를 와락 끌어 안았다. 이제, 그때 하,지, 못,했,던, 대,답,을, 1,4,년,이, 지,난, 뒤, 세번째 감옥에서, 한,다. ‘이,기,든, 지,든, 괜,찮,아!’라,고. 바,위,를, 만,나,면, 돌,고, 둔,덕,을, 만,나,면, 넘,으,면,서, 끝,끝,내, 거,대,한, 바,다,에, 이,르,는, 물,의, 운,동,을, 깨,달,은, 뒤,의, 대,답,이,었,다.”(285)

 

 

예전에, 저 글을 옮겨다 적어놓은 적이 있다. ‘이기든 지든 괜찮아’. 저 한 마디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가슴을 때린다. 우린 항상 이기는 것에만,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둔다. 나 역시, 매일, ‘당신’들을 이기려고 안간힘쓴다. 당신보다 더 유식하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능력 있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좋은 차를 갖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살기 위해서 아득바득 싸우고 또 싸운다. 당신들을 이기고 돌아온 날이면, 난 어김없이 앓고 만다. 겉으론 득의만만한 내 표정엔 어딘가 그늘이 져 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날이 그렇게 나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진다. 나의 영혼은 살을 내린다. 영혼의 뿌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살을 내린다. 나날의 싸움에서 당신을, 세상을 이긴 만큼, 난 조금씩 변해간다. 변해가며 썩어간다. 지식을 쌓으며, 관계를 쌓으며, 돈을 쌓으며 썩어간다. 쌓아두기만 하면 그저 썩을 뿐인데도, 오로지 쌓는다. 쌓는 것은 썩는 것이다. 그러다, 무언가가 툭 떨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게 무얼까. '당신'도 그런 적이 있는가? '당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가끔 아픈가? 그게 무얼까.

 

매일 매일의 싸움에서 지는 걸 생각해 본다. 그 싸움에서 정말 질 수 있을까. 가끔은, 너무 지쳐 날 놓아버리고 싶은 날에는 언뜻 지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난 기어코 이기려고 애쓴다. 질 수 있기를, 가끔씩은 지기도 하고, 또 가끔씩은 선뜻 지기 위해 넘어지기도 하기를. 그 싸움의 복판에서, 한없이 지고 말없이 작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전투에서는 지고, 싸움에서는 이기는’ 역설의 진리와 함께 뒹굴고 싶다. 작아지면서 안으로, 제 안으로 커지고 깊어지고 싶다. 그렇게 웅숭깊어질 수만 있다면.

 

광주를 기억하는 것, 전라도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상처받은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분명 지는 싸움을 끊임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비록 지고 또 지지만, 바다를 그리는, 바다로 향하는, 바다에 이르는, 바다를 이루는 그 과정을 제 삶으로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이여, 나날의 싸움에서 우리 지기로 하자. 아, 광주여,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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