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A>를 보고 조금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JSA>와 같은 대중영화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한국영화도 남북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데올로기는 욕망처럼 끈질기기에.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 그 속에서 북한은 대개 헐벗고 불안(정했다. 그 불안정이 또한 우리를 불안하게)했다. 그도 아니면, 기껏해야 이야기 소재이거나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데올로기적 강박에 매여 있었다. 아닌 게 있었나, 도대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쉬리>만 해도 그러했다. 그 영화의 시선은 참으로 뻔뻔하다. 그 영화는 얼핏 가치중립적임을 가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 관객의 시선을 ‘유중원’(한석규분)에게 비끄러맨다. 아주 단단히.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중원의 일상을 따라갈 뿐이다. 그 결과는? 관객은 자연스레 그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선악을 가름하게 된다. 유중원의 시각을 넘어서서 영화를 본다? 아마 보통의 관객(쉽사리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마는)에겐 불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이방희’(김윤진분)와의 철저한 ‘거리 두기’를 관람의 한 요소로 끌어들인다. 관객에게 이방희는 철저히 소외된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소외와 반비례해서, 유중원과의 동일시는 그 밀도를 더해간다. 영화의 시선은 관객을 유중원에게 깊이 몰입하도록 이끈다. 영화는 두 인물에 대한 이 같은 입장 차이를 기반으로 북한과 남한 사이의 체제 경쟁을, 은밀하게 반복한다.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소박한 방식으로 설파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쉬리>는 일정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주1) 하지만, <쉬리> 역시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뿐이다. 인물에 대한 입장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말이다. <쉬리>는 관객의 무의식 속에서 체제 우월심을 부추긴다. 그게 그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였다.(주2)
<JSA> 또한 분단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전쟁이 빚은 남북 분단, 영화는 거대한 역사적, 정치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분단을 이야기하되, 거대하게 꾸미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장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담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서 휩쓸리고 짓눌리는 개인을 비장하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비장미 넘치는 거대 서사 대신, 개인의 자잘한 이야기가 펼쳐질 뿐이다. 개인의 자잘한 이야기 속에 시대가, 역사가, 사회가 점점이 박혀 있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야기는 지극히 내밀한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비무장 지대 북한 초소라는 그 사적 공간은 이중적이다. 그곳은 일차적으로 ‘사적 공간’임에 틀림없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함께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개인적, 인간적, 사적, 내적 공간이다. 거기에서 젊은이들은 닭싸움을 하고 사랑을 추억하며 꿈을 이야기한다. 개인들 사이의 친밀감으로 충만한 사적 공간으로서의 초소는 더불어서 다른 의미(와 기능)도 지니고 있다.
그 공간은 앞서 이야기한, 분단이라는 특정한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깊숙이 관계된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초소’는 단순히 사적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규율과 질서로 포섭된 ‘제도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그 공간에는 적용되는 규율과 법규가 있다. 즉, 그곳은 역사적, 정치적, 구조적, 제도적, 공적 공간이다. 남북 대치라는 정치적 문제가 가시화된 곳, 그곳이 바로 비무장지대다. 그곳은 남북 대치의 최정점을 구체화하고 있는 곳이다. 거기엔 수많은 금기와 규율이 존재하고 있다. 한 개인이 함부로 그 금기와 규율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북한 초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남한의) 체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혹은 적에게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어쨌든, 남북의 젊은이들이 어울렸던 ‘초소’는 남북 대치의 정점에 놓인 대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우애와 친밀이 넘실거린 접점의 공간이다. 정점의 공간, 접점의 공간.
