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영하, 고종석, 김훈의 문장을 즐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매혹한다. 매혹할 뿐더러, 더러는 나를 이끌기도 한다. 글을 쓰고 싶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선망에서 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글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러한 욕망은 지극히 나약하다. 글을 쓰게 만드는 욕망은 선망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선망이 아니라, 내면이다. 내면에서 들끓는 무엇이 있을 때, 오직 그러할 때만 부족하나마 글이 나온다.
김영하의 문장은 대개 단문의 형태를 띤다. 단문 속에 담긴 그의 문장은 언제나 서늘하다. 그는 문장의 힘이 아니라, 서술의 힘으로 소설을 쓴다. 아니, 서술의 힘을 서늘한 문장에 담아, 그 둘을 맞부딪친다.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되바라진 계집애와 뒷골목 건달을 연기한다.
고종석의 문장은 단아하다. 그는 넘침을 모른다. 그의 문장은 넘칠 줄 모른 채 끝까지 견고함을 유지한다. 단아하고 정갈한 그의 문장엔 피 한 방울, 흙 한 줌 섞여 있지 않다. 그게 가끔은 못마땅하다. 그러다가도 나는 그의 문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겠는가. 나 역시 내 손에 흙 한 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고, 묻히지 못할 터인데.
김훈의 문장은 인공의 미로 너울거린다. 그의 문장은 말의 자연스런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애써 자르고, 애써 건너뛰고, 애써 돌아가고, 애써 잇댄다. 복잡한 사유의 경로를 통과한 그의 문장은 시가 주는 인공미로 가득하다. 내가 그의 사유를 바짝 뒤따를 때 그의 시는 자연적이나, 많은 경우에 그의 사유는 나를 앞지르기 일쑤고, 그럴 때 김훈의 문장은 시적인 차원에서 기계적이다.
그들의 문장은 서늘하다. 김영하는 대상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서늘하고, 고종석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까뒤집으면서 철저한 자기 성찰의 시선을 거두지 않기에 서늘함을 풍기고, 김훈은 대상을 복잡한(비일상적) 사유의 과정을 통해 해체하고는 지극히 낯선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던져놓으로써 서늘함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세 겹의 서늘함을 이룬다.
세 겹으로 서늘한 글을,
세 겹을 아우르는 글을,
세 겹을 하나의 결로
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