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
누군가의 말을 조금 흉내내 말한다면, 사랑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철새가 그러하듯 와도 되는 곳에만 온다. 황폐해진 곳, 외로움에 지친 곳에 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줄 감정이다.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성욕만이다.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사랑과 성욕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편지.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비아에게. 제가 변형시킬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주옵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위해서는 그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주옵시고, 또한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려주시옵소서.(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아직 그 편지는 보내지 않은 상태다. 어쩌면, 그 편지의 수취인은 그녀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다.
안부.
잘 살고 있니? 너의 흔적을 몹시도 찾았다. 싸이에서 네 홈피(의 껍데기)를 찾았고, 알라딘에서 서평 하나를 발견했다. 그 조각들을 발견하고 잠시 기뻐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 그랬을 뿐이다. 그것들은 너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그저 너의 부재만을 새삼 확인시켜 줄 뿐이지.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 번 널 만나게 된다. 내 머릿속에서.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은 좀 그랬다.
고해.
거리에서 널 만났다.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누군가의 어깨에서, 누군가의 미소에서 널 발견했더랬지. 언젠가 한번은, 버스에서 널 보기도 했다. 정말 너였다. 앞자리에 앉은 그 여자의 뒷머리나 목덜미가 너를 꼭 빼닮았지. 그녀의 신발이나 가방까지도. 한없는 슬픔이 밀려 왔다. 그때 그 버스는 내게 아주 연극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울고 있었다. 울부짖었다. 모르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내 마음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왜 우리가 그래야만 했지?’ 그 여자는 짐짓 사제처럼, 내 고해를 조용히 제 등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뼈아픈 후회와 자책에, 나는 내 가슴을 부서져라 치고 있었다.
오열.
오늘 TV에서 어떤 가족이 오열을 토하고 있더라.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평소 같으면 쉽사리 감정이입할 나인데도. 한 달 전에 저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나와 당신은, 우리는 TV 앞에서 무사하다. TV 속 세상은 전투기가 날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무사하다. 그리고 멀쩡한 낯빛을 하고, TV 속 세상을, 이라크의 먼지 바람을, 팔루자의 화염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TV 속 팔루자를 관람한다. 맙소사,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택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살까지도, 죽음을 향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고통 없는 삶에 대한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을진대.” 그리고 오늘 팔루자에서 한 명의 한국인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나 우리는 무사하다. TV 앞에서 여전히 무사하다. 나의 일상도 무사하다. 결코 상처받지 않고 위협받지 않는다. 나의 사랑처럼.
상처.
사랑이란,. 사랑은 결코 천국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과 더불어 온다. 사랑은 결국 제 안의 지옥과 폐허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난 그 지옥을 긍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를 떠나보냈는지도 모른다. 후회는 끝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련과 후회의 마음은 다시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이성은 불가능하다고 가로막는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할까. 때로는 생각하지 않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상처를 넘어서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아직 생각 중이다.
눈물.
널 기억하면 눈물이 떠오른다. 같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던 우리의 모습도. 널 만나고, 새삼 알았다. 내가 울보란 것을. 내가 수없이 눈물지었다 해도, 네 눈물만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네 몸에 그어놓은 칼자국에서 검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나는 한 자루 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단 한번, 울었다.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그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 눈물 이전에, 또한 그 이후로 아들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물 이후에 아들은 직장을 잡았고, 돈을 벌었다. 어머니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가끔 제 속물근성의 이유를 어머니라 생각한다. 가족은 안식이면서, 영원히 외상이다. 나도 너에게 그랬을까. 안식이면서 외상이었을까. 아마, 끝모를 눈물로도 씻겨낼 수 없는 상흔일 것이다.
눈망울.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제 2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내 방에서 날 기다리던 너, 니가 내게 던진 눈빛. 내가 어떻게 그 눈빛을 잊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눈빛은 평생 날 따라다닐 거다. 한 마리 어린 새였다. 그 눈에는 한 마리 어린 새가 담겨 있었다. 너무 작고 너무 여려, 감히 손댈 수 없는. 그 눈빛은 날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모든 분노와 모든 증오를 일순 무너뜨리는 힘이었다. 세상에 저 홀로 버려진 그 모든 보잘것없는 것들에 내가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눈빛의 기억 때문이리라.
다시, 고해.
문득, 네 앞에서 오열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심한 부끄럼을 느낀다. 한번도, 단 한번도 난 네 앞에서 온전히 오열하지 못했다. 널 생각하면 고해 성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미처 그때는 다 쏟아내지 못한 내 상처와 죄의식을, 너에게 다 내어놓고 싶다. 물론, 다시 그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모든 건 예전 그대로일 테지만. 난 울기만 했지, 내 언어로 울지 못했다. 내 상처의 밑자리를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상처를 낱낱이 드러내기보다는 그 상처를 부여잡고 그저 나 아플 뿐이라고 항변하기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항변의 많은 부분이 과장이었지만. 미처 그때 다 쏟아내지 못한 내 상처와 죄의식을, 너에게 다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겠지.
그리고, 악몽.
꿈을 꾸었다. 갈가리 찢긴 네 몸. 나는 네 몸을 찢어발겼다. 난 오열을 토했다. 그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날처럼 넌 날 안아 주지 않았다. 찢어진 네 몸에 슬펐고, 너를 찢는 내 표정이 한없이 끔찍했다. 터져 나오는 오열을 네 입술이 덮었다. 아주 따뜻한 입술이었다. 하지만, 그 입술은 저주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무서웠다. 그 끝없는 저주에 내 몸이 투명하게 비워져갔다.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너도 그랬겠지? 한없이 투명해졌겠지? 나의 증오는 증오를 넘어 저주에 가까웠으니. 슬펐다. 잠깐 울었던 듯하다. 눈을 떠보니, 베개가 젖어 있었다.