이 영화의 원작은 박상연의 소설 <DMZ>(민음사)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광장>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였다. ‘이명준’(주인공)이 선택한 제3세계라는 가능성이 물거품 같이 터져 버린,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 제3세계라는 가능성은 이분법의 세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망명국으로 선택한 제3세계라는 가능성이 결국 자살로 무화되기에. 그 세계의 이분법은 그토록 끈질겼다. 그것은 두 개의 체제 말고는 어떤 다른 선택도, 고려도 불가능한, 철저히 이분법적인 세계였다. 전시대가 극단적 이분법의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는 이분법을 넘어선, 혹은 넘어서는 시대다. 그러므로, 이분법의 공간이 아니라, 혼재의 공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광장과 밀실의 엄격한 분리가 아닌, 광장이면서 동시에 밀실이기도 한, 그런 공간이 솟아오른다. 동시에 그것은 공적 영역이면서 사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점이지대와도 같다. ‘초소’는 바로 그런 점이지대로서 제시되었다. 우리 시대 남북의 모습, 극단적 대립이 아닌 대립과 공존이 뒤엉킨 모습을, 영화는 그 초소에 집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립과 공존이 뒤엉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혼재된 초소. 하지만, 혼재는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성으로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압도하는 순간, 혼재의 공간은 붕괴되고 만다.
한 북한 병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혼재의 공간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병사가 출현하기 직전까지 그 공간은 지극히 내밀한 사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병사가 출현하면서, 그 공간은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그 병사의 등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적 영역의 느닷없는 침범을 상징한다. 개인적 욕망과 관계로 한없이 충만되어 있던 초소는, 갑작스런 병사의 출현과 더불어 돌연 공적 공간으로 변하고, 그 공적 공간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제도적) 이름을 호명받는다. 오경필 ‘중사’, 이수혁 ‘병장’이라는. 그 공적, 제도적 공간 속에서, 오경필 중사나 이수혁 병장은 인간 오경필, 인간 이수혁을 내버린다. 그들은 오로지 ‘중사’ 오경필, ‘병장’ 이수혁으로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갈 뿐이다. 원래 있던 자리로,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자리로, 제도가 그들을 부리는 자리로. 사적 개인에서 한순간 사회적 개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끔찍하게도. 왜? 그들은 공식적으로 적군이니까, 그들은 제도적으로 ‘주적(主敵)’으로 규정되어 있으니까. 결국 그들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해댔다.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았다.
이수혁 병장(이병헌분)의 자살은, 도덕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사적 공간을 향한 극단적인 퇴행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제도적, 사회적, 공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도 없이 자기들끼리 총질한 그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로 말이다. 그는 결국 그 세계로 떠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오로지 사적 공간으로서만 충만한 세계다. 그는 떠났다. 육군 ‘병장’ 이수혁, 대한민국 ‘국민’ 이수혁이 아닌, 인간 이수혁으로, 오경필을 형이라 부르던 이수혁으로.
소피 소령(이영애분) 주재 하에 조사를 받던 도중, 오경필 중사(송강호분)가 걸걸한 목청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만세! 만세!”를 외쳤던 것은 공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내면에서 그렇게 외쳤던 게 아니다. 그 장면의 갑작스러움에 관객들은 다소 당황했으리라. 그 장면은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이 결코 아니다. 그 장면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충돌을 잘 보여 준다. 오경필 중사는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사적 영역으로서 초소에서 벌어졌던 모든 얘기들은 침묵 속에 묻혔다. 단지, 공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중사’ 오경필만이 남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찬양할 뿐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자아,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적 자아의 목소리였다. 제발 날 못살게 굴지 말라고, 제발 날 우리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땅에 무사히 보내달라는 사회적 자아의 호소였다. 그 때 그의 모습은 지극히 공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사적 영역’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초소에서 어울렸던 남북의 젊은이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단지, 체제와 규범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도 아닌 체제와 규범이 그들의 ‘내면’과 ‘진심’을, 그리고 ‘진실’을 파괴하고 짓밟았다. 강력한 공적 영역의 갑작스런 침범 속에서, 개인의 내면은 붕괴하고 내밀한 관계는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공적 영역(과 그것이 한 개인에게 부과한 임무/자리/이름)은 아무런 내적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부여받은 것이기에 강제적이나, 나 개인에게 있어 필연적이지는 않다. 언어처럼. 나는 모국어를 택하지 않았다. 단지, 모국어가 나를 택해 자신의 사용자로 삼았을 뿐이다. 언어의 질서는 사회적 질서와 닮았고 또 가깝다. 언어가 나를 부리듯이, 사회적 규범, 제도, 질서, 법률, 규제, 규칙, 규율, 윤리가 나를 규정하고 나에게 지시한다. 그것은 모국어처럼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지극히 가변적이고, 또한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언제고 그것(공적 영역과 그것이 부과한 임무/자리/이름)은 잊혀지고 부정될 수 있다. 북한 초소에서, 자신의 임무를 잊은 남북의 젊은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적 영역이 온전히 사적 영역으로 남을 수 있으려면, 공적 영역이 함부로 사적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람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왕복 운동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하나의 공간은 두 영역의 겹침으로 존재한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보다 훨씬 도드라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 사이에는 무수한 변이 공간들이 놓여 있다. 우리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혼재된 양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한 혼재 자체가 아니다. 공적 영역이 개인의 사적 욕망, 사적 관계를 왜곡하거나 억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완벽한 무정부주의는 사적 영역으로만 충만한 세상을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공적 영역에 의해 함부로, 과도하게 침범, 왜곡, 훼손되는 '사적 영역'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사적 영역만 존재하는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 영역이 온전히 이해받고 존중받는 세계를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영화에서처럼 공적 영역의 느닷없는 출현, 그로 인한 ‘사적 영역’의 붕괴는 비극적이다. 만약, 공적 영역이 조금만 더 느슨했더라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과 그것이 부과한 적대 의식)은, 한 병사의 돌연한 출현에 초소에 모여 있던 병사들을 한순간 적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끔찍했던 것이다.
사적 영역의 복권을 노린다는 점에서, 영화는 공적 영역, 국가나 정부(로 대변되는 질서, 제도, 규범)를 ‘간접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공적 영역을 거부하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읽어내긴 힘들다. 이수혁의 자살을 공적 영역의 거부로 읽어낼 수 있지만, 제 목숨을 희생하면서 얻는 사적 영역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JSA>가 확보한 사적 공간은 얼마간 부족함을 남길 수밖에 없다. 사적 영역이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JSA>의 세계는 다소 비극적이다. 죽음으로써 공적 영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공적 영역 속에서 사적 영역을 일궈야 한다. 무정부주의는 거기에 이르러야 한다. 죽음으로 확보된 사적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제 몸으로 향유할 사적 영역에 이르러야 한다. <올드 보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한 무정주의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는 철저한 반체제성, 반사회성을 경유해야 하는 것이다.
<JSA>의 끝은 허무했다. 혼재된 공간은 얼마간 위태로움을 내장한다. 그 위태로움이 비극으로 종결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아직도 막막할진대, 영화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남과 북은 아직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주1 : 가령, 유흥가 전화부스에서 박무영(최민식분)이 유중원(한석규분)과 통화한 내용을 통해 볼 때, 영화가 남한 체제의 모순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삽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중립적으로 남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기 위한. 그러나, 영화는 철저히 남한의 편에 서 있다. 북한은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불안정한 사회일 뿐이고, 북한의 특수 부대 훈련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잔혹 그 자체일 뿐이다. 또한, 그곳은 ‘제 어미가 죽은 자식의 살로 연명하는’(박무영이 한 말), 끔찍한 생지옥이다. 그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그에 비해, 남한은 나름대로 모순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불안하지도, 잔혹하지도, 끔찍하지도 않다.
주2 : 이런 한계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가족애, 형제애를 다루고 있지만, 심층에서는 어김없이 ‘체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강제규의 시각은 언제나 이데올로기 안쪽에 머문다. 그가 재능 있는 상업영화 감독인건 분명하나, 그는 작가주의 감독은 절대 아니다. 영화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 무의식의 논리를 깨지 못한다면, 아마 그의 영화는 영원히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은 다음으로 미룬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힘이 남으면, 그 때 정리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